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캡콜드(capcold)님의 책, 대중문화에 대한 2008년 결산 중 '책' 부분에서 바통 받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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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책과 나


2008년에 무슨 책을 읽었더라...
떠올려보니 뻔하다.
구입해서 읽은 책은 몇 권도 안된다.

책 편집증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겠지만, 책을 굉장히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발터 벤야민이나 장정일 같은 이들을 부러워했던 시절. 그네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은 그런 시절. 우아하고, 신비로운, 혹은 괴팍한 책 편집증 환자(?)들에게 가족같은 동질감을 느끼던 시절...

그 시절 가장 닮고 싶었던 '독서가'는 김현이었다.
그는 삶이 그 자체로 '독서'였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일종의 책에 관한 보물섬과 같은 책이었는데, 그 책 속에서 김현이 '행복하게' 읽었던 책들은 거의 모두 사서 읽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다.
그런 시절은 갔다.

20대 중반 이후로 일년에 열권 이상의 책을 사서 읽은 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다른 목적의 공부를 위한 책은 제외하고... 그저 읽고 싶어서 읽는 그런 책 말이다.

강유원은 [책과 세계]에서 현대인이 갖는 '책에 대한 강박'을 이야기한다. 세계와 나 사이의 일체성이 사라진다. 세상에 밀착했던 나는 이제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을 대상화시킨다. 그리고 세상을 재현한 '텍스트'가 출현한다. 책이 대표적이다. 그건 불행의 징조다. 그 텍스트는 세상을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그런데 그 책은 세상에 대해 더 커다란 오해들을 부추긴다. 악순환이 벌어진다.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그저 호기심이나거 지적인 속물근성의 관성이거나, 혹은 그저 심심해서일테다.
나는 아직도 가장 낮은 수준의 독서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왜 책을 읽나...
잘난척하고 싶어서, 자극을 받고 싶어서, 에너지 만땅으로 채워서 폼나는 글을 쓰고 싶으니까...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책은 마치 연애와 비슷해서 그저 불가피하게 끌리는 그런 마력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느 순간 사랑에 빠지는 그런 것... 물론 언제나처럼 실증을 내기도 하지만.

그런 책은 별로 많지 않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을 좀더 풍부하게 느끼기 위해, 대상을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인데, 그건 달리 말하면 '당신과 좀더 좋은 관계'를 맺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는 쉽게 지워지기도 한다. 책을 통해서 당신을 지배하고 싶거나, 유치하게 말하면 뻐시고 싶어서 책을 읽기도 하는거다.

내 저열한 지적 속물근성을 떠올리면, 일요 화가풍의 지적 허위의식은 마치 내 그림자 처럼 나를 쫓아다닌다. 나는 그게 싫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절대적인 표피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가방 끈 긴 소위 지식인들의 가든 파티에서 악세사리를 대신해서 반짝거리는 그런 거. 그게 싫다. 내가 그런 유치한 지적 속물근성의 관성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그럴테다.

역시나 서설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하 내가 2008년에 읽은 책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순위 같은 건 없고, 그냥 떠오르는대로 쓴다.


1.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이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책(이 책을 이렇게 유치하게 소개하는 것도 참 재밌긴 하다)을 처음 읽은 건 2007년이다.
처음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었을 때는 이건 그냥 그럴 듯한, 그런데 실은 너무도 허무한 철학적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비전에서 [나와 너]가 갖는 매혹들은 거세시킨 몽상가 아저씨의 넋두리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처음 일독의 느낌은 별 울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구절을 블로그(그게 미투데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intherye 블로그였던 것 같기도 하다)에서 읽고,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구절이 너무 매혹적이었던 거다. 그 매혹적인 구절들을 어찌하여 나는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다시 읽었다.
한번 읽고 지워버릴 책은 아예 처음부터 읽지 않는 편이 좋다.
예전에는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독서의 전리품으로, 마치 전투하는 것처럼 책을 읽었지만, 그런 독서는 정말 부질없다. 정말 정말 부질없다.

이 책은 올해 두 번 다시 읽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다시 읽을 것 같다.

아무튼 그 매혹적인 구절로 다시 돌아가서, 그 구절을 인용해본다.
좀 길지만 그 구절은 이렇다.

당신은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이 있다. 하늘은 빛나는 별들로 넘치고 서늘한 공기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있다. 즉 관찰자이고 경험자이고 사고자이며 활동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당신, 중심이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당신이 있다. 당신은 당신과 별들 사이의 거리(공간), 당신과 아내, 남편 또는 친구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지 없이 무엇인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이 모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은 그것에 관해 말하고 그것에 관해 쓰지만, 드물게 완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를 제외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안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 주위에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이 있는 한, 거기엔 사랑도 아름다움도 없다. 아무 중심도 아무 주위도 없을 때 사랑이 있고,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이 아름다움이다.

상대편의 얼굴을 볼 때 당신은 중심에서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중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내어 우리의 삶이 이다지도 공허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경작할 수 없고 진리를 만들어낼 수도 없지만, 만일 항상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안다면, 당신은 앎을 경작할 수 있으며 그 앎으로 인해 쾌락, 욕망, 슬픔, 완전한 고독, 인간의 권태의 본질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거리(공간)'라고 불리는 것과 만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당신이 세계를 개혁하려 하거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오려고 해도 또한 아무리 당신이 개선에 관해 말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심한 괴로움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도자도 없고 선생도 없으며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이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에 홀로 서 있다.

- 크리슈나무르티, '있는 그래도 바라보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중에서, pp148~150.

정현종은 시 속에서 사랑이나 행복이란 건 '이미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령 [나는 별 아저씨] 속의 산문시 연작인 '노트 1975' 중 3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인데, 이렇다.

행복은 행복의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시작한다.
행복은 불행이 낳은 천사이며 이미지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즉 행복이라는 이미지는 '우리' 속에서 탄생한다.
고통 속에 있는 우리들의 불가피한 사랑 속에 내재하는 행복의 이미지.

- 정현종, 절망 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는 말고 : 노트 1975 중 3, [나는 별 아저씨] 중에서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의 책들은 서로 닮아 있다.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추출해서 그것들을 동일한 평면에서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고, 흔히 천박한 일이 되기 쉽다. 그렇지만 '이미지'와 '관계' 그리고 '공간'을 사고하는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는 왜 어떻게 다르고, 그 사유의 풍경들은 어디에서 갈라지는지를 나는 종종 떠올리곤 했다.

아주 무식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부버는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그 사랑에는 배타성이 생긴다.

정현종은 부버와 유사하게 행복은 이미지이며, 그것은 우리 속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필연적인) 고통 속에서 (생겨난 어떤 공감들로) (서로)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크리슈나무르티는 좀 다르다.
그리슈나무르티는, 마치 강유원이 텍스트가 온전한 일체로서의 나와 대상 사이의 일치를 허물어 뜨리는 불행의 징후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부조화, 세계의 대상성을 지워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건 책을 지우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전언은 부버가 '나-너'와 '나-그것'으로 나눈, 그러니 '근원어'로 세상을 분리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역시나 정리가 안되는데...;;;

아무튼 정현종과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마르틴 부버가 이야기하는 바는 궁극적으론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나는 그게 '허무'라고 생각한다.
세계와 인간의 분리로부터 탄생한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그들은 이야기한다.
물론 그 결론 역시 허무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렇다.

세상은 너무 엿같다.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 그래서 인간을 지우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그들은 천착한다.

........


독서라는 건 어떤 활자들이 암시하고 있는 상징의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불과할테지만, 어떤 순간들엔, 그 책이 말하는, 노래하는, 절규하는 목소리가 내 몸 속에 스며들어 불덩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이 책은 그런 기적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그건 정현종이 이야기한 것처럼 "책을 숨쉬는" 체험이다.


추.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이 책 보다는 [나와 너]를 더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 바통글도 다섯 번으로 나눠 써야할 것 같다...ㅡㅡ;;;
* 알라딘 5950원 (딴데서 더 싸게 파는지는 몰겠다. 암튼 여기선 30% 할인하고 있더라)
* 가즈랑님께서 이 글에 바통을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얼핏...ㅎㅎ


* 발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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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Love Blog :: 미투데이 인수가 얻게된 거대한 사회적인 그래프


안쓰면 허전할 것 같아서...
잡스런 단상들.


1. 미투 네이버에서 인수

요 열흘 동안 세상소식과 인연을 끊다시피해서 며칠 전에야 술자리에서 알았다. 그 자리에서 잠깐 나온 이야기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만박님이 인간관계가 좋아서 별 나쁜 소리는 없다' 뭐 이런 이야기. ㅎㅎ.

암튼, 이제야 호기심이 땡겨서 이런 저런 포스트들을 읽어보는데, BK님 포스트가 그 중 인상적이다.


그동안 나는 미투를 어떻게 써왔나 생각해봤다. 내 미투는 지극히 일방적인 파편화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래서 (네이버측의 보도자료인가에서) '로얄티'라고 표현된 정서적 유대가 그다지 깊지 못하다.
그래도 이렇게 감정이 이리저리 뒤숭숭한데, 열혈 미친들은(뭐 대개는 불안해하는 가운데 '만박님 홧팅' '미투 홧팅'을 외치는 분위기인 것 같지만)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소셜북마크 용도를 겸해서, 혹은 내 블로그 글 홍보용으로 미투를 써왔다. 처음에는 그 때 그 때의 단상들도 적고, 정말 말 그대로 미시적이고, 순발력 있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때도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이런 '진지' 모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민노씨.네'라는 블로그가 주고, 미투데이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2. 싸이월드化 : 멋대로의 불길한 예감

네이버가 입김을 불어넣는 앞으로의 미투데이는 그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자뻑 스타일이 판치는 싸이월드풍의 '연애질'을 위한 서비스가 될 것 같단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서… 뭐랄까 그런 기미가 오면 미련없이 정리 수순을 밟을 것 같다. 물론 그게 전적으로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덧. 이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문화라면 별 불만 없는데, 서비스가 인위적으로 이런 걸 의도한다면... 좀 짜증이 날 것 같다는 의미다) 막연한 연애에 대한 기대심리에 바탕해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허영끼를 키우는 유사 미팅 사이트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

BK의 분석은 관련 리서치의 도움을 받은 꽤 성실하고 인상적인 분석이긴 하지만 뭐랄까 좀 지나치게 학술적(?)인 느낌이다. 좀 붕 뜬 느낌이랄까? BK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공론의 풍경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부피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풍경으로, 어떤 색과 향기인지는 더욱 중요하다. 뭐… 게으른 유저로서 그다지 큰 감흥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양가적인 감정…이 생긴다.

3. 블로그

좀더 이기적으로 끄적거려보면, 미투데이가 가장 불길한 시나리오대로 아이들(10대, 20대)의 자뻑 연애질 사이트로 싸이월드화 되면 그거야 뭐 나랑 큰 상관이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지루한 블로그'들, 혹은 좀 스스로 너그럽게 표현해서 '진지한 블로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지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든다. 물론 근거 희박한 기우이긴 하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미투데이의 캐치프레이즈는 '바쁜 블로거들을 위해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많은 블로거들이 느끼고 있는 것처럼 미투데이라는 '마이크로 블로그'는 블로그와 보완, 혹은 상생관계에 있다기 보다는 경쟁관계에 있다. 적어도 내 체험으로는 그렇다. 미투데이는 진지한 대화를 위한 '커뮤니케이션'과는 극단적으로 친하지 않고, 그걸 위해서 만들어진 툴도 아니다. 하지만 정서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가 보면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전적으로' 미투데이에 '시간을 빼앗겨야 한다'. 그럼 '바쁜 블로거를 위해 태어났다'는 건 뭐가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거다.

물론 유저에 따라서는 미투데이와 블로그를 효율적으로 양립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 있으리라.
혹은 블로그로 진입하기 위한 '초급 단계'로 특히 10대 아해들이나 3, 40대 전업주부들은 미투데이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는 일본처럼 모바일을 이용한 마이크로 블로그가 중흥기를 맞이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이런 저런 긍정적인 순기능(?)들을 떠올려봄에 불구하고, 여전히 씁쓸한 느낌과 예감이 좀더 강한 건 어쩔 수 없다.

뭐, '인수기업'이 하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네이버라서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다음이나 SK, 혹은 다른 이통사에서 인수했다고 해도 뭐 별 좋은 느낌이기야 했겠냐만....
많은 블로거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벤처가 그 스스로 자생하기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시피한 한국적 상황, 공룡 제국주의는 쓸쓸한 여운으로 남는다.



추.
네이버 보도 자료 속의 아주 짧은 인터뷰 인용은, 물론 피인수 기업의 수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외교적 발언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지만… 네이버가 대한민국 대표 검색기업인듯 언급하는 대목에서… 뭐랄까, 네이버가 무슨 검색을 하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네이버는 검색기업이 아니다. 네이버는 그냥 미디어고, 마켓이다.





* 본문 링크
http://offree.net/entry/Goodbye-Me2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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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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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랑에 관한 '정의'


불가능할 뿐더러 별 울림도 없는 것 같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네루다가 우편 배달부 청년에게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건 '메타포'로만 말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사전적으로, 어떤 추상명사들로 '정의'하는 일은 따분한 일이라고 느낀다. 물론 존 레논의 '착한' 정의가 있기는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지, 뭐.

한편으로 '사랑'은 낭만적인 각본이 득세하는 시대의 가장 지루하지만, 강력한 마약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여기에서 사랑은 '연애감정'에 대한 이음동의어다.  
그리고 앞으로 쓸 이야기들도 연애감정이라는 한계(?) 속에서 떠올려지는 사랑의 이미지들이다.


1-2. 어떤 장면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랑에 대한 인상적인 지적 혹은 묘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음란서생]에서 한석규가 왕에게 고문당하면서 김민정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랄지... "사랑이라고 말하면 사랑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2046]에서 장쯔이가 양조위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이랄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이건 꽤나 좋아하는 구절인데.. 그런데 지금 책이 내 자취방에 없기 때문에 정확한 문구인진 모르겠다, 대충 맞을거다)

필연보다 매혹적인 것은 우연이다.
우리들의 사랑이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기 위해선 우리들의 사랑 위에 우연이 내려 앉아야 한다.
마치 성자 프란츠 폰 아시시의 어깨 위에 내려 앉은 저 비둘기처럼.

(라던가)

사랑은 메타포와 함께 시작한다.
사랑은 이를테면 어떤 여자가 그녀의 첫마디를 우리들의 시적 기억 속에 아로새기는 순간 싹튼다.

(라는 문장은 정말 그럴 듯 하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사랑'에 대한 단상은 이런 것이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이것도 기억에 의존해 옮기는 거라서 정확한 문구는 아니다)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
사랑에는 감정에는 없는 것, 한결같음이 있다.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배타성이 생긴다(이 배타성은 집착이나 소유욕에서 파생하는 그런 배타성이 아니다).

그 밖에도 정현종과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들에 등장하는 '사랑'의 이미지들, 혹은 사랑에 대한 묘사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 신경림의 시, 신경림의 시를 즐겨 읽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사랑노래'는 역시나 참 좋다.

특히 이성복의 '편지2'나 '이제는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는 뭔가 울리는게 있다.
(편지2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제목인지 좀 헷갈린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역시나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거라(시집이 어디에 있겠지만 찾아보기도 검색하기도 귀찮고) 정확하지는 않다.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는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 편지 2 중에서

[....]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 안고 휘이 돌고싶음에 관하여 [....]


1-3. "여러분 사랑해요"


언젠가 장정일인가 누군가가 시 속에서 이런 상황, 나도 나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바로 그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싸늘한 역겨움을 표현한 적 있던 것 같다.

나는 그 시 속에서 이야기되는 '사랑'이란 건 전적으로 연애감정이고,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혹은 그건 광기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광기를 가장 사랑스럽게 표현하는 건 물론 연예인들이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해요'라고 떠벌린다.
물론 그들은 연애감정으로 '사랑해요'를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나 좀 좋아해주세요'라는 의미, 혹은 '고마워요'라는 의미로 '사랑해요'라고 하는것일테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구태여 아껴야 한다는 고전적인, 혹은 유교적인 사고의 관성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쁜 말도 아닌데, 욕도 아닌데 뭐.. 이런 정도의 감수성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연예인들의 '사랑해요'는 역겨운 느낌이다.
예전에는 정말 많이 역겨웠는데, 지금은 그 관성만큼만 역겹다.
솔직히 별 감흥이 없다는 편이 맞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이 글은 아무래도 30개의 포스트 연작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질문이 30개이기 때문이다. ㅡ.ㅡ;


* 덧. 바통 받으실 분
댓글 주신 무지무장 고마운 동료 블로거들에게 바통 넘깁니당..ㅎㅎ (미루님 말씀도 있고...; )
물론 안받으셔도 되지만용...;;;


* 관련글
사랑에 관한 문답 2. 사랑해봤어?


* 발아점
http://www.nirvanana.com/395 (아홉그루)
http://www.nirvanana.com/401 (너바나나)



 리베(LieBe)님에게 받았습니다. : )


2008년 : 우유부단(優柔不斷), 적반하장(賊反荷杖), 표리부동(表裏不同)


안 : 스스로 어땠나 보면, 즐겨 쓰는 설상가상도 어울리긴 하지만, 우유부단했던 것 같습니다..;;;

밖 : 밖은 어땠나 보면... 적반하장이 판치는 세상인 것 같아요.
구쾌의원들이 촛불 유모차 여성을 협박하고, 윽박지르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사이 : 블로그계는 대체로... 표리부동한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점점 더 허명이 판치고, 정치질과 외교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ㅎㅎ).
여기에는 비판의 의미도 있고, 반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2009년 : 토진간담(吐盡肝膽)


직역하면 '간과 쓸개를 모두 내뱉다'
솔직하게 속임없이 모두 말하는 것. 이라고 하네요.

제가 사자성어와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관련 페이지를 훑어봤는데, 이런 사자성어가 있더만요.
블로거로서 솔직하게 모두 말할 수 있는 2009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 ^



* 추.
블루 크리스마스 우울증 여파 및 송년회 등등으로 한동안 블로깅 휴업상태였는데요.  
여기
저기서
바통을 전해주셨고만요.  ^ ^;;

2009년에도 바통놀이는 호황(?)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사자성어로 '바통놀이'를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당.


* 발아점
http://liebe.tistory.com/310 (LieBe)


Forget the Radio :: 069. Daum과 Naver 간의 이직 구설수 (08.12.15)
 

위 새드개그맨 팟캐스트에 대한 단상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블로그 리뷰다.


0.  '사실'은 사실 자명하지 않다.

새드개그맨은 무엇보다 아이러니의 독자다.
그는 그저 뻔히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사실, 피부에 감촉되는 그 자극적인 외피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진실이 평면이 아닌 입체임을 안다.  그는 진실이 여러 겹의 외투를 입고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는 진실을 여는 열쇠인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일견 투명한 사실처럼 보이는 그 진실의 재료들에도 전략적 관점과 철학이 '이미'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베일과 외투를 모두 걷어내고, 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 외투를 걷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드디어 그 사실이라는 돌맹이를 끄집어 든다. 그는 그런 작업을 통해 사실을 '발견'하고, '재구성'한다. 그 과정은 사실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발견한 사실을 자신의 관점과 철학으로 가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탁월한  '리얼리즘의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1. 과정으로서의 진실

진실은 그저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평면이 아니라, 안팎 구별이 어려운 혼탁한 베일에 가려진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 그걸 새드개그맨은 안다. 어떤 철인의 좌우명처럼, "모든 것을 회의하라"는 그 단순한 교훈을 새드개그맨은 진심을 다해 따른다. 그건 일견 진실에 접근하는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우회로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건 진실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는 '나는 드디어 진실을 발견했노라'고 (경솔하게) 선언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 진실로 향하는 '그 과정 자체'에 진실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2. 블로그는 저널리즘의 병맛을 닮아가고 있다.

그럴 듯한 이론과 있어 보이는 듯한 말투로 글을 꾸미고, 거기에 이 시대의 도덕과 양심과 진실이 있는 양 '단언'한다. 내가 여기서 예외라는 거 아니다. 나도 그렇지 뭐. 그리고 양념처럼 피상적인 휴머니즘을 더한다. 이런 글들 어디서 읽어본 적 없나? 이건 조선일보의 가장 악질적인 칼럼들, 사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슈 셋팅이다.

블로그계는 점점 더 자극적인 진실의 경연장, 선동의 경연장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저 부족하더라도 고민이 담긴, 자기 삶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 담긴 글들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한다. 진실을 향해 가는 '그 과정으로서의 진실'은 사라져 가고, 세상의 모든 진실을 관장하는 재판관이라도 되는 양 쉽게 진실을 선언하고, 단정하는 글들은 늘어만 간다. 그건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사족으로 좀더 이야기하면, 블로그가 갖는 미디어로서의 잠재력과 혁명성은 저널리즘과 함께 취재 경쟁 벌이는 그런 게 아니다. 다음 블로거뉴스에서 강조하는 현장취재에 기꺼이 동원되고, 각종의 저널들에서 이미 써놓은 이슈들의 설계도에 따라 그 이슈를 확산하는 그런 따분한 게 아니다. 블로그의 미디어적 잠재력과 혁명성은 블로깅이라는 '과정'에 내재된 어떤 것이다.

그러니 그저 블로거의 실존과 개성과 관점과 철학을 블로깅이라는 총체적인 대화 시스템에 투사하고, 그 대화시스템이 작동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재미와 의미를 '발견'해가는 것. 그 발견을 통해서 삶과 세상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아주 조금씩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아니라, 그저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바탕을 쌓아가는 것. 그게 블로그 미디어의 혁명성이다.

그런 차원에서 블로그라는 대화시스템이 의미 유통의 메카니즘을 통해 효율적으로 분산되고, 또 확산되면 그 때야 비로소 블로기즘이 갖는 잠재력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다시 논의될 수 테다. 그 밖의 모든 시도들, 가령 일부의 철없는 '빠워블로거'들의 노출증이나 착각, 혹은 왕서방과 곰돌이들의 유치한 놀이들은 이미 있어왔던 산업적 요구들에 종속된, 블로그의 잠재력과는 별 관계 없는 지극히 지엽적인 '해프닝'에 불과하다. (역시나 사족이 좀 길었다....;;; )


3. 새드개그맨의 팟캐스트가 갖는 의미  

이런 블로그계의 우려할만한 현실에서 새드개그맨의 예민하고, 신중하며, 입체적인 접근방식은 단연 블로그가 추구해야 하는 한 전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최근 그가 제작한 팟캐스트, 'Daum과 Naver 간의 이직 구설수 (08.12.15)'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투박한 제목의 팟캐스트는 (적어도 나에게) 그가 추구하는 궁극의 팟캐스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저널리즘의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선동적인 메시지에 대한 입체적인 해체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저널리즘의 일견 불편부당한 것처럼 보이는 (실은 자극적인 선동) 기사를, 그 기사의 이슈 설계에 따라  '감정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블로기즘에 대한 진심을 담은 애정어린 비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통과 대화에 대한 강렬한 희망과 그로 인한 좌절과  아쉬움이 마음 가득히 담겨 있다. 이 팟캐스트는 저널리즘발 블로그 이슈 유통 모델에 대한 비판적이고, 성찰적 사례로 두고 두고 기억해야 마땅한 기념비적인 팟캐스트다.

이 글은 새드개그맨의 'Daum과 Naver 간의 이직 구설수 (08.12.15)'라는 팟캐스트를 들은 한 청취자가, 그러니 내가 새드개그맨의 안내에 따라 진실을 재구성하는 그 '과정'을 담은 글이고, 새드개그맨이 새벽잠을 줄이면서 제작한 그 팟캐스트에 대해 한 애청자가 보내는 헌사이기도 하다.

4. 진실의 재구성

슬슬 지겨워진 독자들에게 다소 허무한 결론을 밝히고 시작해보자.
한 다음 임원의 네이버 이직 이슈를 둘러싼 진실은 실은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니 나는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실은 나는 이 결론이 무엇이든 거기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크지도 않다.

이 글은 다만 새드개그맨이 재구성하는 그 진실을 향한 여정에 감화된 한 낯선 여행자가 그 여정을 다시 되밟아 보는 과정일 뿐이다.

어떤 회사에 'ㅁㅊㄴ'이란 별명을 가진 임원이 있다고 치자.
이게 마치 어떤 학교에나 있는 '미친개'와 유사한 별명이라고 치자.
그 임원이 다음에서에서 퇴사하고 네이버로, 즉 동종업계로 이직한다고 치자.
이 소식을 어떤 저널(연합뉴스)에서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작문하고, 이 기사가 포털(네이버)을 통해 유통되었다고 치자.

이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름 그 바닥에 대해 조금은 안다는, 어떤 블로거가 그 떡밥을 붙들고 일장 훈계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 훈계에 '감화'된, 혹은 그 'ㅁㅊㄴ'에게 앙심이 있던, 혹은 별 생각없는 일단의 댓글러들이 '익명'으로 가세해 그 'ㅁㅊㄴ'을 성토한다. 

이 이슈는 일반적으로 블로그의 떡밥 유통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실 확인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전제) 사실 확정'이라는 필수적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데, 새드개그맨은 그걸 지적한다.

새드개그맨은 묻는다.
이것은 비자발적 퇴사(이직)인가? 아니면 자발적인 퇴사(이직)인가?

이 전제 사실 확정에 따라 이 이슈에 접근하는 수용자들, 관객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뒤바뀔 수 있다. 이건 어떤 가설을 세우기 위해선 정말 중요한 선결문제다. 연합기사는 네이버가 다음을 집어 삼키고, 다음이라는 거대 조직이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은 뉘앙스를 깊게 풍긴다. 하지만 그 짧은 기사를 통해서는 도무지 그렇게 판단한 근거에 대해선 확인할 길 없다.

새그개그맨은 이 선결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신의 검토할 수 있는 자료들을 성실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새드개그맨은 여러 가지 상식적 논리칙과 정황을 판단 재료로 삼고, 이 퇴사가 비자발적인 퇴사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을 아주 조심스럽게 전개해간다. 물론 진실은 나도 모르고, 새드개그맨도 정확히는 모른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그 가설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가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거친 '고민'과 '탐색'의 과정
이다.

연합뉴스는 그저, 마치 선험적인 것이라도 되는양 전제하고 있지만, 포겟더라디오에서는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
니오큐브릭닷컴에는 없고, 포겟더라디오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5. 댓글이라는 미디어

이번 팟캐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직'에 관한 이슈라기 보다는, 실은 부분에 관한 새드개그맨의 지적은 탁월하기는 하지만, 상식적인 추론과정이라서 오히려 밋밋한 느낌이 강한데, 오히려 이 이슈에 개입하는 블로거와 익명의 댓글러들이다. 새드개그맨은 댓글을 통해 전개되는 토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언젠가 프리미어 블로거 간담회에서 이정환은 댓글 역시도 웹에서 유통되는 말단의 미디어 기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댓글 역시 미디어다! 이런 차원에서 그래도 대한민국 굴지의 인터넷 기업에 몸 담은 바 있다고 '주장'하는 익명 댓글러들이 자신의 동료 직원(이었던) 한 인간을  최소한의 근거 제시도 없이 마치 공개 처형하는 방식으로 일방적 모욕을 퍼붇는 모습은 댓글이라는 미디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저열한 모습이다. 이에 대해선 블로거 호찬도 한마디 한다(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혼자 해라, hochan) 사족인데 '혼자해라' 포스트에 있는 호찬과 kabbala의 댓글 대화는 참 재밌고, 묘한 느낌이다. : )

새드개그맨의 지적처럼 이런 저열한 풍경들이 많아지면, 이명박 정권에서, 한나라당에서 추진하는 억압적이고, 타율적인 사이버 모욕죄를 비롯한 인터넷 정책들은 당연히 힘을 받는다. 그걸 원하는 것인가?

좀더 이야기하면, 이런 댓글의 풍경들은 블로그를 통해 매개되는 생생한 육성, 진실을 전하고 싶은 그 날 것의 생생함, 이런 것과도 별 상관이 없다. 이건 비유하자면, 원한을 품고 있던 누군가를 쫓아, 뒷골목에서 목 뒤에 칼을 쑤셔 넣는거다. 공개적 의견이 지탱해야 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자신의 주관적인 편견과 맞바꾸는 짓이고, 집에서 딸딸이치면서 해결해야 하는 사적인 감정을 마치 '진실을 향한 양심선언'이라고 되는 양 호도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비열한 행태다.


6. 사라진 댓글들

그리고 그렇게 댓글이 문제되자 댓글을 '일괄' 정리해버린. 니오큐브릭닷컴의 처사는 뭔가? 이건 정말 코믹하다. 자신의 글로 인해 비롯된 구체적인 분쟁에 대해, 그것이 문제되고, 또 그 댓글에 대한 외부의 기록(포스트나 언급)이 이미 존재하는 와중에서, 그 댓글들이 그저 '부담스럽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모든 댓글을, 어떤 합리적인 기준도 없이 삭제할 수 있다는 건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개별 블로그 나름으로 일정한 댓글에 대한 블로그 내부 정책(원칙과 판단표준)을 세울 수 있고, 그런 합리적인 기준과 블로거의 개성이 개입된, 하지만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기준에 의해 댓글을 삭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나름의 원칙과 기준에 의하지 않고, 그저 블로거의 '기분'에 따라, 혹은 블로그의 주관적인 '염려'에 의해,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문제된 '미디어의 일부'를 삭제해버리는 행태는 몹시 아쉽다.

물론 여전히 그 본문까지를 '삭제'하거나, '비공개'로 돌리는 '권한'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나는 그 권한은 그 블로거 개인에 속한 권한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비판은 또 겸허히 수용해야 하는 '책임'이 여전히 남는다고 본다.

사족이지만, 니오큐브릭닷컴에서 새드개그맨의 팟캐스트에 대해 후기로 쓴 글은 더 아쉽다. 이에 대해선 생략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삘에 의존한 그다지 설득력은 없는 항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7. 냉혹하고, 잔인한 웹

난 기본적으로 블로그가 갖는 이중성(개인적이며, 동시에 공적인)에 대해 긍정하고, 따라서 무조건 댓글을 지워서는 안된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댓글 자체가 논란이 된 바에야 그 댓글은 '논의의 재료'로, 더 나아가 스스로에 대한, 타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자료로 남겨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여기에 더해서 실은 웹에서 한번 논란이 된 글(댓글)은 사라지기도 쉽지 않다. 일단 한번 문제되면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게 웹이라는 곳이다. 구글링해서 저장페이지 클릭하고 캡처하면 땡인걸 뭐. 이런 점에서는 웹에 기반한 복제기술은 무서울 만큼 냉혹하게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니오큐브릭닷컴의 해당 포스트 캡처(축소본)


8. 결 : 가설은 가설이다. 하지만 대화는 모든 것이다.

블로거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나를 이야기하고,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지인들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풍경들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리뷰어들이고, 논평가들이다. 우리는 말릴 수 없는 호사가들이다.

하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이건 정말 중요하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이 모든 관심과 호기심들은 정말 부담스럽고, 재미없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다. 나는 앞서 진실 자체를 확정하는 것 만큼이나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는 것만이 중요해지면, 그건 그야말로 따분한 강박증일 될 뿐이다. 그래서 얻는게 뭔가? 내가 옳다는 그 뿌듯함? 그래서 어쩔건데?

물론 논쟁 형식으로 진행되는 대화에서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건 그 대화가 논쟁이라는 형식(게임, 룰)이라서 그런거지 거기에서 승리해서 대단한 만족감이나 새디스트적인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 건(물론 그런 쾌감이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허무한거다. 그건 자위행위 이상의 만족감을 주기 힘들다.

내가 주장하는 가설이 틀릴 수도 있고, 내가 세운 가설이 맞을 수도 있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그 가설을 세우기 위해 마련한 근거들, 그리고 그 근거들을 찾기위한 여행의 과정들, 그리고 그 가설을 세운 뒤에 다른 가설과의 대화들을 통해 얻게 된 또 다른 인식의 지평. 더 중요한 건 어쩌면 그런 대화의 풍경들이다.

특히나 블로그에서는 그렇다.
가설(주장)이 일부라면 대화는 모든 것이다.


9. 진짜 사족.
다음 네이버 이직 이슈의 부가 이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흥미를 느낀 이슈가 있다. 누가 아고라를 만들었나? 라는 걸 두고, 왈가왈부가 있더라. 이에 대해선 블로거 호찬의 까칠냉정한 논평은 음미할 만하다. (니오큐브릭닷컴, hochan)

니오큐브릭닷컴은 아마도 그 '아고라' 이슈를 통해서 자기 글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배경적 후광효과를 의도한 것 같지만, 아고라를 누가 만들었던 간에 이건 별로 글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직접적으론 관계가 없다. 이 '아고라'이야기는 그저 속물근성의 지엽적 편린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다만  ITAgora 블로그에서 이번 논란과 관련해서 새롭게 작성된 글이 사라진 건 좀 아리송하긴 하다(165번글). 물론 구글 저장 페이지로 읽어보긴 했지만, 뭐랄까 당시 아고라를 만들었던 과정에 참여했던 추억을 겸손하게, 상식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글이다. 아마도 심적인 부담, 다소 자극적인 왈가왈부에 거론되는 것을 저어해서 글을 삭제한 것 같다(물론 속사정까지야 내가 알바 아니긴 하다).


* 발아점 (&) 리뷰 대상포스트
Forget the Radio :: 069. Daum과 Naver 간의 이직 구설수 (08.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