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성 : 선거 기간 중 국참당 포함한 친노 인사들이 써 붙인 “노무현처럼 일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어요. 이명박이 가진 폭압성을 폭로하는 데는 ‘놈현’이 유효하겠지만, 이제 관 장사는 그만둬야 해요. 국참당 실패는 관 장사밖에 안 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뛰어넘는 비전과 힘을 보여주지 못한 거예요.
- 한겨레 훅(HooK), DJ와 노무현의 유훈통치를 넘어서라 (원제 :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 중에서
종이신문 읽다가 견디기 힘들어서 로그인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안다. 김대통령과 노대통령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하라는 정도는.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더러운 그릇에 담으면 먹기 싫어지는 것처럼 아무리 속마음이 그렇지 않다 해도 말이 싸가지 없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진보적이라고 자평하는 정론지에 어떻게 싸구려 황색저널리즘스러운 말투를 그대로 드러내는가. 딴에는 지가 잘났고 촌철살인하는 말 생각났다고 씨부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남 비난하는 일이라는 건 쉬운 법이다. 제목만 보고 조중동 헤드라인 보는 줄 알았다."
- danya112, 위 글에 대한 댓글 중에서, (10/06/11 01:02)
0. 위에 인용한 댓글 의견에 대체로 공감한다. 취지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릇이 엉망이다.
1. 오만한 방담이다.
술자리에서 지인들끼리 정말 아무런 고민도, 긴장도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의 대화들인데, 거기에 무슨 대단한 정치적인 혜안이 담겨 있는 양 스스로 뻐시는 모습이 느껴져 좀 많이 난감하다. 특히나 말미의 자화자찬, "이빨의 '국대'들"이라는 그 쓰잘데기 없는 글은 가뜩이나 화난 독자들의 울화통에 기름을 붇는 느낌인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물론 다 잘난 양반들이라는 거 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2. 가상적 독자 혹은 가정적 독자
그 독자들과의 긴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글쓰는 자는 '가상/가정적 독자'에게 잡아 먹혀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그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모욕'을 안겨줄 필요도 전혀 없다. 더군다나 별 대단하지도 않은 '파격'을 통해 '한 건 했어' '우리가 이렇게 솔직하다우~!' 식으로 어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인터뷰어들과 편집자는 뭐랄까, 이게 정말 한겨레의 수준인건가, 한겨레의 대중적인 감각과 균형 감각인건가 싶어서 정말 진심으로 염려된다. 참 구리다.
더욱이 자신들을 먹여 살려주는 독자층을 대상으로 이렇게 엿 먹이면, 인터뷰에서도 등장한 표현처럼 "창조적 파괴"도 아닌 바에야, 무슨 악취미인지 모를 지경이다.
3. 누구나 '실수'는 한다.
인터뷰이인 천정배는 제외하고, 서해성(인터뷰어), 한홍구(인터뷰어), 고경태(편집자)가 한겨레를 대표하는 건 아닐테지만, 어느 정도는 상징성을 갖는다고 본다. '한겨레 빠이빠이'를 외치는 독자들의 심정이 이해된다. 하지만 이 글만으로 한겨레 전체를 평가하는 건 여전히 다소 과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또 그 실수를 통해 배운다. 솔직히 좀 심각한 실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 실수를 통해 배운다면, 다시한번 기회를 주는게 좋지 않을까 바라본다...
4. 솔직함이라는 딜레마
글을 쓰는 자아는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와 '자기 안에 있는 독자' 사이를 무수히 오간다. 그 독자는 이미 내면화되어 있는 '또 다른 자기'이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신에게 전적으로 솔직한 글이라는 건 나는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속이기 위한 기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결국 자아에게 '불안'과 '후회'를 안겨주는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이라는 의미다. 어떻게 써도 그 불안과 후회는 사라지지 않지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에 있는 독자와의 시이소오 게임, 그 지루하고, 때론 고통스러운 균형에 대한 억압이 결국은 그 불안과 후회에 대비하는 최선이 되곤 한다.
솔직하다는 건 누군가를 함부로 말하고, 먹물 잔뜩 든 자들이 무슨 신선한 파격이라도 되는 양 '시장통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솔직하다는 건 스스로에게 내면화된 '독자의 억압'과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 독자의 억압이 느슨해지는 순간, 우습게 느껴지는 순간, 그 솔직함은 '오만'으로 흔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대체로 역겹기 쉽다.
추.
1. 다시 한번 인터뷰를 읽어보니, 서해성은 아마도 그 "놈현"과 "관 장사"라는 표현이 풍자적이면서, 친근한 대중적 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단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아주 '자연적 해석'(화자의 취지를 최대한 헤아리는 해석)을 하면 그렇다는 거다. 다시 읽어봐도 인터뷰 수준은 무난하게 저질이다.
2.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제목을 바꿨다고 하더라. 이건 내가 정말 저질로 생각하는 건데... (블로그 수정원칙)
* 발아점
써머즈의 트위터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 이 기사 제목이 어느 신문사 사이트의 제목 같나요? 정답은 http://bit.ly/aPnUpE 참고로 지금은 별다른 메시지 없이 제목바꿨네요. 한겨레 배부른가봐요.
* 예고 포스팅
곽노현 당선자의 첫 번째 액션이 '공약철회'라니 아주 몹시 아쉽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입학 제한 철폐(현재는 중학교 내신 50% 이상만 지원자격이 있다더라)는 명백한 공약이었는데, 그걸 2014년까지 유예한다고 한다. 곽노현 당선에 진심으로 감격했던 지지자로서, 이번 선거의 최대 성과이자 희망이 서울시 교육감 곽노현이라고 생각하는 시민으로서, 곽노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지지한다면 이런 사안에 대해 침묵하기 보다는 더 더욱 혹독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왜 미리 이런 글을 쓰냐면... 그게 게으름이든, 곽노현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이든, 이런 저런 핑계로 글을 쓰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곽노현 개인이 좋아서 뽑은게 아니라, 곽노현의 철학과 정책을 신뢰해서 뽑은거다. 이 블로그를 가끔이라도 들러주시는 독자께 부탁드리는 바, 만약에 이 글 수일 안에 쓰지 않으면 나를 좀 욕해주시면 좋겠다.
TAG 가상적 독자,
가정적 독자,
감각,
고경태,
과장,
곽노현,
균형,
긴장,
노무현,
놈현,
대중적 감각,
대화,
독자,
말,
모욕,
서해성,
실수,
써머즈,
언어,
인터뷰,
저널리즘,
정서,
천정배,
파격,
편집,
한겨레,
한홍구
트랙백
트랙백 주소 :: http://minoci.net/trackback/1115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이것 가지고 이너넷 지인과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 말이죠... 선거 전후 유시민&국참당의 행보에 대해 뜨악함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도 이번 한겨레 기사는 정말 황당하더군요. 현실에 대한 파악 전혀 안 된 오만함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내용을 들여다보면 천정배씨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여주는 것(마치 술동무 같은 느낌?) 빼놓고는 별 자극이 되거나, 그렇군! 하게 되는 내용은 거의 없는데... 표현이 좀 과하게 자극적이고,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그 표현이 '내용'과 불가분이라면... 이런 감각은 도무지 이해할 길 없네요.
까도 까도 씹어도 씹어도 그렇게 해서라도 바른길로 계도해야 할 분은 우리 눈앞에 현역 군생활 찐하게 할 시간만큼 아직도 임기가 남아 있는데 그런 것에는 알아서 눈깔면서... 돌아가신분 아무리 말이 없고 직접적인 영향력이 없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찌끌여 지껄여 조롱 당해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빨의 '국대'들? 이빨의 양아'치'들이 적절할 듯 합니다.
그 '놈현' 정부에서 장관까지 하신 분도 그렇지 저런 찌질한 곳에 나가서 담대한척? 끌어안고 너스레를 떠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군요. 하긴 뭐 산사람은 살아야 할테고...창조적파괴? X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벽에 X칠 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창조적 파괴일지도...
그나저나 저런 글도 종이신문판에 나가나요? 온라인이야 뭐 그렇지만 종이신문을 구독하는 한겨레독자라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듯 합니다.
그러게요.
미디어가 고수해야 하는 관점(독자의 입장에선 기대적인 당파성과 태도)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할텐데, 이렇게 어설프게 까는 것도 아니고, 대팔님께서 적절히 표현했듯, 양아치스럽게 스스로를 과장하고, 자신 이외의 대상을 조소한다고 하면... 그런 조소와 스스로에 대한 우스꽝스런 자부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매너'와 '예절'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정도 알겠으나,
때론 예의없어야 할 때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잘 모르겠습니다.
관장사를 실제로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러 '관장사하는 놈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중
누가 더 나쁜 놈이겠습니까.
예전에 영화 똥파리를 저와 같이 보신 연세 지긋한 지인 한분께서
뭐 이리 영화에 욕이 많이 나오냐고, 참 격 떨어지는 영화라고 성을
내신 적이 있는 데, 참으로 그 짝 같군요. 폭력을 얘기하려면 폭력을
목소리로 불러야만 하지요.
전 예의와 매너와 독자들의 시선이니 하는 말들 자체가
불온을 억압하는 헛된 평온같아 보일 뿐입니다.
취지는 알겠습니다만, 저는 그 입장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매너"나 "예절"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 이 문제를 예의론으로 추락시키시는지 저로선 이해가 안됩니다.
물론 예의/관습적인 도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런 예의/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의 대화에 대한 태도/전인격적인 관점에 관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뻘스런 방담을 창조적인 의미에서의 "불온"으로 바라보는 그 시각도 저로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훅 아래 댓글에 님의 글을 누군가 옮겨 왔길래 와봤어요.
완전 공감합니다. 특히 별 씨덥지도 않은 내용을 마치 중2병걸린것처럼
허세 부리며 써놓은것. 서해성은 듣보잡이라 패스하고 한홍구 교수의
대담치곤 너무 허접하다고 할까. 딴지일보 총수가 낄낄 거리며
인터뷰 하는 형식은 빌어 왔는데 깊이는 훨씬 얕았어요.
전 이 일로 한겨레를 끊을일도 앞으로 평생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신문의 구독을 끊을 일은 없는 진보 나부랭이인데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과 좌절 실패등을 이런식으로 곱씹는게
소위 내일을 위한 진보세력에 뭔 도움이 되는지 의문입니다.
저열한 제목으로 시작했으면 내용이나마 튼실하면 모를까.
내용도 대충 휘갈긴듯한 내용이라 더 실망스러웠어요.
결국 그들도 놈현 관장사를 한 장사치들인가요.
그 제목으로 클릭수 유도좀 했나요 ㅎ
비판은 가능하되 예의를 지켜라는게 이렇게 어려운건지.
씁쓸하네요.
고은씨게 말씀하신 바에 아주 공감합니다. ㅡ.ㅡ;;
이 글의 문제가 그저 예의론에 속한 부분은 아니고, 저 개인적으론 고은씨께서 주신 취지처럼, '저널리즘의 품질'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대 이하죠... 솔직히.
정치쪽에 좀 멀다보니, 메모장에 메모를 하면서 인터뷰를 읽으니까 드디어 대충 이해가 되네요.. 그리고 이 글을 읽으니 완전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부분부분 새기고 싶은 부분이 있었어요. 자기라고 생각하는 이와 내면화된 독자와 무수히 오가는 과정 - 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억압' 부분이 좀 더 궁금해요... 내면화된 독자의 억압을 우습게 여기는 지점이 굉장히 위험한 부분인 것 같아요. 때로 제가 뱉는 말에서 오만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글을 읽으니 그 이유를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더 알게 될수록, 더 할 수 있게 될 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 같아요. 흠.
언젠가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해버리고 마는 것.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거든요. 그런 말이 터져나오는 때가, 조심하는 마음을 잃을 때가 아닌가 싶어요. 문득, 말을 해버리는 욕구가 배설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화장실이 은밀한 공간이듯.. 말을 뱉어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는 은밀한 장소에서 해결해야 하는게 아닐까.. 연결에 연결을 따라가다 댓글에서 길을 잃네요.. 좋은 밤 되세요 ^^
억압이라는 건... 간주관성이라는 대자적 매개에 작용하는 총체적인 권력과 욕망들의 간섭과 충돌, 그 화해라고 해야 할까... 혹은 그 작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야 할까... 저도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 그대로 자기라는 신체와 지적인 관성의 조합에 대한 입체적인 작용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이해될 듯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간주관성'(메를로-퐁티)이라는 개념인데요... 설명을 드린다고 드렸는데, 왠지 답변이 더 복잡해 보이네요...ㅜ.ㅡ;;;
늘 깊이있는 관심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제목 바꾼건 대박이군요.
종이 신문은 한번 찍어내고 배달되면 바꿀 수가 없고 그만큼 기사를 쓰는데 있어서 그만큼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온라인의 기사의 제목을 바꿨다는 것은, 온라인 신문은 종이 신문만큼 신중하지 않아도 되고 무게감도 떨어진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게요...
무엇보다도 그 제목 수정 부분이 가장 실망스럽더군요.
특히나 비판에 직면했다는 이유로 제목을 수정한다니...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트랙백을 걸으셨나 했더니...민노씨 님이시군여...^^ 반갑고 고맙습니다...
아, 근디 이렇게 멋진 집을 장만하여 살림을 하시다니...부럽습네다...
간혹, 한겨레 블로그 이웃들 마실 댕기다 님의 글을 보거나
이웃들 방명록에 남기신 초창기(?) 뜨거운 흔적들을 볼짝시면
그 열정과 정연함에 눈길이 가곤 했는데...^^
'직설'에 대한 '작살'...짧은 위의 의견 잘 봤습니다...^^
좀 무섭네요...살벌하기도 하구요...^^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우려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삶에서도 논쟁을 떠난 지 오래라 공허한 말과 語網만으로 블로깅하며
그저 개인의 기록에 주안을 두고 시간을 보냅니다.
외람되지만, 그렇다고 온 김에 그냥 가면 섭하실 것 같아
뚱딴지 같은 봉창 두들기는 기분으로 두 마디만 던지고 갑니다.^^
*비판을 할 때는 '느낌'으로 예단하거나 감상을 적어서는 혼란만 가중될 위험이 큽니다.
이미 표현된 언어는 그 '느낌'을 변명해주지 않으며, 당사자(상대)에게는 느낌이 아닌 팩트로 전달됩니다.
*단정적인 표현이나 호전적인 자세는 논쟁이나 논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인신 공격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특히 전지전능한, 위에서 조감하는 듯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할 수 있겠지요.
논쟁이나 비판의 통념상 궁극은 살인이 아니라 합의나 절충, 반영, 차이의 인식과 대안, 상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에게 전적으로 해당하는 얘기라기보다는 원론적인 얘기이고,
예전에 제가 스스로 아쉬워했던 점들이기도 합니다.
언어는 방대해지고 언변은 증대했지만
세상은 날로 투쟁 중인 것 같습니다.
앉아서만, 머리로만 논점이나 상대를 바라본 탓일 수도 있고
포지티브 싱킹보다는 네거티브 싱킹이 상존해서 그럴 수도 있고
만사만물에 대한 존중과 애정, 통찰이 생략된 채
승리나 우위 선점에만 경도된 탓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누구나 비난이나 비판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존중과 애정이 없다면,
모든 호사스러운 언사와 논변, 논리, 겸사, 달란트 따위는
상대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남기고
이는 다시 부메랑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게으른 탓에 자주 들르지는 못하겠지만
틈나는 대로 와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머리와 언어는 이미 오래 전에 극도로 경계하며 살아왔지만,
저는 요즘 몸에 대해서,
특히 자급자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죽기 전에 할 수 있을는지...ㅎ
반가웠습니다...
저도 무척 반갑습니다. :)
이제는 한겨레 블로그로 이름을 바꾼 '필진 네트워크'는 제 블로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죠. 여전히 '필벗'들과는 가족까지는 아니라도, 친척(ㅎㅎ)처럼 교류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뵙고요. 무달구름님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이렇게 먼저 진지한 말씀을 건네주시니 고맙기 짝이 없네요. 언제 뵙고 시원한 맥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주신 의견에 대해 제 나름으로 성실하게 답하자면요.
1. 제 글의 어느 부분, 어떤 측면에서 무섭고, 살벌하게 느껴지셨는지요? 제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내부에서의 공명은 그다지 차갑거나 살벌하지는 않은데, 때론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선 그렇게 느껴지시기도 하나 봅니다. 저로선 좀 야속한(?) 일이지만, 말의 목소리와 글의 목소린 서로 다를 수 밖에 없고, 글 쓰는 화자이자 동시에 글 읽는 독자로서의 제 감수성이 대중적인 감수성과는 좀 다른건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 '어망(語網)'이라는 표현이 재밌네요. :) 이런 표현은, 적어도 블로그에선, 처음 접하는 것 같습니다. '말 그물'이라니,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2. 이 글은 아주 거친 인상비평이 맞습니다.
제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글이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있는 호사가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술자리 농짓거리' 혹은 고상하게 표현해서 '인터뷰/대담'이라면, 그 텍스트를 정밀하게 분석하거나, 꼼꼼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은 솔직히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 텍스트 역시 꼼꼼하게 읽혀지기 위해 쓰여진 글은 아니고요.
편집자와 인터뷰어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직설'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글인데, 여기에 대해 꼼꼼한 분석적 해석을 가한다면 그것은 텍스트에 어울리는 방식의 수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도 나름으로는 그 인터뷰를 두 번이나 읽었고(물론 속독했습니다), 그것이 제 나름으로는 그 텍스트에 대한 제 최소한의 예의였습니다. 그렇게 그 텍스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제 소박한 '느낌'을 표현했는데요.
궁금한 것은 무달님께서 제 글을 읽으시면서 "예단"으로 느껴지는, 혹은 인식되는 부분이 있는 듯 한데요. 제 글 어떤 부분이 "예단"으로 파악되셨는지 알려주신다면 소중한 배움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2-1. "느낌"(혹은 '의견/주장')이 독자/청자에게 "팩트"로 전해진다는 말씀은 좀 갸우뚱하게 됩니다. 저는 제 블로그 독자들을 그렇게 분별없는 감정적 독자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의견/주장'과 '사실'을 구별할 정도의 분별력은 충분히 갖고 계신 분들일 것으로 넉넉하게 신뢰합니다. 이 지적은 무달님께서 다소 과한 염려를 주신 것이 아닌가 싶네요. ^ ^;
3. 이후에 말씀주신 부분, "단정적인 표현, 호전적인 자세... 위에서 조감하는 듯한 시각", 그 취지에 대해선 깊이 공감합니다. 제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오만한 태도를 아직 지우지 못했나 봅니다.
다만 이번 경우만을 놓고 보자면, 김현이 이야기했던, "싸워야 할 때와 안아야 할 때"를 구별하는 일이 대단히 어려운데, 무달님께선 이번 경우를 "안아야 할 때"로 판단하고 계시고, 저는 싸워야 할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야단을 맞아야 할 때'로 판단하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관점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다만 각자의 입장에서 싸우는 방식으로도 애정을 표현할 수 있고, 안아주는 방식으로도 애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겨레에 깊이 실망했습니다만, 여전히 무달님께서 쓰신 글에서 피력하신 것처럼, 한겨레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겨레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그 한겨레라는 존재에 필요 이상으로 의존하는 경향에 대한 회의적입니다.
한겨레는 우리 사회, 우리 현대사에서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 공공재적 자산이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디어 패러다임 교체기에 한겨레가 그 자신이 탄생한 시대적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진보라는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을 도리도 없고, 혹은 '한겨레'이기 때문에 한겨레 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저에겐 없습니다. 저는 한겨레가 한겨레일 수 있는 그 철학을 견지한다면 지지하겠지만, 그저 단순히 한겨레이기 때문에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한겨레에 대해선 실망한 바도 크기 때문에, 예전에 갖고 있었던 절대적인 신뢰는 이미 많이 흐려진 것이 사실이고요...
솔직하고, 깊이있는 논평에 대해선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저야말로 무달님으로부터 배움의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