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이 글 서두에 쓰려던 문장들입니다.

....
원용진씨께서 말씀하신 "대물숭배주의"라는 지적도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데 참으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 개인적으론 "닐 포스트만의 타계에 부쳐" 아거님께서 쓰셨던 문장들을 오랜만에 접하니 그 글을 읽었을 때 가졌던 격한 공감의 기억이 더불어 떠오릅니다... 미디어와 불가분인 현대사회의 모습, 특히나 대한민국의 그 도저한 욕망 시스템,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인 노예로 만드는 놀랄만큼 유혹적이고, 또 한편으론 식상할만큼 일상이 되어버린 욕망의 촉수들이 느껴질 때마다 그 묵시록적인 전망을 연상하곤 했었습니다...

아거님 글 읽고 [1984]를 다시 한번 펼쳐봤습니다. 한 구절이 특히 눈에 들어오더군요. (헉슬리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1984와 함께 읽으려고 했는데 말이죠. 몇 해 전 교보에 들러서 번역서 몇 개를 훑어 봤는데, 맘에 드는 번역본이 없더라고요. 왠지 안정효씨 번역본으로 사고 싶었는데, 마침 그 때는 안정효씨 번역본이 없었고요. 그렇게 미뤄 두고 있다가 이렇게 또 몇 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절대로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조지 오웰, 1984(1949년), 조회성 역, p.100, 민음사, 2003.

이제 경쟁사회에서 승리하는 과시적인 껍데기로서의 "대물숭배의식"만이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최고의 보편 의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서 매순간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감각들, 그 성취감들이 결국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쇠사슬이라는 걸 더 이상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심할 수도 없는 완전하게 달콤한 감옥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우울한 생각이 드네요.

언젠가 주낙현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
http://viamedia.or.kr/2008/05/08/213

한동안 저에게 깊숙이 머물렀던 문장들입니다. 그리고 요즘 다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문장이죠. 특히나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세상을,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욕망 가득한 곳, 그 욕망의 숙주인 몸에서 신성한 소망들이 피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먼 곳에 계신 아거님께 벗으로서 남기는 짧은 편지를 마칩니다...


* 발아점
아거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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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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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09/11/21 19:31

    * 제목 수정
    "물질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과 "대물숭배주의"
    -> 대물숭배주의와 "물질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

    perm. |  mod/del. |  reply.
  2. 아거 2009/11/22 14:51

    가까운 곳에 있었더라면 소주 한 잔 하며 "그 글을 읽었을 때 가졌던 격한 공감의 기억"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생각이 많은데, 머리가 아파 이만 잠자리에 들까 합니다. 여하간 제 ip 블록이 풀리니 이제 민노씨 블로그에 와서 댓글을 달 수 있어 좋군요. 진작 말씀드릴 것을 괜히 오랜 시간 낭비했나봅니다. (지금 생각하니 낮과 밤이 문제였던게 아니라, 내가 오피스에 갔을 때는 접속이 됐던 거군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11/23 10:24

      그러게요...
      그저 동네 수퍼앞 파라솔에서 캔맥주라도 마시며 이런 저런 말씀을 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춥겠네요. ^ ^)

      어제 오전에 아거님 댓글 읽은 직후에 우연히 리오타르의 짧은 글,'숭엄과 아방가르드'([포스트모던의 조건], 민음사 중)를 다시 읽었는데요(1984를 훑어본 직후죠).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자본주의 경제에는 숭엄한 면이 있다. (...) 그것은 어떤 자연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한한 부 혹은 무한한 힘이라고 하는 이데아에 의해 조절되는 경제다. 자본주의 경제는 이 이데아를 입증하기 위해 현실에서 추출한 표본을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는 테크놀러지를 통해 과학을, 특히 언어 과학을 자체내로 종속시킴으로써 현실을 점점 더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 오늘날 정보란 본질적으로 순간적인 것이다. 공유되는 순간, 정보가 더 이상 정보가 아니게 되는 순간, 그 정보가 당연한 환경으로서 주어진 것이 되는 순간, 즉 '모든 것이 다 말해진 순간, 우리는 '알게'된다. 정보는 기계적인 기억에 저장된다. 정보가 차지하는 시간의 길이는 말하자면, 찰나적이다. 두 개의 정보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혼동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정보와 정보관리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관심사 사이의 혼동, 즉 어떤 내용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이의 혼동이고, 새로운 것(the new)과 현재적인 것(the now)의 혼동이다."
      - 리오타르, 숭엄과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던의 조건. P.226~227.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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