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기의 소외 때문일 것이다. 입시 때문에, 학점 때문에, 취직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 앞에서 잘난 척하거나, 어디엔가 써먹기 위해 두서없이 암기하는 책 읽기도 소외의 한 표현이며, 현실에서 겪기 마련인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달콤한 책들에 빠져드는 것도 주관적으로는 즐거움으로 느끼지만, 객관적으로는 소외의 한 표현이다.
- 박성헌, 책 고르기와 책 읽기 중에서
- 박성헌, 책 고르기와 책 읽기 중에서
언젠가 읽었던 [근대인의 소외](프렌츠 파펜하임. Fritz Pappenheim) 서문에는 고야(Goya)의 그림을 통해 소외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수형 당한 한 죄인의 이(치아)를 훔치기 위해 한 여인이 다가간다. 여인은 죽은 이의 이를 원하지만, 차마 자기 욕망의 목적인 죽은 이의 이를 직접 응시하지 못한다. 여인은 손수건으로 시선을 가린다. 여인의 얼굴은 욕망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 고야의 동판화가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 처럼 소외는 욕망과 자아 사이의 부조화에서 연원한다.

Goya
여인의 시선이 자아가 지향하는 궁극의 소망에 관계한다면, 현실적인 욕망을 함축는(물질을 쟁취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한 도구인) 손은 자신의 욕망, 그 이상적인 조화의 풍경과는 단절된 현실적인 욕구를 상징한다. 그 눈(目)과 손(手)은 일치하지 않은 채로 서로 다른 자기의 요구(소망과 욕망)를 향해 있고, 그 둘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
소망은 바라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자기 소망을 대상으로 추락시키지 않는다. 그 소망은 '나-너'라는 짝말(부버) 속에 있는 '너'를 응시할 때 생겨난다. 그건 그저 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바라볼 뿐이며, 서로를 존재 전체로서 느끼고, 만지고, 탐닉하지만, 결코 소유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 존재는 '나-너'라는 관계 속에서 나이고, 나라는 일치와 조화의 풍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너를, 혹은 나를 대상화시켜 복종하거나, 복종시킬, 소유하거나, 소유당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욕망은 '나-그것'이라는 또 다른 짝말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그렇게 자기가 바라는 소망들을 대상화(욕망화)시킨다. 그것은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소유해야 하는 목적이 된다.
소망이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면, 욕망은 '단절' 속에서 싹튼다. 소망이 '조화'와 관계 맺는다면, 욕망은 차별과 위계에 관계한다. 욕망의 성취는 우리를 달콤한 즐거움에 빠뜨릴 수는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이미지가 우리 안에서 피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욕망은 관계를 모르고, 단 한번도 관계 속에서 숨쉰 적 없으며, 그것은 욕망에 내재된 원초적인 소외 인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행복은 이미지일 뿐이지만, 그 행복의 이미지는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정현종).
우리는 더 없는 욕망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갈구하며, 쟁취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는 경우에도 우리에게는 텅빈 공허만이 남을 뿐이다. '나와 너'라는 관계의 풍경 속에서 '온존재를 기울여' 만나지 못한다면, 그저 쟁취하려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소외 만을 남길 뿐이다. 이것은 책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외는 궁극적으로 나를 나로부터 멀리 밀어낸다.
나라는 고립적 실존이 우리라는 소망의 풍경 속에서 스스로를 추방시킴으로써, 기꺼이 그렇게 욕망에 복종함으로써, 소외는 '나-너'라는 관계 속에서만 살려질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결국은, 완전히 지워버린다.
* 참조 페이지
맹문재, 패스 카드 시대의 의리지기 : 고야 그림에 대한 희미한 기억에 때문에 참조.
* 발아점
책 고르기와 책 읽기 (박성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