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익명 : 들풀의 <페이스북 유감>을 읽고

2012/02/24 19:48
* 발아점
들풀 님께서 겪은 '페이스북 실명 강요 정책'에 관한 글을 읽고, 그 글에 담긴 댓글을 추고해 올립니다.

저 개인으로 보면 들풀 님 글의 발아점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아주 아주 기쁘고, 반가운 글인데요.  
내용을 읽어보니, 이건 정말, 짜증이 솟구치네요.
정말 욕보셨습니다.

'페북의 실명 정책'에 관해선 제3회 인주찾기 컨퍼런스 펄님 발제가 떠오르네요.

펄 : 페이스북 평균인 (동영상 링크. @소리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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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찾기 세 번째 컨퍼런스, <SNS 시대의 블로그> 중 펄의 발제 <페이스북 평균인> 발표 모습 (동영상 캡처)

발제 중에 보면 "실명이 아닌 건 어떻게 알고?"라고 황당해하는 펄님 발언이 있는데, 정말 실명이 아닌 건 어떻게 아는건지... 실명제 사이트도 아닌데 말이죠. 한국인 작명법을 분석(?)해서 어떤 필터링 기제를 만든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참 삽질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게 실효성도 없는 것이 '가명'을 '실명'처럼 넣으면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는건데 말이죠. 확인할 방법도 없고. 그럼에도 IT 문화/기술과 친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반)자발적 실명화'를 의식/무의식으로 강요받고 있는 형국이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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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의 <페이스북 평균인> 발제 자료 중에서

아무튼 정보의 폐쇄성(웹 전체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비밀그룹 안에서도 그 그룹글이 검색도 안되는.... 아카이빙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형국이죠)과 실명 강요 정책은 정말 '페이스북 월드'가 초래하는 가장 부정적인 속성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선 웹은 거꾸로 가는 것 같고,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가 페이스북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선 아주 이해가 되네요.

들풀 님처럼 '아름다운 익명'(실존적 가명 혹은 필명)들이 점점 사라지는 듯 하여 몹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저는 들풀 님이 몇 살인지, 어떤 이름인지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결혼은 하셨는지, 직업은 뭔지, 연봉은 얼만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세속적인 호기심이 아주 없다면 거짓말일테죠.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오프라인에서의 이른바 '커리어'가 의미 없단 이야긴 아닙니다. 너무 중요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죠. 더불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의 성취 표지들을 강조하는, 때론 유치하다 싶을만큼 그걸 자랑하는 모습들도 충분히 그 나름으로 이해가 되고,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새로운 탄생의 땅이었습니다. 블로그에서 우린 새로 태어난 것 같아죠. 우리는 마치 요나가 된 것처럼,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혁명가처럼, 자기만의 작고 소박한 이야기들을, 때론 세상을 향한 의기로운 외침을 '익명이라는 자유로운 대지' 위에서 나눴습니다.(+ 파워블로거 - 서) 그런데 이제 점점 더 그 익명의 대지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서비스는 웹 위에 서 있지만, 실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꿨던 인터넷이 페이스북 월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기술적 완성도와 대중성, 그리고 편의를 주는 서비스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페이스북 제국이 강요하는 실명 강요의 문화에 맞서 들풀 님과 같은 '아름다운 익명'이 우리 주변에 좀더 많이, 좀더 오랫동안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린 왕자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대신 '나이가 몇이냐? 형제는 몇이냐?' 이런 식의 것들을 물어본다는 거죠. 그리고 '예쁜 집이 있어요.'라고 하면 알아들을 수 없고, 1만 프랑짜리 집이 있다, 이렇게 해야 '아, 좋은 집이구나'하고 생각을 한다는 그 유명한 어린왕자의 말이 있는데요. 이것은 사람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신상정보라는 것은 진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걸 표현한 그런게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실명제란, 오프라인에서의 페르소나가 진짜다라고 인정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들고요. 또 다른 내면의 자기자신 또는 온라인에서 보여준 자기 자신은 가짜다라고 낙인 찍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그 통합된 자아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그러면 결국 실명제라는 것은 결국 이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내면의 자아가 욕망을 추구하는 것, 이 자체를 막아버리는 그런 가면 금지법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뭐 어떤 여러가지 법적인 문제나 이런 것들도 있지만, 이것은 어떤 내면의 문제에서 사람이, 내 자신의 의지, 내 자아를 찾는 그런 행동 자체를 방해하는 거다, 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 펄, 인터넷 주인찾기 시즌1. 실명제 컨퍼런스, <온라인 실존/오프라인 실존> 중에서

* 추.
현재 제도로서의 '제한적 본인확인제'(이른바 인터넷 실명제)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점점 더 개선될 여지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시판 실명제 뿐만 아니라 선거법상 선거기간 실명제까지도 개정 논의가 한참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도로서 강요되는 실명의 억압을 통과하고 나면 자발적 실명의 문화가 익명의 문화를 억누르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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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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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tiropy 2012/02/24 23:43

    근데 실명 (혹은 오프라인의 정체성) 정책이 페이스북 서비스의 기본 컨셉이라면? 즉, 페이스북은 오프라인의 실제 개인을 염두해두고, 실제 개인들의 친구 관계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특정 업체의 비즈니스 모델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물론 만일 페이스북이 수집된 개인정보를 남용한다면 그건 별개의 문제가 되지만.) 페이스북의 비즈니스 모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익명성에 기반한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지요. 혹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병행할 수도 있구요. 인터넷 실명제와 같이 익명성을 제도적으로 제거하는 것과 특정한 업체가 비즈니스 모델로 채택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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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2/02/26 17:58

      죽은 블로그의 시대, 댓글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판국에 친애하는 오병 님 논평을 접하니 아주 기분이 좋네요! ㅎㅎ

      1. 말씀처럼 사기업의 정책을 정색하고 비판하는 게 좀 뻘쭘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선택권이 분명히 존재하니 말이죠. 이건 비평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투털거림, 불만...이런 어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2. 다만 어떤 서비스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아주 크고, 그것이 당대의 사회, 문화에 꽤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 서비스를 '비평'하는 일은 권장되어야 마땅하고, 또 그 '설왕설래'를 통해서 소위 미디어/웹서비스/SNS에 대한 사유들이 좀더 풍요로워지고, 또 말씀하신 '다른 대안 서비스'에 다한 관심이 환기될 수 있다면, 혹은 그런 '대안 서비스'의 탄생에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불평''투털거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
      제도로서의 실명제와 사기업 정책으로서의 실명화(정책)을 비판하는 기준은 달라야 한다고 지적하신 취지에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

  2. isanghee 2012/02/27 08:37

    덕분에 펄님의 강연까지 잘 봤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와이프는 페이스북 거의 안 합니다.
    결론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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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2/02/28 01:46

      들풀 님 덕분에 상희 씨께서 댓글까지 주시고. ^ ^
      저도 그런 이유로 페북을 별로 쓰고 싶지 않고, 지금까지는 그래왔는데, 블로거벗들과 프로젝트 회의용(비밀그룹)으로 요즘 한달 동안은 부쩍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밀그룹을 위한 포럼툴로는 그 편의성을 꽤 평가할만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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