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깅의 두려움

2008/02/26 07:57
부제 : 깊은 잠에서 깨다.
(이런 잡문에 무슨 부제씩이나... )

*
지난 토요일 오전에는 [소리웹 - 인터뷰]에서 두 번째로 추진 중인 집중인터뷰 주제 [로스쿨]과 관련, 블루룸님 첫 번째 인터뷰를 했다(여기에 대한 소개 및 홍보글도 쓸 생각이다. 인터뷰는 5회로 예정되어 있다. 엉뚱한 소리지만 많이 좀 들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는 행인님께서 추진하신 '명랑좌파 창당 준비 모임'에 갈 예정이었다. 무척 기대가 되는 모임이라서 꼭 참석해야지... 일주일 내내 생각했던 그런 모임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지난 일주일 동안 좀 피곤했던 몸을 낮잠으로 불러들인게 화근이었다.
목요일에는 동대문 새벽시장을 동기녀석과 함께 헤맸고, 금요일에는 오랜만에 블로거벗들과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휴대폰 알람을 믿은 것도 이 후회할만한 낮잠의 공범이었을테다.
어쩐지 좀 오래 잔 것 같아서 휴대폰을 찾아보니 밧데리가 꺼져있었다.

부랴부랴 책상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확인해보니...
토요일 정오 쯤 잠이 든 것 같은데, 시계는 일요일 새벽 4시 30분 쯤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 같다.
16시간 넘게 잠에 빠진거다.
약간 몸살 기운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자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행인님께 죄송해서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말 하지 않았으면, 혹은 갈지 못갈지 모른다 했으면 그나마 다행일텐데..
별일 없으면 꼭 가겠다고 그렇게 말을 해놓고,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바람을 놓다니...

아무튼 이러저런 걱정을 하면서, 혹은 스스로의 게으름에 대해 골몰히 생각하면서...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실은 행인님께서 주최하신 모임에 가지 못해서 행인님께 너무 죄송하다거나... 혹은 스스로도 너무 아쉽다 이런 것은 아니고...(물론 너무 죄송하고, 또 아쉽지만) 깊은 잠에서 깬 뒤의 느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들, 그 이상한 감상들을 기록하고 싶다.


**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예전에 아거님께서 귀국하셨을 때도 거의 스무 시간을 자는 바람에 (아거님 공식모임(?) 그 다음 날) 약속(그것도 내가 구태여 함께 하고 싶다고 부탁해서 마련한 약속)을 날린 적 있다. 그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지난 주말,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의 느낌은...

그런데 이런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어떤 중요한 약속을 내가 망가뜨렸다거나, 혹은 어떻게 '핑계'를 마련할까.. 이런 '아동스러운' 걱정들부터...(물론 약속을 깨뜨리지 않고도 종종 긴 잠을 자곤한다)  난 도대체 왜 사나... 이 세상은 왜 이렇게 공포스러운가... 왜 나는 혼자인가... 이런 잡생각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미투로그에도 썼던 기억이 나는데... 내가 꽤 좋아하는 영화 중에 [언브레이커블]이란 영화가 있다. 미국식 수퍼히어로에 대한 반성적인 메타포라고 나는 평가하는 이 놀랄만한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가 이렇게 아내에게 말한다.

"악몽을 꾼 뒤 제일 처음 떠올린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을 때"

그 장면은 너무도 인상적이다.
너무 인상적인거다.


***
나는 아주 아름다운 풍경들을 바라보거나 하면, 가령 오늘처럼 눈 쌓인 새벽을 걷는다거나 하면, 새벽 가로등에 비친 그 반짝거림들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정말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아주 작은 골목들만 그렇지만, 나는 그럴 때 물론, 커피캬라멜을 떠올린다. 이 보잘 것 없는 서울 어느 동네의 골목들을 함께 걷고 싶은거다, 아주 잠시라도... 삼십 분만, 아니 십분 만이라도 그 눈에 반짝거리는 싸구려 다이아몬드 같은 아름다운 별빛들, 그 반짝거림들을 함께 바라보고 싶은거다...



****
다시 그 새벽, 일요일 새벽으로 돌아가자.
컴퓨터는 지난 2년 반동안 나에게 가장 가까운 물건이다.
그건 솔직히 물건 이상이다.
그 안에는 내가 '온라인 실존'이라고 부르는 무수히 많은 실존들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인터넷이고, 블로그다.
나는 블로그를 온라인 실존의 집이라고 비유하곤 한다.
그건 집이자 광장이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전장이다.
블로그는 그저 소박한 사춘기 소녀소년들의 일기장이고, 나같은 고등놈팽이들(실은 나는 그다지 '고등'하지는 않지만)의 놀이터이다. 그리고 블로그는, 나는 그러기를 희망하는데,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고양시키는, 그런 잠재력을 갖는 시민사회의 의식적 하부기제이기도 하다(물론 이건 희망사항이지만).



*****
컴퓨터를 켜는 일이 몹시 두려울 때가 있다.
그 두려움은 관성을 갖는 것 같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그 관성은 더 커진다.

이렇게 길게 잠에 빠진 뒤로 컴퓨터를 켜면, 블로그에 접속하면, 내가 과연 왜 다시 여기에 들어온거지... 이런 생각을 하곤한다. 그리고 생각하는거다. 사람들은 잠에 빠져 있거나, 무한도전을 열심히 시청하고 있거나, 연인들과 아름다운 데이트를 하고 있고, 또 새벽을 하얗게 만드는 신나는 섹스에 빠져 있을테다....

그리고 나는 왜 블로깅을 하는걸까...

그렇게 두려움에 빠진 채로 가까스로 컴퓨터를 켜고, 내 블로그에 들어오면...
문득 내 블로그가 너무도 낯설다.
그건 마치 세상이 나에게 낯선 것처럼, 그렇게 낯설고...
내가 소망하는 그 모든 풍경들이 나에게 멀리 있는 것처럼 그렇게 멀리 있는 것만 같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 낯선 느낌들을 그냥 한번, 언젠가는 써보고 싶었다...




* 이 글은 '블로깅의 즐거움'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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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블로깅으로 인한 부작용

    Tracked from 미도리의 온라인 브랜딩 2008/11/19 06:29 del.

    블로그에 입문한지 1년여, 열심히 포스팅하기 시작한지는 6개월이 되어가는 열정 가득한 초보 블로거. 틈만 나면 블로그를 들락거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블로그 하라고 권하고, 머릿 속은 온통 포스팅 소재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블로깅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지만 더불어 이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수면 부족 업무 시간에 블로그를 할 수는 없으니 주로 아침 일찍이나 밤늦게 블로그를 해야 한다. 새벽에 잠이 깨면 세 시건 네 시건 컴퓨터앞에 앉는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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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yoyoo 2008/02/26 09:18

    인간은 궁극적으로 혼자입니다. 삶과 실존에 있어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누가 도와줄 문제도 아니지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민노씨 님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가 자기 목숨만큼 민노씨 님을 사랑한다면, 민노씨 님의 삶의 향기는 더욱 짙어질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민노씨 님이 결혼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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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2/26 11:42

      말씀하신 바가 모두 그대로 공감이 되네요.

      그런데.. ^ ^;;
      아마도 저는 독신으로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요.
      물론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긴 하지만요.

  2. digitalcowboy 2008/02/26 10:01

    미디어 혁명이 낳은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닐 포스트만이 말한 낮은 정보-행동률(Low Information-Action Ratio), 즉 ‘LIAR’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TV 세대나 인터넷 세대에 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현상으로 각종 미디어를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그대로 버리거나 다른 곳에 전달하기만 하고 그 정보에 근거한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는 첨단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필요를 알지만 그것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기존 생활 방식은 전혀 바꾸려 하지 않는 거짓말쟁이(LIAR)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건강한 블로거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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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2/26 11:46

      정말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구체적인 '실천'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수위로 그 '실천'을 규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블로깅과 관련해서는...
      비유일 뿐입니다만, 다음 블로거뉴스가 원하는 그런 '유사 저널리즘적 취재'에 블로그의 '실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일상 속에서, 그리고 그 일상의 사유와 체험들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반응'들에 좀더 큰 실천적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3. egoing 2008/02/26 10:11

    참으로 몽한적이내요. 마치 저도 꿈결을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불속에서 몽정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내요.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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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2/26 11:49

      몽환과 몽정.
      이렇게 솔직한 논평을 주시다니.. ^ ^
      암튼 이렇게 댓글을 통해 만나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참 반갑네요. : )

  4. comodo 2008/02/26 10:20

    하지만 이 블로그를 찾는 사람이라면 이러한말을 믿을수 없을껍니다~
    누가 민노씨의 블로그를 보고 블로깅을 두려워하리라 생각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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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2/26 12:06

      누구나 조금씩은 블로깅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싶기도.. ^ ^;;
      저는 때론 굉장히 두려워하는 편이지만요.

  5. 칫솔 2008/02/26 11:04

    아무런 생각없이 뜨거운 열정을 쏟다가 문득 소비되는 그 열정을 되돌아볼 때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아요. 민노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블로그에 너무 열정을 쏟다보면 그게 두렵게 보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블로그를 그만할 수 없잖아요? 열정을 쏟아서 할만큼 사랑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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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2/26 12:06

      칫솔님께서야 워낙에 블로깅의 달인이시라.. : )

    • 칫솔 2008/02/26 13:34

      블로깅의 달인보다는 소통의 달인이고 시포요~ ^^

    • 민노씨 2008/02/27 15:36

      저는 연애의 달인이고 시포요~ ^ ^

  6. 행인 2008/03/07 15:19

    안녕하세요? 그동안 소식이 뜸했네요. 후기도 못올릴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ㅠㅠ(사실은 제가 게을러 터져서...)

    인터넷과 휴대폰이 삶의 한 축을 이루면서 약속의 중요함이나 기다림의 애절함이 많이 없어진 시기인데,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참석을 못한 것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제가 다 머쓱해지네요. ^^

    생각해주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쬐끔 바빠서(이런 말 정말 하지 않고 싶은 말인데요... 쩝...)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총선 이후 다시 자리를 만들어볼랍니다. 그 때 뵙고 좋은 말씀 듣지요. ㅎㅎ

    언제나 건강하시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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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3/10 19:33

      안그대로 행인님 글이 뜸해서 궁금하던 차인데요.
      지금 살펴보니 새로운 글 두 개가 올라왔네요. : )

      근황 : http://blog.jinbo.net/hi/?pid=962
      소신 : http://blog.jinbo.net/hi/?pid=963

      총선이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왔네요.
      총선 끝나고 저야말로 행인님게 좋은 말씀 듣게 되길 기대합니다.

      행인님께서도 모쪼록 건강 살피시구요. : )

  7. 써머즈 2008/03/13 00:42

    1. 사실 (개인적인 활용을 위한) 인터넷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이후에 확실히 알았죠. 포털의 뉴스기사나 오늘의 이야기 등을 읽으며 (습관적으로 웹서핑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것은 그 사실을 안 즈음이었을 거예요.

    2. 그런 것과 별개로 민노씨가 말한 것과 같은 느낌과 같을지는 모르지만, 묘한 느낌이 드는 오후가 있습니다. 술을 많이 먹고 다음날 늦게 깨서 거리를 걸을 때라든지, 일상의 생활패턴을 깨며 보낸 날의 다음날 오후라든지… 보통 그럴 때 느껴지곤 하는데, 풍경이 낯설면서도 저 자신도 낯설 때가 있어요. 그리 유쾌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싫은 느낌도 아닌 묘한 괴리감.

    그런 날은 그저 묘한 느낌을 느끼며 지나가면 되는데, 블로그는 한번 생각에 빠지니 돌아오는 게 쉽지 않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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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3/13 00:56

      없으면 또 없는대로 적응을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 )

      하지만 이왕에 시간을 기꺼이 투여해서 자신의 고민과 희망과 고통과 즐거움... 이런 실존을 투사하는 것이라면 좀더 의미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것이 때론 즐거움으로, 때론 스스로에 대한 부담이나 실망감으로.. 묘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낯설다는 느낌은 시도 때도 없이 들곤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이 글 쓰는 내가 나 맞나..
      싶은 생각도... ㅎ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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