[아침논단] '멘붕' '듣보잡' 쓰며 피폐해지는 우리 정신세계 (조선일보, 문정희) 2012년 7월 2일 : 클릭 비추.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언어 그 자체가 토대이기도 해서 물론 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정신 영역에 자연스럽게 침투하고, 영향을 미친다. '멘붕'이니 '듣보잡'이니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투명한 언어들이다. 한편, '멘붕'과 '듣보잡'을 동일한 평면에서 등가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멘붕은 재밌는 조어라고 생각하고, 듣보잡은 공격적이고, 차별적인 조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듣보잡이란 말을 사라져야할 단어로 규정하긴 어렵다.

어떤 트윗은 이 칼럼을 고급문화과 대중문화를 인위적으로, 위계적으로 구별한다고, 즉, 꼰대스런 고급문화 애호가 갖는 (역설적인) 천박함을 공격하는데, 이 칼럼을 공격하는 관점으론 적당한 분석과 해석 표준은 아니라 보고, 오히려 오래된 시론을 빌리자면, '반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김수영)나 '풍자냐 자살이냐'(김지하)의 관점이 좋을 듯 싶다. 마르쿠제의 어투를 빌자면, 브레히트의 계몽적인 희곡에 담긴 언어들보다는 '듣보잡'이나 '멘붕'이라는 (민중)언어가 훨씬 더 한국사회를 해석하는데 적실한 언어들이다. 물론 이런 (민중) 언어 (특히 유행어)라는게 무슨 인식론적인 성찰을 담은 말은 아니다.

그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지식인(이 자주 쓰는) 언어가 무슨 우월하게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말도 아니다. 진실이 왜곡된 시대는 왜곡된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통해 지탱된다. 권력과 지식은 서로 딴 몸인 적 없으며, 지식은 대개 그 권력의 하녀로서 기능해왔다. 그 모순이 가장 심한 영역은 대중, 민중의 영역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그 지식인) 기득권 영역이라는 말이다. 시대 모순이 심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언어는 그 모순을 가장 계급적으로 반영하는 세속주의적이고, 권력주의적인 경향을 띠는 바, 문정희의 이 나이브하고, 감상적인 '착한 말 쓰자'는 언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건 무식하게 도식적이고, 폭력적으로 계몽적이라서, 실상 현실의 모순을 흔드는 진실의 언어로서, 지식인이 추구해야 하는 말, 그 언어의 반대편에 속한다.

'멘붕'이나 '듣보잡'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사회적 진실은 '브레히트, 릴케 읽자' 따위의 낭만적 기만으로 깨뜨려지지 않는 진실이며 질서다. 그건 그 말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즉, 그 말을 낳은 사회를 더 넓은 존재와 성찰의 언어로 감싸안음으로써, 즉, 그 말을 낳은 그 사회의 모순을 치유함으로써 해결될 수 밖에 없다. '착한 말 쓰자, 좋은 말 쓰자'는 소박한 계몽주의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시인이라는 자가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모순의 언어를 직조하는 조선일보에서 이런 후진 칼럼을 쓴다는 것 자체에 이 시대의 불행과 이 시대를 흐르는 언어의 슬픔이 존재한다. 그건 자못 시적인 모순, 절망으로서의 현실을 그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시인 스스로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긴데 웃을 수 없는 코미디. 문정희 시인의 글은 코미디지만, 그가 조선일보에 쓴 글과 그 행위는 비극적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참으로 슬픈 코미디인 거다.

* 발아점:
임예인의 트윗을 리트윗한 종이채크와 또 다른 종이채크의 리트윗

* 트윗에 생각나는대로 올린 단상들 묶어서 사소하게 추고한 글. 


최진실과 디즈니랜드

2012/07/02 12:25
작년 말(11.24) 경희대에서 있었던 특강('인터넷과 윤리적 딜레마') 중 최진실과 인터넷 실명제 부분만 떼어서 자료 공유(CC BY-SA).


최진실과 디즈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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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기쁜 일. 세계적인 매거진형 리더 앱서비스플립보드(Flipboard) 뉴스 섹션에 슬로우뉴스가 선정됐다. 호들갑 떨만한 일은 아니지만, 돈 한푼 생기지 않는(그렇다고 앞으로 돈을 적극적으로 안벌겠단건 아니지만 ㅎㅎ)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열 여섯 명의 편집팀원들에겐 작은 선물 같은 일이다. 인정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이건 정말 부정하기 어렵다. 그나저나 신나게도 조선일보는 이 뉴스 섹션에서 빠져있다. 플립보드 한국어판 큐레이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언젠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만나고 싶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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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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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에서 본 모습 (via 슬로우뉴스 페북 페이지)





고종석

2012/07/02 09:22
고종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칼럼니스트다. 고종석이 한겨레에 다시 칼럼을 쓰나보다. 난 오늘 처음 알았다. 고종석 칼럼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 갖는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거듭 반추하는 좋은 글을 쓴다. 그러니까 내용으로서 아주 훌륭하다. 거기에 더해 고종석은 언어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미학적인 요소에도 주목한다. 쉽게 말해 정보 그 자체의 전달이 중요하지만, 거기에 더해 그 정보가 담기는 방식, 그 정보가 갖는 분위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안다. 정보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도 그 정보를 표현하는 표현 그 자체에 내재된 사람의 감수성, 그 정보라는 알맹이 주변을 흐르는 시대의 공기 따위를 아주 민감하게 잡아내는 능력이 고종석에겐 있다. 요즘은 기성언론들의 기사는 물론이고, 칼럼도 제대로 읽지 않는데, 고종석 칼럼은 좀 챙겨서 읽어야지 하고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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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불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불안한 독자는 읽지 마세요.

<우먼 인 블랙>(제임스 왓킨스. 2012)는, 짧게 말하자, 재미 없는 공포물이다. 메시지가 나름 의미심장하긴 하다. 아이가 죽는 건 어른의 죄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이를 위해서 죽지 않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한 아이들은 계속 죽을 수 밖에 없다. 독특한 메시지다. 그동안 접하지 못한 이질적인 플롯이라서 새롭긴 하다. 그리고 그 의미심장한 테마를 드러내는 방식도 장르의 관습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기대를 비틀고 배반하는 방식이라서 어떻게 이 이야기를 끝낼지 정말 궁금하게 한다.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만(주인공이 죽는다), 그렇다고 그 죽음이 과장된 죽음은 아니며(왜냐하면 주인공은 바로 구원받으니까), 또 영화가 나름으로 구상하는 테마(아이가 천당에 가려면 어른이 죽어야지)에 아주 잘 부합하긴 한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너무 착해서, 뭐랄까 '에이씨,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 만큼 허무하긴 하다. 비주얼은 예상가능한 수준으로 훌륭하다(특히 디테일이 훌륭하다). 물론 <불청객. Intruders>(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디요. 2011)의 허무함 보다는 그래도 메시지가 있는 허무함인데, 그 <인트루더스>는 그 마저도 없다. 이 얼굴 훔치는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는 끝내 관객들을 궁금증에 빠지게 하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식이 그야말로 상투적인 장르의 관습에 기대어 있어서(주인공의 유년은 딸에게 전이된다. 세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귀신. ㅡ.ㅡ; ) 어떤 놀라움도 선사하지 못한다. 공포영화가 놀랍지 않다면 그건 두 시간 짜리 시간낭비지, 뭐. 그야말로 식상함 쩌는 관습적 내러티브를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게 혼신을 다한 끝에 결국은 실패하고야 만다. 이 훌륭한 배우들을 가지고도 이 정도로 밖에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아쉽다. 

사족. <불청객>에서 카리세 반 하위텐(Carice van Houten)은 평범한 엄마 역할이고, 연기도 아주 평범하지만, 개인적으론 정말 끌리는 배우다. <블랙 데스>(크리스토퍼 스미스. 2010)에선 <게임의 왕좌> 이미지 연장에서 캐스팅 됐는지 요부형 이교도로 나오는데 <불청객>만 못하다. 아직 (아마도 출세작인 듯한) <블랙북>(2006)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꼭 챙겨봐야겠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