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크와 블로깅

2011/06/01 23:58
나는 항상 블로깅이란게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거나, 대단한 글솜씨를 뽐내는 일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그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블로거는 나르시시스트들이라서, 자신의 글을 읽고 감탄하거나, 그 거울 반대편 감정으로 쪽 팔리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블로거가 아니다.

한 시간 쯤 전에 이정환에게 전화가 왔다. 술 한잔 했나보다. 인터넷 주인찾기 컨퍼런스에 대해, 왜 다시 블로그인가!, 이정환이 메일을 통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한 그 테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블로거의 열정에 대해, 우리가 함께 꿈꿨던 이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컨퍼런스를 하는 건 아니다. 컨퍼런스가 블로깅의 알리바이가 되어선 안된다. 우리 스스로도 블로그를 하지 않잖아. 우스운 일이다. 우리의 에너지는 블로깅에 존재한다. 그가 한 이야기도 있고, 내가 한 이야기도 있다. 한 시간도 흐르지 않았지만 내 건망증이 살짝 기억의 변주들을 만들어낸 부분도 물론 있다.

그리고 써머즈와 전화를 했다.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블로거다. 아거와 주낙현, 그리고 써머즈. 내가 존경하는 3대 블로거. : ) 아거는 내 블로깅의 전범이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지적인 고민들을 견고한 성채와도 같이 쌓아올린다. 나는 도저히 그 높은 성채를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주낙현은 내 좁쌀같은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 넓고, 깊은 성찰의 고요한 호수와도 같다. 거기서 상처난 마음을 위로받곤 한다. 써머즈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블로거다. 그는 섬세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날카로운 감각들, 가끔은 냉소적일만큼 냉정한 현실감각. 그 감각들을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프로그래머다. 그 밖에도 정말 훌륭한 블로거들. 이정환, 새드개그맨, 강정수, 미닉스, 이고잉, 나솔, 캡콜드, 이승환, , 들풀, 행인...(이 말줄임표에는 또 얼마나 많은 블로거들이 숨겨져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블로깅을 거의 하지 않는 아틸라... 그들의 블로깅을 통해 나는 배우고, 자라며, 위로받고, 때론 감상적인 동료애를, 그에 더한 인간애를, 사회를 향한 우리들의 바람과 꿈을 공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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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머즈와 대화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웨인 왕이 감독한 <스모크>(1994)란 영화다. 하비 케이틀은 매일 그 장소, 그 시간에 사진을 한장씩 찍는다. 그게 유일한 그의 존재 증거인 것처럼 그 일을 반복한다. 내게 블로깅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일 한 장씩, 내 삶을, 내 희미해진 꿈을 블로그에 담는 일. 그 일을 해보고 싶다. 그동안 너무 블로깅에 게을렀다. 그 게으름은 다른 더 커다란 만족을 위해 바쳐진 시간도 아니다. 그 시간은 그저 다른 습관에 바쳐진 무의미에 가까울 뿐이다. 블로깅이 무슨 대단한 의미라는 생각, 미안하지만, 나에겐 없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과 손 잡고 산책하는 일, 그 사람의 피곤한 눈동자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일, 서로의 목소리를 귓가에 속삭여주는 일, 그런 일만큼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내가, 그래서 우리가 함께 꿈꾸는 '어떤 풍경'을 잊지 않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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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1. 그리고 오늘은 유자넷(유권자 자유 네트워크) 캠페인 선포식이 있었다. 나는 무려 공동집행위원장이다. 스스로도 폭소를 자아내는 직함이다. 그게 그저 껍질에 불과하다는 건 나도 알고, 나를 아는 당신도 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정말 '시민' 있는 시민운동을 해보자는 거, 박준우가 그토록 바라는 당연한 시민운동을 하는데 내가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 그거 뿐이다.

2. 그리고 오늘은 필벗들, 베스형과 종작가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우승이 형님도 오랜만에 뵈었다. 그리고 누나와 짧은 통화를 나눴고, 미국에 계신 아거님과 주낙현 신부님을, 잠시, 떠올렸다.

3. 내일 모레 두리반에서 '파티하쥐'라는 쥐 그래피티 벌금을 충당하기 위한 후원주점을 한다. 원래도 시간이 나면 가보려고 생각했는데,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의 정하씨께 전화가 왔다. 그 후원주점 때문은 아니고, 장애인 활동가들이 꽤 쎄게 벌금을 먹었나보다. 그래서 벌금을 마련하기 위해 티셔츠를 만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들려줬다. 통화하면서 '훌륭한 블로거'(레알!ㅎㅎ) 이정환에게 이야기했더니, 금요일에 두리반에 온단다. 참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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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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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11/06/02 00:11

    추. 1. 2. 3.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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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cat 2011/06/02 00:20

    아..... 스모크. 그런 제목이었군요.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영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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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2 15:45

      닷캣님 오랜만입니다. : )
      요즘 제 블로그 답글은 대체로 "**님 오랜만입니다'로 시작하는 것 같아요. ㅎㅎ

    • .cat 2011/06/04 22:27

      후후후.... 제가 댓글을 엄청 오랜만에 쓰긴 했죠. 흑흑흑...

    • 민노씨 2011/06/05 00:41

      ㅎㅎㅎ
      확인 답글까지 주시고... : )
      그나저나 연휴 첫 날 잘 보내셨나 모르겠습니다.

  3. viamedia 2011/06/02 01:34

    영화 '스모크'와 블로깅을 연결지은 것은 정말 민노씨다운 감각이에요.

    렌즈를 통해 같은 일상을 반복적으로 응시할 때 맺히는 상들과 블로깅이 아름답게 겹치네요. 블로깅을 탁월하게 이미지화한 것 같아요. 렌즈이든 블로깅이든 그 응시의 대상과 그리움의 대상은 함께 겪고 나누고 부대꼈던 '사람들'이라는 것, 여전히 분주하게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과 표정의 순간을 붙잡는 일. 거기에 맺힌 상에서 자신의 기억을 되짚고, 잊혀진 사랑의 얼굴을 다시 발견하고, 그 그리운 얼굴들 속에 담겨진 이야기 속에서 어떤 참여와 연대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일. 아마도 이런 것이 내게는 블로깅이 던지는 질문이자 대답이었던 같아요.

    오래된 사진처럼 그 그리움에 대한 순간을 되새겨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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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2 15:48

      제가 탁월하게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제 사소한 단상을 주신부님께서 탁월하고, 풍성하게 해석해주신 것 같습니다. ^ ^

      주신부님께서 떠올리는 "그 그리움에 대한 순간들"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네요.
      비아메디아( http://viamedia.or.kr )에서 종종 그 순간들을 만날 수 있길 바라봅니다.

  4. 민노씨 2011/06/02 15:25

    * 본문 말미 사소한 추고/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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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촉촉핸드 2011/06/02 15:57

    이런 감상적인 느낌과 직관이 참 좋습니다.
    뭔가 뿌옇고 애매하고 전문성에 대한 강박증이 느껴지지 않아서...민노씨 블로그 글을 들어오게 되는 것 같아요.

    이멜로도 보냈지만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에콜로지카에 나오는 이 글이 블로그에 대한 좋은 설명이 아닐까 싶어서 인용해 봅니다.

    "심층에 있는 동기는 항상 전문가의 지배에 대항하여, 화폐적 수량화와 평가에 대항하여 ,또는 개인이 자율성을 발휘하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상품관계, 고객 ,의존이 차지하는 데에 대항하여 체험된 세계를 지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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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3 17:48

      매번 느끼지만 촉촉님 정말 책 열심히 읽으시네요. : )
      촉촉님께서 주신 댓글이 저에겐 참 큰 힘이 됩니다.

      추.
      인용해주신 <에콜로지카>... 어떤 책인지 참 궁금하네요.
      정환씨께서도 구입하셨다고 하던데, 저도 기회되면 꼭 읽어봐야겠네요.

  6. 베스트 2011/06/02 20:17

    운동과 현실의 괴리...
    명망가 중심의 사회운동...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좋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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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3 17:49

      오랜만에 댓글 남겼구먼! ㅎㅎ

  7. TwitLingua 2011/06/03 18:58

    http://docs.com/CGW9

    민노씨가 쓰신 글을 슬라이드로 볼 수 있게 만들어봤어요.

    어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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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4 04:46

      오, 이렇게 고마울 때가...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지만 솔직히 그 형식 자체에 별 다른 감흥은 크게 없었습니다...;;;
      노안이 오신 어머님 세대들께는 좋지 않을까 싶기도... ^ ^;;;

  8. 화분 2011/06/04 12:29

    민노씨 이쁘게 잘 살고 있네.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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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4 17:13

      오, 화분!
      화분은 잘 살고 있나?
      한국오면 바로 연락하삼!

  9. 민노씨 2011/06/04 17:14

    * 스모크 DVD 자켓 그림 보충.
    pulse라는 (아이폰) RSS 리더를 새로 써보고 있는데, 앞으론 1포스트 1짤방 원칙을 가급적 지켜보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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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민노씨 2011/06/05 00:42

    * 스모크 영화 스틸샷 보충
    : 하이 케이틀이 사진기 준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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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아거 2011/06/06 14:09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지적인 고민들을 견고한 성채와도 같이 쌓아올린다" 이렇게 적으시니 부끄러워지는데요, 사실 전 늘 허기지기에, 또 요즘 회자되는 말처럼 아직도 피가 끓기에 블로깅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민노씨야말로 견고한 사유의 성채를 쌓아올려 늘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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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6/08 18:57

      아, 아거님! : )
      HC 프로젝트에 제가 너무 소홀한 것 같아서 송구스런 마음입니다.
      매일 조금씩 작은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작은 나무를 키우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그런 마음만 쳇바퀴 돌 듯 반복되네요... ㅜ.ㅜ;
      정말 '노가다'하듯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더불어 지난 달 말에 아거님께서 남기신 트윗을 보고 뜨끔했는데 말이죠.
      "일을 잘 마무리 못하는 것은 의지력, 집중력의 문제도 있지만, 의지력도 결국 인지적,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 고갈에 기인하기에 에너지 관리가 필요. GTD를 위한 실천적 지침은 이른바 ritual을 만드는 것. 우선 잠자는 시간부터 잘 지켜보자!"
      http://twitter.com/gatorlog/status/73610178611781633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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