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시대의 나침반

2012/06/07 22:43
오늘(12.6.7.) 했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과정 특강 발제. 가뭄에 콩나듯이긴 하지만 앞으론 강의할 기회가 있으면 자료를 공유할 생각이다.




SNS 시대의 나침반


#.트위터 재활용/퇴고 및 보충.

1. 소위 '머리끄덩이녀' 신원이 밝혀졌다. 기사를 훑어보니 "경기도당의 회계담당자"라는 점과 당차원에서 징계에 들어갈 것이라는 점, 그리고 경찰/검찰 협조관련해선 선을 긋고 있다 정도가 여기저기 비슷하게 보도되고 있다.  

2. 오마이가 그나마 '보도사진'의 윤리성 문제를 '초상권'과 '공익성'(알권리)의 충돌문제로 다루고 있다. 머리끄덩이 잡은 여성은 '초상권' 없나? (오마이, 12.06.02) : 당연히 '초상권'이야 있지. 그런데 제한될 뿐이다.

3. 홍성수 교수(@sungsooh)는 "얼굴을 본다고 해서 특별한 실익, 범죄 예방 효과 없다"면서 "알 권리가 우선한다고도 볼 수 없다"며, "잘못된 조직문화와 관성에서 나온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특정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다"말한다.

4. 홍 교수 지적은 의미있지만, 이번 사안에서 '머리끄덩이녀'는 공적 장소에서 공적 행위(폭행)을 벌이고 있다. 그 시공간의 공적 역사성이 중요하다. 이 사진은 중앙일보의 호들갑이 맘에 들진 않지만 '역사성'과 '상징성'이 분명히 있다.

5. 머리끄덩이녀의 초상권은 그 공적 역사성(공익성 혹은 알권리로 바꿔도 무방)에 비하면 개인이 감당해야(소위 "수인해야 할") 할 대가에 불과하다. 여기에 이 초상권의 침해 상황은 자초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6. 물론 '~녀'식 조어가 갖는 무책임한 마녀사냥의 폭력성과 저열함을 반대한다. 그건 정말 천박하다. 하지만 보도사진으로서 '통진당 폭력사건'의 '그 사진'은 이한열이나 광주 5.18처럼,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우리 시대를 상징한다.

7. 그 여성의 생김새나 그 여성의 직업이나 그 여성이 살아온 길이나 뭐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 표정이 중요하다. 이번 통진당 사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결정지을만한 '그 표정'. 안타깝고, 아쉽게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8. 이번 통진당 사태에서 "잘못된 조직문화와 관성에서 나온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sungsooh)"는 그 여성의 "표정"에 응축되어 있다. 그게 포토저널리즘의 힘(양가적. 해방/억압)이면서, 또 대중의 감각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9. 이런 (간접적이긴 하지만 직접 체험을 방불케하는 인상적이고 충격적인) 섬광기억(아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저 여성의 행패(와 저 여성의 인격권 문제. 행위와 책임의 합리적 비례 문제)와 상관없이 이 사진은 '통진당 당권파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역사에 남겠지 싶다.

0. 통진당 새로나기 특위가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지, 솔직히 별다른 기대는 없지만, 저 머리끄덩이녀 만큼의 '치열함'(?)이나 '독기'(!), 언론들이 반복적으로 쓰는 수사를 빌자면, "우악스러움"이 없으면 힘들지 싶다.

추.
보도사진이 갖는 의미 전반과 특히 포토저널리즘의 딜레마적 요소들에 대한 사유들을 들풀 님께서 정리해주시면 좋겠다. 블로그에 올리신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왕이면 슬로우뉴스에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2. 이성복의 시가 떠오른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 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 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 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 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중에서


연애가 매혹적인 건 물질(육체)를 거부할 수 없는 정신(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그런 거)의 비참함 때문이다. 더 많이 비참할수록 더 강하게 더 환하게 빛난다. 참 거지 같다. 우리는 거절할 수 없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고, 경외감을 느끼고, 하지만 강한 애착을, 집착을 느끼니까. 참 동물스러운 감정이다.

17. 나는 삼성이 마치 대한민국의 연애 같다. 그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육체 같다. 그건 마치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같다. 하지만 제발 이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그 연애를 그만 끝장낼 수 있다면 좋겠다. 아멘.


이벤트_포스터

http://slownews.kr/bori-event 

여기에 아이디어 한방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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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금 우리가 사고 있는 곳 - [사람 냄새], [먼지 없는 방]



예인의 샤이니, 나의 아델

2012/05/31 08:13

* 발아점: 샤이니의 셜록: 너희가 이래 버리면 우리는 어떡하니 (예인)

1. 연습생 (신화의) 경쟁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또 고전적인 '예술로서의 음악'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관극틀로 보면 비음악적이다. 하지만 너무도 훌륭하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하는 거디다. 그런데 연습 많이 하면 좋은 음악이 나오는 건 또 당연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이를테면 ‘저주 받은 천재’라는 19세기의 미신이 여전히 예술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선, 그것이 더불어 아주 강력한 산업으로 둘러 싸여 있더라도, 마치 불가침의 코드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커트 코베인이나 지미 헨드릭스가 연습생이었다면… 하고 상상하는 일은 어렵긴 하다.

2. 퍼포먼스. 나는 근 일년 동안 주로 ‘레이디 가가’를 열심히 들었다. 주로 이동하면서 아이폰으로 들었는데, 이게 무슨 노랠 듣는건지, 보는건지 헷갈리는 음악이다. 레이디 가가의 음악은 시각적 퍼포먼스에 최적화된 설계를 보여주고, 또 멜로디나 곡의 구성도 아주 미끈해서 그야말로 잘 빠진 한편의 뮤지컬 드라마를 시청하는 느낌이다. 내가 그토록 애착했던 ‘메탈리카’를 어색하게 만든 레이디 가가라니…. 그러다가 최근엔 ‘아델’을 듣는다. 이 젋디 젋은 여자아이는 그야말로 노래 그 하나만으로 온갖 감정을 흔들고,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감동을 준다. 사람의 청음구조가 참으로 간사하여, 아델을 들으니 ‘레이디 가가’가 뭔가 어색하더라. 아델의 감동을 밀어낼 또 누군가가 나타나겠지만….

3. 이런 쓰잘데기 없는 잡문을 왜 쓰냐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5월이 가기 전에 블로그라는 나무에 물주는 심정으로 쓴다. ㅡ.ㅡ;



* WLW에 언제 썼던 건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메모인데, 그래서 ‘어, 이런 메모를 했었어?’ 이러고 있다, 마치 던져 놓은 바지를 오랜만에 입었는데, 주머니 속에서 100원짜리(ㅡ.ㅡ;) 동전 발견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암튼 일단 발행.

사람 바보 만드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겠지만, 저널리즘에서 객관적인 듯, 손쉬운 방법은 ‘인터뷰’란 형식이 아닌가 싶다. 알면서도 당하는 게 인터뷰다. 그만큼 인터뷰라는 형식은 인터뷰이(대상)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인터뷰어다. 인터뷰어의 관점과 구성(편집)에 따라 인터뷰는 그야말로 새로 태어난다. 최근 통진당 사태와 관련해 아래 두 인터뷰는 ‘인터뷰어’ 부분에서 인상적이라 메모한다. 직접 읽어보면 대충 아는 내용 확인에 불과한 인터뷰이고, 새로운 사실의 발굴이나, 인식지평의 확대… 이런 거 없다. 내용으로 보면 무난하게 논란 당사자의 심경 고백이거나 변명이라는 느낌이 강한 인터뷰다. 굳이 첨언하자면 이석기 인터뷰는 이건 정말 개판이고, 이정희 인터뷰는 드라마적 관극틀로선 아주 훌륭하지만, 그 비장미 가득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정희 인터뷰 (한겨레신문 최성진, 사진: 이정애)
이석기 인터뷰 (한겨레신문 석진환, 사진: 김정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