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에 관한 EBS 다큐멘터리에서 인상적으로 남았던, 고흐가 렘브란트 전시회에 갔던 일화.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언젠가 고흐는 친구와 함께 '렘브란트' 전시회에 갔다.
밀레와 함께 고흐가 가장 존경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에 고흐는 홀린 듯 빠져들었다.
작품을 모두 둘러본 친구는 고흐에게 이제 그만 나가자고 말했다.
고흐가 대답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전시회 폐관시간이 다가오자 친구는 고흐에게 재촉했다.
고흐가 대답했다.
"이 작품을 20분만 더 볼 수 있다면, 내 남은 생애의 20년과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텐데..."
그 작품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
어제 끝난 반 고흐전 막차 탔다.
그저께 우연한 기회에 초대장이 생겨서, 까맣게 잊고 있던, 반 고흐전에 가게 된거다.
예상은 했지만, 입장까지 족히 50분은 걸린 것 같다.
아무튼 토요일 저녁에, 우연히 생긴 두 장의 초대장, 그 중 한 장을, 나는 그렇게 사용했다.
나머지 한 장은 아직 표를 구입하지 않은 어떤 여자 커플에게 줬다.
입장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들 중 한 명이 고맙다며 사탕 두 개를 주더라.
처음 먹는 사탕이었는데, 참 맛있었다.
*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고전적인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그 현존하는 예술작품과 관객, 보고 있는 자와의 교감을 '아우라'란 말로 표현한다. 그 아우라는 '거기/그 때'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제한적인 공간과 시간의 실존적 조건에 갇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이다.
복제기술의 발달은 고전적인 예술작품과 그 관객 사이를 둘러싼 신비로운 공기들... 그 아우라를 파괴한다. 그것이 아쉽다는 것인지, 혹은 그냥 그렇다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영화 예술의 탄생으로 상징되는 '복제 기술'에 의한 표현양식들은 이전의 관극태도와는 전혀 다른, 기존에 있어왔던 작품과 관객의 교감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것만은 분명할테다.
여러번 읽었지만, 여전히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벤야민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벤야민은 마치 자신이 사랑하는 책들, 그 책들의 현존성, 그 책들의 물질성에 대해 보냈던 그윽한 응시를 '그 때/거기'에서만 현존할 수 있는 어떤 예술작품에 보냈으리라. 벤야민이 고흐의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문득 나는 상상한다. 물론 그 눈동자는 그저 희미하게, 그저 실루엣으로 그려질 뿐이지만..
* 아이리스 (Irises)
압도적인 생명력. 금방이라도 눈 앞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생동감. 그런데 그것들은 놀랍게도, 이미 죽어가고 있다. 쓰러지고 있다. 피흘리고 있다. 그 하나 하나의 꽃잎들은, 이파리들은 서로 다른 실존의 풍경 속에 있는 '삶'인 것만 같다.
생명으로 불타던 그 푸른 빛들, 그 푸른 꽃잎들과 이파리들은 이미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들 속에 여전히 생명이었던 기억이 붙잡고 있는 상상과 욕망들은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감싸는 따뜻한 손...
'아이리스' 안에는 천사와 조랑말을 탄 사제와 그에게 기도하는 아이들이 있다. 거기에는 새들과 벌거벗은 여인들이 있고, 새들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며, 벌거벗은 여인들은 소파에 누워 있는 삐에로와 장난스런 키스를 나눈다.

아쉽게도...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건 아이리스가 아니다.
*
김현은 황지우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타오르는 불의 푸르름'이라고 말했다.
아이리스는 그 말을 떠올린다.
그 푸른 빛들, 그 푸른 죽음들, 하나 하나의 꽃잎들과 이파리들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상상, 그 속에 감춰진 꿈꾸는 듯한 소망은 그렇게 푸르게 푸르게 타오른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그 푸르른 불덩어리들...
지금도 그 푸른 꽃잎들은 푸르게 타오르고 있을테다.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언젠가 고흐는 친구와 함께 '렘브란트' 전시회에 갔다.
밀레와 함께 고흐가 가장 존경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에 고흐는 홀린 듯 빠져들었다.
작품을 모두 둘러본 친구는 고흐에게 이제 그만 나가자고 말했다.
고흐가 대답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전시회 폐관시간이 다가오자 친구는 고흐에게 재촉했다.
고흐가 대답했다.
"이 작품을 20분만 더 볼 수 있다면, 내 남은 생애의 20년과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텐데..."
그 작품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
어제 끝난 반 고흐전 막차 탔다.
그저께 우연한 기회에 초대장이 생겨서, 까맣게 잊고 있던, 반 고흐전에 가게 된거다.
예상은 했지만, 입장까지 족히 50분은 걸린 것 같다.
아무튼 토요일 저녁에, 우연히 생긴 두 장의 초대장, 그 중 한 장을, 나는 그렇게 사용했다.
나머지 한 장은 아직 표를 구입하지 않은 어떤 여자 커플에게 줬다.
입장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들 중 한 명이 고맙다며 사탕 두 개를 주더라.
처음 먹는 사탕이었는데, 참 맛있었다.
*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고전적인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그 현존하는 예술작품과 관객, 보고 있는 자와의 교감을 '아우라'란 말로 표현한다. 그 아우라는 '거기/그 때'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제한적인 공간과 시간의 실존적 조건에 갇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이다.
복제기술의 발달은 고전적인 예술작품과 그 관객 사이를 둘러싼 신비로운 공기들... 그 아우라를 파괴한다. 그것이 아쉽다는 것인지, 혹은 그냥 그렇다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영화 예술의 탄생으로 상징되는 '복제 기술'에 의한 표현양식들은 이전의 관극태도와는 전혀 다른, 기존에 있어왔던 작품과 관객의 교감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것만은 분명할테다.
여러번 읽었지만, 여전히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벤야민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벤야민은 마치 자신이 사랑하는 책들, 그 책들의 현존성, 그 책들의 물질성에 대해 보냈던 그윽한 응시를 '그 때/거기'에서만 현존할 수 있는 어떤 예술작품에 보냈으리라. 벤야민이 고흐의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문득 나는 상상한다. 물론 그 눈동자는 그저 희미하게, 그저 실루엣으로 그려질 뿐이지만..
* 아이리스 (Irises)
압도적인 생명력. 금방이라도 눈 앞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생동감. 그런데 그것들은 놀랍게도, 이미 죽어가고 있다. 쓰러지고 있다. 피흘리고 있다. 그 하나 하나의 꽃잎들은, 이파리들은 서로 다른 실존의 풍경 속에 있는 '삶'인 것만 같다.
생명으로 불타던 그 푸른 빛들, 그 푸른 꽃잎들과 이파리들은 이미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들 속에 여전히 생명이었던 기억이 붙잡고 있는 상상과 욕망들은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감싸는 따뜻한 손...
'아이리스' 안에는 천사와 조랑말을 탄 사제와 그에게 기도하는 아이들이 있다. 거기에는 새들과 벌거벗은 여인들이 있고, 새들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며, 벌거벗은 여인들은 소파에 누워 있는 삐에로와 장난스런 키스를 나눈다.

아쉽게도...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건 아이리스가 아니다.
*
김현은 황지우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타오르는 불의 푸르름'이라고 말했다.
아이리스는 그 말을 떠올린다.
그 푸른 빛들, 그 푸른 죽음들, 하나 하나의 꽃잎들과 이파리들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상상, 그 속에 감춰진 꿈꾸는 듯한 소망은 그렇게 푸르게 푸르게 타오른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그 푸르른 불덩어리들...
지금도 그 푸른 꽃잎들은 푸르게 타오르고 있을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