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막걸리 같이 구수한 강의를 오랜만에 듣는다. 비교적 최근 천안 강연 (MP3 파일). 이런 강연은 운동하면서, 출퇴근 시간에 모바일을 통해 들으면 딱이겠다 싶다. 나는 좁디 좁은 자취방에서 뻘운동(어제 밤에 맥주에 치킨에 탕수육에 너무 많이 먹어서), 종종 트위터도 하면서 들었다. 특히나 전혀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일상 대화식 강의는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오늘 주말에 중학교 선생님들을 상대로 정보문화재량수업 연수와 관련한 강의를 해야 하는데(그렇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보문화교육강사라니 참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자신이 쓴 교재에 대해 그걸 그대로 읊는 건 정말 의미없는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교재를 보면 되지. 이하 강의의 잔상을 가벼운 단상으로 기록해본다.

1. 인간에게 달라 붙은 것들.
대개 그건 출신지역, 출신학교, 사는 곳, 직업, 경제력 따위다. 인간은 그걸 '관계의 근거'로 삼는다. 관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그건 자신의 근거이면서, 관계의 근거가 된다.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혹은 어떤 우연적 조건들을 통해 결정된 것들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을 규정한다. 출신지역과 출신학교가 대표적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싼 우연적이고, 폐쇄적인 조건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본질적인 조건을 질문한다. 즉 사람의 껍질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묻는다. 당신은 왜 슬퍼하는가. 당신은 왜 살아가는가. 당신이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행복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관계 맺고 있는가... 물론 좀더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최소한 피상적인 허영의 장식물로 들러붙은 인간의 껍데기, 거기에 대한 과시적인 집착은 역겹고, 안쓰럽다. 나에게 누군가 인문학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최소한 역겨운 사람은 되지말자는 고민과 성찰의 소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득, [강원도의 힘]에서 "인간이 되긴 힘들겠지만, 최소한 짐승이 되진 말자"고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ㅎㅎ.

2.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강의 말미 한 청강자의 질문. 주부였는데, 아이가 어디가냐고 묻자, 인문학강의 들으러 간다고 답했단다. 아이가 물론 이렇게 다시 반문. "인문학이 뭐야?" 질문한 그 주부는 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강유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기억에 의존해서 옮기는 거라서 정확하진 않다. 요즘은 기억력이 거의 영화 '메멘토' 주인공 수준. ㅡ.ㅡ; ) "나는 누구인가(철학), 내가 살아온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어 왔나(역사), 그 역사를 사는 나는 나를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 그렇게 인문학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좀더 인간답게 살수 있게 하기 위해, 그 인간을 질문하고,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질문하며, 궁극적으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학문이다.

3. 강유원의 초강추 도서 (링크는 알라딘. 앞으로 'TTB2'에 참여해볼까 싶다능)
서중석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25% 할인중. 사진 때문인지 약간 비싸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현재 시각 중고최저가 5천원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라고 강유원은 강조한다. 그 중에서도 서중석과 리오 휴버만의 위 책에 대해선 극찬을 하더라. 특히 서중석 책에 대해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다 읽히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서평가로서의 강유원을 신뢰하기에 그렇게 극찬하는 책이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본다. 위 책들은 물론 강유원이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꽤나 많이 알려진 책이고,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히는 것 같다. 서중석의 책은 2005년 출간되었고, 리오 휴버먼의 책은 2000년에 출간됐다.

4. 우리나라에 무슨 좌파가 있나? (ㅎㅎ)
강의중에 강유원이 농담(유골) 삼아 이야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옮겨보면 이렇다.
"...좌빨이니 뭐니 이런 얘기좀 하지 맙시다. 한국에 이런거 없어요. 한국에는 대운하 반대파와 대운하 찬성파 밖에 없어요, 대한뉴스를 즐겨보는 사람과 그걸 역겨워하는 사람... 좌파니 뭐니 그런거 없어요."(강유원)

5. 경쟁과 교육
'개천에서 용났네' 신화는 원래부터 신화였지만, 이제는 점점 더 불가능한 신화다. 경쟁은 경쟁 조건이 엇비슷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 조건이 같지 않은 상태에서의 경쟁은 가식적인 지배와 통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6500만원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신임 검찰청장의) 20대 딸과 지금 당장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대학생의 경쟁이 가능하겠는가. 이건 이미 경쟁이 아니다. 이 점을 강유원도 강하게 지적한다. 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다.

6. 책을 고르는 방법 / 책을 읽는 방법
좀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강조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1) 우선 평판 좋은 '얇은 책'으로 시작하자. 그 책을 기본서 삼아 여러번 읽자.
2) 그리고 스스로 '노트정리'하자(물론 블로거라면 포스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테다).
3) 머리말/목차의 중요성. 목차를 훑어 본 뒤에 ㄱ. 왜 썼나 ㄴ.주요 주제는 뭔가 ㄷ.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이 세가지 중 하나라도 없거나 부실하면 읽어봤자 시간낭비. 그 뒤에 목차를 다시 훑어 전략적으로 읽어라. 처음부터 읽을 필요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을 필요도 없다. 필요한 만큼!만 읽자.

7. 사소한 아쉬움 : 친근함과 무례함 사이
강유원의 강의 스타일은 때론 무례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하는데, 물론 이건 단점이라기 보다는 장점의 요소가 훨씬 더 많다. 다만 좀더 부드러울 수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시장 상인 같은 친근한 말투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겨운 화법은 물론 정서적인 친화력을 위한 의도적인 수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조금은 거슬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일테면 강의 초반에 "몇살이에요? 재산 얼마나 가지고 있어요?" 등의 질문. 물론 신임 검찰총장의 딸내미 6500만원 현금자산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것이긴 한데... 


* 강유원 사이트 : http://allestelle.net/
* 강유원 천안 강연 페이지 : http://allestelle.net/resources/2009/06/06/1344
* MP3 다운로드 주소 : http://allestelle.net/wp-content/uploads/2009/06/20090630_CheonAn.zip

강유원 사이트 개별 페이지 하단에 '트윗 디스' 단추가 있다. 트위터에 링크 인용을 쉽게 해주는 단추 같다.
역시나 웹과 친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 )


* 관련 추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여형사의 담백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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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중석

    Tracked from 여형사의 독서생활 2009/07/14 14:13 del.

    (웅진 지식하우스, 2005)1.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93년 처음 읽은 '다시쓰는한국현대사'를 빼놓을 수 없겠다. 12년간 제도권 역사교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해방 이후의 상황과 4.19혁명, 5.16쿠데타 그리고 광주민중항쟁까지 소상하게 소개된 이 책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조금이나마 좌/우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게 된 계기가 이 책이었던 것 같다. 다만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의 정당성에...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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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퍼렁어 2009/07/09 10:49

    아 책이 몹시 탐나네요 허나 아직 산책도 덜보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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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09 18:31

      중고로 한번 알아보시죠? : )
      암튼 시퍼님덕분에 무플면하네요. ㅎ

  2. 용추 2009/07/10 03:14

    소개해 주신 책들 글 보고 바로 주문했습니다. 믿을만한 분들이 겹으로 추천해 주셨으니 안 읽을 재간이 없네요.

    항상 건필하시구요. 윗글 내용에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지던 동네 양아치, 이제 그저 비웃고 지나갈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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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10 11:06

      용추님 정말 반갑습니다. : )
      제 글이 좋은 책을 선택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자극?)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네요. 종종 대화나눌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느무느무 반갑네요. ㅎㅎ

  3. 여형사 2009/07/10 10:26

    저도 이제 한시간 정도 듣고 있는데 참 재미있고 유익하네요. 강유원의 철학사 강의도 다운 받아서 듣고 있는데 그것도 훌륭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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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10 11:08

      저 개인적으론 이제 책하면 여형사님이 더불어 떠오릅니다. ㅎㅎ
      어제는 써머즈님과 강유원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만, 저로선 꽤나 의미있는 대중적 지식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4. 여형사 2009/07/10 11:26

    오.. 어떤 비판적인 내용이었는지 무지 궁금해지네요. ^^ 사실 강유원의 책도 몇 권 보고, 강의도 듣고 하니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좀 들긴 하는데요. 그래도 요즘의 저에겐 스승같이 느껴지고 있어서 관련된 이야기가 좀 듣고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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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10 13:49

      여형사님을 위해(?) 따로 특별히 포스팅해야겠근영! ㅎㅎ
      물론 게으름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요.

      진중권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습니다. ^ ^;
      저는 비교적 강유원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편이었다면 써머즈님께선 좀더 시니컬(?) 혹은 비판적이었달까...

  5. 띠보 2009/07/10 11:42

    강유원 책은 <몸으로 하는 공부> 한 권 읽고 번역서인 <달인>은 집에만 있는데. 무지 괜찮죠. 한 출판사 사장님에 따르면 깡패 기질도 있다고 ㅎㅎ 덩치도 매우크시죠. 직접 만나본적이 없어서 늘 아쉬운데 mp3 라도 들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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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10 13:50

      말투도 좋게보면 대중친화적인데, 좀 정색하고 나쁘게 보면.. 동네 주정꾼 아저씨 같다는 느낌도 살짝...;;;;

  6. 레이먼 2009/07/10 17:36

    딴 말 않겠습니다.
    TTB2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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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15 19:50

      지금 시험삼아 해보고 있습니다. : )
      편의성의 부분에서도 그렇고, 구현되는 선택지가 그다지 다채롭지는 않아서 좀 아쉬움도 있지만, 전반적으론 꽤나 참여자들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유익한 수익모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7. 물어 2009/07/10 21:43

    인문학적 교양을 어떻게 기를까 고민했었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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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15 19:50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보람이네요.
      격려 말씀 고맙습니다. : )

  8. 골룸 2009/07/16 16:57

    무례함이기보다는 강의의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서적 친화력 의 측면도 있겠으나 강의장과 청중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가끔 쓰시는 것 같고 효과도 있더군요. ^^ 저도 현대사책 주문했네요.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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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21 09:58

      답글을 이제야 확인하네요. : )
      최근에 주신 비판적인 논평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종종 허심탄회한 논평 기대하겠습니다.

  9. 나비 2010/08/12 15:48

    블로그 깔끔하게 보기 좋아요. 읽는 이를 잘 고려해서 쓰신 글 같네요.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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