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두 얼굴의 테레사 (들풀)
약자 응원 현상 (아거)
눈속임을 통한 여론 장난질 (써머즈)
이 글은 위 글들의 문제의식을 조금이나마 확산하기 위한 포스팅이다.
장난질은 계속되고 있다.
1. 두 얼굴의 테레사, 두 개의 이스라엘
들풀님의 글은 동일한 저널(TIME)에 표지로 등장한 테레사 수녀를 소재로 하고 있다.
아거님께서는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 사례를 이야기하신다.
저널리즘이 표방한다는 객관성은 상대적인 객관성이다.
편집(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것을 머리에 올릴 것인가, 이미지와 텍스트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 각 기사들은 어떤 구도로 배치할 것인가... )은 그 편집권을 행사하는 개인과 집단, 그리고 조직의 역학에 의해 해당 매체와 해당 기사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즘에서 표방하는 객관성은 '사실에 대한 불가침'을 지지한다는 추상적이기 그지 없는, 실질적으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원칙과 선언에 불과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저널리즘의 최소한이긴 하다).
미디어는 독자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상업적인 고려 때문에, 혹은 자신의 철학과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당파성의 욕구 때문에 나름의 편집 방법론을 추구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악질적인 수단으로써 편집 방법론의 한계를 일탈하는 순간 발생한다(그런 가장 대표적인 매체가, 내가 읽고, 접촉한 체험을 한계로 말하자면, 조선일보다).
인정할 수 있는 편집방법론과 인정할 수 없는 편집방법론의 한계는 명확하게 설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독자들에 따라, 그 해당 텍스트(기사와 매체)를 둘러싼 맥락, 그러니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유동적이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널리즘을 추구한다는 온갖 미디어들은 어쩔 수 없이 당파성 매체라는 사실이다. 저널리즘의 불편부당과 객관성이란 허상과 가식적 선언으로서의 객관성에 불과하다.
2. 저널미장센의 층위
편집의 방법론을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메시지도 그 자체로, 메시지의 알맹이만으로 전달되는 경우는 없다.
메시지는 형식이라는 외투를 입는다.
그것은 텍스트(여기서는 '문자'를 지칭) 그 자체이기도 하고, 텍스트와 이미지의 조합이기도 하며, 그 기사들의 배치와 조합에 의한 이미지 충돌이기도 하다.
위 들풀님께서 제시한 사례는 메시지(기사)가 요구하는 당연한 욕구로서 테레사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니 테레사의 서로 다른 두 얼굴에 대한 의도적인 이미지 선택은 편집방법론의 한계 내에 존재한다(고 나는 평가한다). 메시지는 자신의 욕구가 시키는대로, 로미오가 줄리엣을 부르듯, 이미지를 호출한다.
아거님께서 제시한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해당기사를 통해 실체화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있는 편집 방법론의 한계 속에서 존재하는 '당파성의 구현'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을 지지하거나,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매체라면 해당 독자에게 서로 다른 '포커스'를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런 경우라면 독자들의 비판적인 글읽기의 수고를 당부할 수 밖에는 없을테다.
문제는 이런 편집 방법론의 한계를 일탈하는 경우다.
3. 편집방법론의 일탈 : 악질적 저널미장센 혹은 저널미장센의 낮은 차원.
써머즈님께서 쓰신 글은 이러한 인정할 수 있는 저널미장센, 혹은 편집방법론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일탈하고 있는 경우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ㄱ. 해당 한국일보 기자가 도표작성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실수가 반복되었거나 (반복.. ㅡㅡ;; )
ㄴ. 독자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경우이거나.
솔직히 나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처음에는 의도과 목적을 가진 '장난질'이라는 판단이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엉성하고, 허접하다. 해당 기사의 큰 제목도 그렇고...
물론 두 가지 모두 치명적이긴 하다.
실수라면 기자로서 기사작성에 대한 기초를 다시 제대로 배우라는 민망한 조언을 들려줄 수 밖에는 없다. 해당 기사의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근거로서의 제시된 도표가 서로 따로 놀고 있다.
장난질이라면, 간단히 말하자, 허접하다.
정말 저질인거지.
4. 비판적 독자, 비판의 방법, 그리고 블로그.
당신을 둘러싼 그 온갖 미디어들은 자신 만의 욕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주로 상업성에 대한 요구이고, 때론 정치적인 당파성과 철학적 지향에 대한 소망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악질적인 편향과 조작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천박한 이익을 실현하겠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 욕구들을 당신의 시선을 자신의 요구에 의해 맞추기를 원한다. 미디어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이끌리는 그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의 외투를 걸치며, 당신을 유혹하거나, 혹은 설득한다.
하지만 그 욕망이 당신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혹은 눈속임을 통해 당신을 장난질의 도구로 삼고자 한다면, 그렇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 미디어를 죽여라.
미디어를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방법일텐데, 당신의 소중한 시력 보호를 위해 그 미디어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 미디어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구가하고 있는 경우라면 매우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방법일테다.
나머지 하나는 그 미디어의 천박한 욕망을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을 비판하는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연대하는 일이다.
당신에게는, 이미, 블로그가 있다.
* 어처구니, 혹은 장난질
한국일보의 BBK 여론 조사 결과 관련 기사 (정진황)
* 발아점 : 일독 권합니다.
두 얼굴의 테레사 (들풀)
약자 응원 현상 (아거)
눈속임을 통한 여론 장난질 (써머즈)
약자 응원 현상 (아거)
눈속임을 통한 여론 장난질 (써머즈)
이 글은 위 글들의 문제의식을 조금이나마 확산하기 위한 포스팅이다.
장난질은 계속되고 있다.
1. 두 얼굴의 테레사, 두 개의 이스라엘
들풀님의 글은 동일한 저널(TIME)에 표지로 등장한 테레사 수녀를 소재로 하고 있다.
위에 제시한 두 그림은 원래의 표지에서 제목 등 텍스트가 지워진 상태다. 그래도 우리는, 어떤 사진이 어떤 기사와 대응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성인 테레사를 다룬 기사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회의하던 종교인 테레사를 다룬 기사는 각각 어떤 표지와 연결될까?
- 두 얼굴의 테레사 (들풀) 중에서
- 두 얼굴의 테레사 (들풀) 중에서
아거님께서는 흥미로운 심리학 실험 사례를 이야기하신다.
한 그룹에게는 이스라엘 지도만 부각시키면서 팔레스타인 영토를 작게 보여준 반면, 다른 그룹에게는 중동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를 보여주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지지하는가를 측정했다.
- 약자 응원 현상 (아거) 중에서
- 약자 응원 현상 (아거) 중에서
저널리즘이 표방한다는 객관성은 상대적인 객관성이다.
편집(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것을 머리에 올릴 것인가, 이미지와 텍스트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 각 기사들은 어떤 구도로 배치할 것인가... )은 그 편집권을 행사하는 개인과 집단, 그리고 조직의 역학에 의해 해당 매체와 해당 기사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즘에서 표방하는 객관성은 '사실에 대한 불가침'을 지지한다는 추상적이기 그지 없는, 실질적으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원칙과 선언에 불과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저널리즘의 최소한이긴 하다).
미디어는 독자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상업적인 고려 때문에, 혹은 자신의 철학과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당파성의 욕구 때문에 나름의 편집 방법론을 추구하게 된다. 다만 문제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악질적인 수단으로써 편집 방법론의 한계를 일탈하는 순간 발생한다(그런 가장 대표적인 매체가, 내가 읽고, 접촉한 체험을 한계로 말하자면, 조선일보다).
인정할 수 있는 편집방법론과 인정할 수 없는 편집방법론의 한계는 명확하게 설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독자들에 따라, 그 해당 텍스트(기사와 매체)를 둘러싼 맥락, 그러니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유동적이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널리즘을 추구한다는 온갖 미디어들은 어쩔 수 없이 당파성 매체라는 사실이다. 저널리즘의 불편부당과 객관성이란 허상과 가식적 선언으로서의 객관성에 불과하다.
2. 저널미장센의 층위
편집의 방법론을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메시지도 그 자체로, 메시지의 알맹이만으로 전달되는 경우는 없다.
메시지는 형식이라는 외투를 입는다.
그것은 텍스트(여기서는 '문자'를 지칭) 그 자체이기도 하고, 텍스트와 이미지의 조합이기도 하며, 그 기사들의 배치와 조합에 의한 이미지 충돌이기도 하다.
위 들풀님께서 제시한 사례는 메시지(기사)가 요구하는 당연한 욕구로서 테레사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니 테레사의 서로 다른 두 얼굴에 대한 의도적인 이미지 선택은 편집방법론의 한계 내에 존재한다(고 나는 평가한다). 메시지는 자신의 욕구가 시키는대로, 로미오가 줄리엣을 부르듯, 이미지를 호출한다.
아거님께서 제시한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해당기사를 통해 실체화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있는 편집 방법론의 한계 속에서 존재하는 '당파성의 구현'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을 지지하거나,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매체라면 해당 독자에게 서로 다른 '포커스'를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런 경우라면 독자들의 비판적인 글읽기의 수고를 당부할 수 밖에는 없을테다.
문제는 이런 편집 방법론의 한계를 일탈하는 경우다.
3. 편집방법론의 일탈 : 악질적 저널미장센 혹은 저널미장센의 낮은 차원.
써머즈님께서 쓰신 글은 이러한 인정할 수 있는 저널미장센, 혹은 편집방법론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일탈하고 있는 경우다.
이쯤되면 정말 막 나간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우리나라에는 위대하신 수령 동지 이명박만이 희망인 걸까요? (본문)
고도의 '실수'라고 하겠지요. -_-; (댓글)
- 눈속임을 통한 여론 장난질 (써머즈) 중에서
정말 우리나라에는 위대하신 수령 동지 이명박만이 희망인 걸까요? (본문)
고도의 '실수'라고 하겠지요. -_-; (댓글)
- 눈속임을 통한 여론 장난질 (써머즈) 중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ㄱ. 해당 한국일보 기자가 도표작성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실수가 반복되었거나 (반복.. ㅡㅡ;; )
ㄴ. 독자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경우이거나.
솔직히 나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처음에는 의도과 목적을 가진 '장난질'이라는 판단이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엉성하고, 허접하다. 해당 기사의 큰 제목도 그렇고...
물론 두 가지 모두 치명적이긴 하다.
실수라면 기자로서 기사작성에 대한 기초를 다시 제대로 배우라는 민망한 조언을 들려줄 수 밖에는 없다. 해당 기사의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근거로서의 제시된 도표가 서로 따로 놀고 있다.
장난질이라면, 간단히 말하자, 허접하다.
정말 저질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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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판적 독자, 비판의 방법, 그리고 블로그.
당신을 둘러싼 그 온갖 미디어들은 자신 만의 욕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주로 상업성에 대한 요구이고, 때론 정치적인 당파성과 철학적 지향에 대한 소망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악질적인 편향과 조작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천박한 이익을 실현하겠다는 욕망이기도 하다.
그 욕구들을 당신의 시선을 자신의 요구에 의해 맞추기를 원한다. 미디어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이 이끌리는 그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의 외투를 걸치며, 당신을 유혹하거나, 혹은 설득한다.
하지만 그 욕망이 당신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혹은 눈속임을 통해 당신을 장난질의 도구로 삼고자 한다면, 그렇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 미디어를 죽여라.
미디어를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방법일텐데, 당신의 소중한 시력 보호를 위해 그 미디어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 미디어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구가하고 있는 경우라면 매우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방법일테다.
나머지 하나는 그 미디어의 천박한 욕망을 어처구니 없는 장난질을 비판하는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연대하는 일이다.
당신에게는, 이미, 블로그가 있다.
* 어처구니, 혹은 장난질
한국일보의 BBK 여론 조사 결과 관련 기사 (정진황)
* 발아점 : 일독 권합니다.
두 얼굴의 테레사 (들풀)
약자 응원 현상 (아거)
눈속임을 통한 여론 장난질 (써머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