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49재 회상

2009/07/21 07:35
아직 민주주의라는 유행어가 계속 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과거의 영광스런 빛에 숨어버린 한 노시인의 말처럼, 어느덧 "내 너의 이름을 잊은지 오래"인건지...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뉴스도 잘 보지 않고, 신문도 잘  읽지 않고, 블로그도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
그냥 재밌는 연애나 했으면 좋겠는데, 골룸의 말처럼 연애 하려면 돈과 외모와 성실함이 필요하다.
힘들겠구나...

지난 7월 10일 한 존경하는 벗과 노무현 대통령 49재가 있었던 덕수궁 정동길에 다녀왔었다.
다녀오고 나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쓸 말이 없었다,
그저 쓸쓸한 느낌들만이 가득 가득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거의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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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0일, 노무현 대통령 49재가 있었던 덕수궁 대한문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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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텅빈 정동길, 이 길이 가득 채워졌더라도 뭐 크게 달라졌겠냐만...
그래도 쓸쓸함은 덜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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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
2009년 5월 29일 시청 앞 도로의 풍경, 그 날  함께 했던 새드개그맨이 나에게 전송해준 사진.



고언(苦言)

2009/07/21 06:14
듣기에는 거슬리지만 도움이 되는 말.
방금 전에 스스로 '고언'이라고 밝힌 말을 들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듣기에 거슬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조언이 옳지 않아서도 안니다.
그건 뻔하게 옳은 말이다.
가령 착하게 살라거나, 신중하라거나, 겸손하라거나...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런 류의 말이다.  
도움이 될리 만무하다.
무의미한 말이다.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그런 류의 말, 너나 잘하세요, 따위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말.

그 고언이 애정과 고민에서 태어난 말이 아니라, 그저 감정적인 불쾌에서 생겨났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건 그냥 저절로 아는건데, 아무런 울림도, 감동도 주지 않는다. 나 역시 그저 불쾌가 생겨난다. 그냥 신경질을 고상하게 '고언'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든다.

말에는 말의 알맹이와 말의 껍질이 있다고들 한다, 흔히 말하는 기의/기표 따위, 알맹이가 중요한지, 껍질이 중요한지에 대해선, 말은 알맹이면서 동시에 껍질이다. 양자는 분리할 수 없는데, 그건 정신과 몸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언은 애정에서 태어나는 말이어야 한다. 불쾌에서 태어나선 그건 그냥 신경질이다. 고언의 껍질은 애정이다, 혹은 애정이라는 알맹이가 고언이다.

나는 서툴고 부족하다.
때문에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누구나...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언이지, 신경질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고, 조언은 너무도 고마운 것이지만, 신경질인지 뭔지 헷갈리는 '고언'까지 필요한 건 아니다.


.............


내버려두세요, 이렇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당신 눈에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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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강유원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좀더 정확히는 강유원을 비롯한 대중적인 지식인에 대한 소주 만담의 기억을 회상투로 남겼는데요. 한편으론 부끄럽고, 한편으론 그려려니하는 심정이 생겨나는 글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써머즈님을 끌어들였다는 생각은 듭니다. 나만 쪽팔리면 되는 건데 싶은 그런 심정이랄까요. 써머즈님의 넉넉한 이해를 구합니다.

역시나 가장 반가운 건 여형사님께서 써주신 글이네요. 제가 쓴 서툰 글이 애정이 담긴 제대로 된 글을 만들어내는 작은 자극으로나마 역할한다면 참 고마운 일이죠. 그게 블로그계에서 서툰 글이 갖는 효용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그래서 이 글 제목도 그렇게 지었고요. 그 밖에도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는데, 특히 열띤 대화를 나눠주신 운이엄마와 썰렁한당근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한량'이라는 표현에 대해

아주 가끔씩 댓글 남기시곤 하는 골룸님에 대해선 막연하게나마 호의를 갖고 있었는데요. 특히 이 글에 대한 댓글 이후로는 늘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솔직정색한 반응은 좀 놀랍네요. : ) 제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부족함에 대해선 너무 화만 내지 마시고, 골룸님께서 조언주실 것이 있다면 주시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길 염치 불구하고 바라봅니다.

굳이 항변하자면, '한량'이라는 표현은 써머즈님과 저와의 대화, 그 문맥 속에서 우리 바깥에 있는 대상을 모욕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혹은 조롱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 아닙니다. 냉소적이고, 체념적인 표현에 가깝죠. 좀더 의미를 부여하면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표현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저는 한량을 꿈꾸니까요. 제가 원래 그런 놈입니다.

글에 "거친 단상, 인상비평"이라고 썼는데, 그건 면피용이 아니라, 정말 거친 단상이고, 인상비평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저는 강유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진중권이나 신해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아는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들이 어느 정도는 '공인'이라면, 소주 한잔 하면서 충분히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블로그에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녀시대' 이야기만 하는 것도 지겹잖아요. 모두다 잘난 글, 멋진 글, 엄격한 글만 쓸 수는 없는거잖아요. 그렇다고 그 글(= 제처럼 서툰 글.추가)에 대한 공적인 비판까지 부당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 실천에 대해

가장 마음에 걸린 건 호찬님의 댓글이었는데요.
종종 사용하는 비유인데, 여성영화제에 가는 사람은 실은 여성영화제가 필요없는 사람들이죠. 여성영화제까지 '찾아서 갈 사람'이라면 문제의식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강유원과 친한 사람들은 강유원이 필요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강유원이 의미가 없다거나, 제가 강유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나라 지식인 시장 일반의 경향이랄까, 그런 관찰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난이나 비판의 취지가 아니라, 오히려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의 취지에 가까운 것입니다.

저는 강유원이라는 대중적인 지식인에게 꽤 큰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강유원에게 불만이 있어서 '한량'이라거나, 혹은 실천적이지 못하다는 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실은 체험치가 너무 부족해서 제가 '함부로' 이야기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렇다면 호찬님 같은 분께서 강유원의 가치를, 강유원의 실천을 저 같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 것도 그 '실천'의 가치를 좀더 현실 속에서 살려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분이 함께 스터디를 하면서 생겨난 이런 저런 체험들 속에서 아무래도 저와 같은 '구경꾼'보다는 강유원씨의 실천에 대한 고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이해하고 계실테니 말이죠.

직접적으로 질문해주신 '제가 생각하는 실천'에 대해선, 너무 큰 질문이고, 열려 있는 질문이라서 정확히 대답드리기가 매우 어렵네요. 실천은 실천이죠.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구요. 자신의 이상과 취지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들을 고민하고, 그 가능성에 도전하는거, 그게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할 수 있는 자가 행하는 것. 조금 귀찮더라도 조금 짜증스럽더라도 해야 하는 걸 하는 거, 그게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강유원씨에 대한 소주 만담 회고글에서 '실천'은 물론 이중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일반적인 용법상 실천은 관념적인 고민, 일테면 우리나라식 선비형 전통, 가령 독서나 고민, 사색, 글로 된 텍스트에 대한 토론, 강의, 강연 등의 반대말처럼 쓰인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도 물론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의미있는 실천이죠. 공부와 학습과 교육은 대단히 의미있는 실천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비적인 실천의 풍경들이 고정적인 의미유통 시장의 한 영역으로 고착되고, 정체되는 순간, 그러니 그 공부와 학습, 그 고민들에 담겨진 혁명적인 잠재력이 영원한 잠재력으로 화석화되는 것, 혹은 그렇게 화석화되는 메카니즘을 그저 바라보는 것, 그것은 실천이 아니라고도 생각합니다. 말이 좀 꼬이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 지식인의 계급성에 대해
언젠가 여형사님께서 써주신 글에 대해선 따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여형사님 글에 대해 글을 따로 쓰기엔 제가 강유원씨를 비롯한 여타의 사정에 대한 체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특히 지식인의 계급성에 대해선 좀더 고민해보고, 여형사님의 글에 답하고 싶습니다.  여형사님께 다시금 고마움을 전합니다.

 
* 관련글
한량 지식인
강유원의 '인문학을 만나다'를 듣고

* 관련 추천글
지식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공정한 평가_민노씨의 강유원 관련 포스트에 붙여 (여형사)




친근함과 무례함

2009/07/15 22:01
어제 친한 분께 실언을 했다. 오늘 하루종일 마음이 무겁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친근함과 무례함을 혼동하는 거다. 친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례해도 되는 건 전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친근하다는 이유로 그게 마치 무례해도 되는 자격이 생긴 것인양 착각한다. 나는 그게 싫다. 그런데 나 역시 물론 그런 실수를 한다. 어제처럼...

그럼에도 마음은 나에게만 관대해서 그 분께 약간은 야속한 마음도 생긴다. "나라면.." 이라고 생각해보는거다. 나라면 그 정도 농담으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텐데, 혹은 내 실언은 정말 나에게조차 한심스럽게 경솔한 것이더라도 그건 그저  악의 없는 '실수' 잖아?  이런 약간은 억울한  마음이랄까... 이런 정말 뻔뻔한 마음이랄까.... 그리고 아주 치사하게도 그 분이 나에게 했던 농담들을 회상해보기도 하고, 그 때 마음이 상했지만 나는 그냥 넘겼다구, 이런 유치한 비교도 해본다.

그 분 마음이 상한 것도 너무 안타깝고, 그 분이 나에게 실망했을 걸 생각하면 더 마음이 아프다. 어떤게 더 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란 놈의 이기적인 성향은 내 안에 있는 야속한 마음, 내 실수 때문인데도, 그 분과 조금은 멀어진 것 같다는 그런 아쉬움이 스스로에게 가장 마음이 상하는 건 아닌가 싶은....그런 생각도 든다. 잘 모르겠다. 철들려면 멀었다....




* 이 글에서 이어지는 글. 써머즈와 나눴던 진중권과 강유원에 대한 대화, 그 희미한 기억에 바탕해서 쓴다. 이 글은 그저 우리가 '대중적인 지식인'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거친 단상들, 인상비평에 불과하다. 그것은 써머즈도 넉넉하게 인정하리라. 

써머즈는 '한량'(閑良)이라는 표현을 쓰더라. 강유원은 한량이라는 거다. 진중권도 한량이고, 신해철도 한량인데, 강유원은 좀더 관조적이고, 피튀는 현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신선형 한량이고, 진중권은 좀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투사형 한량이며, 신해철은 진중권과 비슷하긴 한데 내공이 좀 부족한 날라리 한량이다. 반드시 써머즈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기억하기에 그런 취지라는 거다. (한량의 유래와 어원에 대해선 한국어 위키백과를 참조하시라.)

써머즈가 이야기한 '한량'이 전적으로 비판적인 취지를 담은 조롱투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비유적인 의미에서 '사회와의 거리' '생활과의 거리'를 지칭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시대 대중적인 지식인들의 그 밑바닥에 깔린 경제적인 조건, 그들의 계급성, 그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더불어 든다. 그들은 적당히 비판하면서, 적당히 먹고 살만하고, 적당하게 분노할 줄 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강유원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면, 나는 강유원이 대체적으로 좋다. 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고, 좀더 알수록 그럴 수도 있겠다. 써머즈의 비판적인, 혹은 시니컬한 평가를 참조하면 강유원은 적당히 사회 비판하고, 적당히 자신이 배운 걸로 먹고 사는 그냥 '한량 지식인'이다. 거기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는 생각, 나 역시 없다.

그들은 무의미한가? 이렇게 질문하면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량 지식인은 여전히 필요하다. 진정성과 실천적인 덕목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한량' 같은 사람들이다. 그냥 떠들고, 발언하는 거다. 그게 그들의 진정성이고, 실천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우리들 블로거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발언의 진정성, 그 발언이 나오는 철학과 세계관, 그리고 스타일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한량 지식인도 그렇고, 블로거들도 그렇고, 무슨 대단한 눈 돌아가는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게 그네들의 역할이고, 우리들의 역할이다. 다만 소위 '대중적인 지식인'들은 조금 더 자신의 계급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현실과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대중적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권위와 힘에 부여받은 의무이기도 하다. 그건 가진 힘이 아주 작더라도, 블로거들 역시 마찬가지다.


* 관련
시크(chic)하다 : 써머즈와의 대화
강유원의 '인문학을 만나다'를 듣고 : 인간에게 달라붙은 껍질

* 이 글은 여형사  때문에 쓰여진 글이다.
그런 가벼운 관심이 블로깅의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여형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관련 추천
지식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공정한 평가_민노씨의 강유원 관련 포스트에 붙여 (여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