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2009/05/18 22:26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미투데이에서 우연히 보게 된 대단히 매혹적인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거기에 일곱번째로 소개된 '파이트클럽' 때문이다. 거기엔 짧은 소개글이 있다. "2시간19분 짜리 성서" (inthegroove) 그 짧은 소개가 [폭력의 구조]라는 책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걸작 [폭력의 역사]도 당연히 연상됐지만... (로쟈의 칼럼인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양자의 유사성은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독자가 지적했듯이 너무 많은 책들이 인용되고 있어서.. 좀 망라적인 느낌이 강하다.) 

2. 박정희 시대 이후, 전라도 태생이라는 한국적인 낙인은 평론가 김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의 삶과 그 삶이 자리한 세계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비평가에게  그가 전라도 태생이든 아니든, 그의 고민이 '80년 5월 광주'에 닿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긴 하다. 다만 전라도 태생이라는 선택하지 않은 조건은 김현에게 더 큰 실존의 부채의식으로 자리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김현은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19)으로 르네 지라르를 분석한다. 그리고 "폭력은 어디까지 합리화될 수 있는가?"(19)라고 질문한다. 그렇게, 그래서 태어난 책이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다. (* 내가 읽은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단행본이 아니라 김현 전집 10권에 '시칠리아의 암소'와 함께 수록된 '폭력의 구조'다. 김현, 폭력의 구조 / 시칠리아의 암소. 김현전집 10. 1992, 문학과지성사. 이 글에서 괄호로 표시하는 부분은 이 책의 페이지수를 지시한다.)

3. 광주의 기억과 관련해서 특히 의미가 있는 부분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큰 부분들은 지라르의 [폭력과 성(聖)]('폭력과 성스러움'으로 출간), [속죄양]을 분석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그 해당 장들의 인상적인 구절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0. 초석적 폭력과 성(聖)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폭력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폭력을 오래 속이는 방법 외엔 딴 방법이 없다. 폭력을 속이는 폭력, 그것이 제의적 희생에 나타나는 폭력이다. 순수하고 합법적인 폭력과 분순하고 비합적인 폭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합법적 폭력의 초월성은 나쁜 폭력의 내재성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47)  

상호적 폭력에서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으로의 이행이 바로 모든 문화의 기원이다. 그것은 희생적 위기에 일어난다.(48, 49)

지라르의 모방이론은 인간 사이에 원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같음에서 연유하는 혼란과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의 방법은 이미 아는 방법을 다시 사용하는 것 뿐이다. 이 기제에서 나온 문화의 두 모순된 명제는 ㄱ. 위기의 몸짓을 다시 해서는 안된다. ㄴ. 위기에 끝장을 내준 신비로운 사건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근절과 근절의 모방이 문화의 두 축이다. (49)

지라르의 가설은 사회 계약에 의해 사회가 생겨났다는 주장이 환상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폭력을 감추고 있으며 모방적 위기가 인간 사회를 짓누르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49)

문화는 금기와 제의라는 짝패에서 솟아나온다. (50)  

11. 지라르의 외디푸스 해석
지라르가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왕]와 [콜로누스의 외디푸스왕]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신화와 다르게 그리스 비극이 폭력의 해로움/이로운이라는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희생양이라는 주제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51)

희생양은 상호적 폭력에서 공동체적 평화로의 이행을 상징하는게 아니라 그 이행을 확실하게 하고, 이행 그것 자체가 된다. 외디푸스는 이제 평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51)

지라르의 독특한 외디푸스 해석은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온 요나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을 낳는다. 지라르는 요나 1장 4절부터 7절까지를 인용한 뒤에, "배는 공동체를 표상하며, 태풍은 희생적 위기를 표상한다. 바다에 던진 물건은, 차이를 잃은 문화적 질서이다. 저마다 자신의 신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분명 종교적인 것의 갈등적 붕괴이다. 조난선의 주제에 회개치 않으면, 멸망될 수밖에 없는 니느웨의 주제가 덧붙여져야 할 텐데,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위기이다."(지라르) 그의 요나 해석은, 누가 희생양으로 뽑히느냐는 문제가 거기에 내재하고 있음을 밝히는 데서 그 형안을 드러낸다. 그것은 제비뽑기라는 우연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연이 아니라 신이 만들어내는 우연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연의 주제는 신의 개입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원시사회에서는 약간 다르다. 우연은 성스러운 것의 성격을 다 갖고 있다. 때로 그것은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하고 때로 시혜를 베풀기도 한다. 제비뽑기에 의해 희생물이 결정되고, 그가 바다로 던져지자 조난은 극복된다. 요나서 1장 8절에서 16절까지는 희생양에 의해 새 평가가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52)

13. 기본적 인류학의 기본구조
[낭만적 거짓]이 나온 지(1961) 17년 만에 나온,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온 것]은 [....] (57) 

하퍼(Ralph Harpper)는 지라르의 소론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요약하고 있다.
ⅰ) 인간이 대면해야 하는 중심 문제는 폭력이다.
ⅱ) 폭력은 어떤 사람을 모방하려는 경쟁 상태에서 생겨난다.
ⅲ) 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이, 모방 욕망처럼 끝이 없다는 것을 보아왔다.
ⅳ) 희생양이 발견되어 바쳐지면 폭력은 일시적으로 끝이 난다.
ⅴ) 이 희생양이 성화된다.
ⅵ) 그것이 종교적 제의의 시작이다.
ⅶ) 재판은 그것의 연장이다. 폭력만이 폭력에 끝장을 낼 수 있다. (57)

비극 분석에 주로 관심을 쏟았던 지라르는, 성서가 다른 신화, 중세의 처형서들과 다른 성서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직관한다. 그는 그리스도만이 폭력의 구조에서 벗어난 유일한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유태, 기독교적 저술이 신화가 감추고 잇는 초석적 폭력을 드러내 해체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성서의 신화들은 다른 신화들과 다르게 "희생물이 무죄이며, 살인에 기반을 둔 문화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인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그것이 원래의 폭력의 질서 유지적, 희생적 덕성이 없어지면, 그 사회를 파괴하기에 이른다"(지라르)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신화들이다. (58)

지라르에 의하면, 욕망을 해방시키고, 금기를 없애면 "욕망의 유토피아"가 온다고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이다. "사람들이 욕망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택하면 택할수록, 사실 그들은 경쟁 사회의 완성을 독촉하는 셈이다."(지라르) 욕망의 유토피아를 서로 실현하기 위해, 서로의 욕망을 해방시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문화적 위기, 무차별 현상이 가속화된다.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해방적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공격하여 없애려는 사항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따름이다. 그가 들고 있는 희생양은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아버지, 법 등이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부르조아, 자본가 들이며, 니체의 노예의 도덕, 타자들의 원한 ....등이다.(61)

지라르는 위의 언급에서 현대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이 해방적 이데올로기임을 명백히 알고 있다.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억누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억누르는 것, 금기를 지라르는 그들 이론의 속죄양이라 부르고, 그것의 해방이 욕망의 유토피아를 부르기는커녕 그것의 갈등을 더욱 초래할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 해방적 이데올로기, 혹은 탈신비화는 금기를 제거하여 사람들을 차별없게 만들어 희생 제의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 것이다.(61)

금기가 없어지면, 사회 건설적 폭력이 그 긍정적 힘을 잃고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이 지라르의 가장 중요한 전언 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 근거를 유태, 기독교적 저술에서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반현대주의자이다.(62)  

15. 속죄양의 의미
[속죄양]에서, 지라르는 박해에 대한 인류학적 텍스트에는 희생자가 속죄양이라는 것을 말 안 하는, 오히려 감추는 텍스트(신화적 텍스트)와 그것을 말하는 텍스트(성서)의 둘이 있음을 지적한다.(66)

지라르에 의하면, 신화는 이처럼 박해 현상을 신비화시켜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야기이다. 폭력의 재현을 없애려는 의지가 신화의 진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지우기의 첫번째 단계는, 아즈테크 신화의 예에서 보듯 집단적 폭력이 지워지고, 개인적 폭력이 그것을 대치하는 단계이다. 두번째 단계는 그 개인적 폭력까지 지워버리려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러하다. 모든 형태의 폭력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대부분의 경우는 모르고 그러는 것이지만, 집단적 살인의 흔적 지우기, 지라르가 데리다의 표현을 살그머니 도용하고 있는 것을 빌면, 흔적의 흔적 지우기라는 목표만이 남게 된다. (69)

[속죄양]에서의 지라르의 결론은 "이제 서로서로 용서할 때가 왔다. 아직도 기다린다면 시간이 없다"(지라르)라는 절박한 권유이다. 지금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파멸이 온다는 지라르의 경고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경고이지만, 그것의 처방이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은 해답을 위한 해답이다. 인간은 모방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라는 말을 남에게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70)

16. 성서적 텍스트의 중요성
예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희생물이며, 그의 온갖 행동은 비폭력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시말해 비창건적, 비초석적이다. 그의 수난에는 박해자들이 그를 희생양이 아닌 죄인이라고 믿게 만들 요소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박해받음의 완전한 무죄성은 박해 체계, 초석적 폭력을 완전히 뒤집어 보여준다. 복음서의 진정한 독창성은, 완전한 예수의 무죄성을 통해 박해체계의 폭력성을 탈신비화시킨 데 있다. 그도 다른 희생자처럼 죽지만, 그는 신비화되지 않는다. 그는 드러내고 죽는다. 예수의 죽음으로 희생제의적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된다. 문화가 희생 기제 위에 세워져 있다면, 그 기제는 그것의 기능이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기능하는데, 그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되니까, 수난에 의해 예수의 지상 왕국은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서구 문화는 그 예수의 수난을 왜곡하여 세운 문화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서구 문화는, 모든 문화의 허구성을 탈신비화시키는 탈구조적 문화이며 동시에, 그 전언에 기초하여 희생 제의를 만들어낸 구조적, 신비화 문화이다. 우선, 기독교는 자기의 박해를 정당화시키는 박해자들의 신화를 벗겨내는 텍스트에 의지해 있다. 그 탈신비화의 능력은 기독교의 독창적 능력이다. (71, 72)

그러나 그 탈신비화의 기독교는 또한 신비화의 기독교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드는 순간, 기독교는 신화가 되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 된다. 기독교 서구 문화가 제국주의적 박해 문화일 수 있는 것은 예수 수난을 제의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성서를 제의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비제의적 텍스트이다.(72)

17. 될 뻔한 속죄양 : 욥
예수의 수난을 통해 욥의 불평은 그대로 이해될 수 있게 된다. 그 욥이 불평한다. :

나의 생애는 끝났고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실날같은 희망마저 끊기었네
밤은 낮으로 바뀌고
빛이 어둠을 밀어낸다지만,
저승에 집터를 마련하고
어둠 속에 자리를 까는 일밖에
나 무엇을 바라겠는가? (욥기 [17: 11~13])

욥의 그 불평을 이해하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난다. 예수가 그때 나타난다. "욥은 박해자의 신에 대한 싸움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예고한다. 자기를 둘러싼 희생양 만들기 현상을 드러낼 때 [....] 그가 폭력과 성스러운 것의 논리를 벗어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예고한다."(지라르) 욥은 옛사람들이 꾸준히 걸어가던 속죄양 만들기, 집단 살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탄식은 오늘에도 여기저기서, 특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모든 나라에서 울려나온다. (74, 75)

3-1. 그리고 '지라르 비판'과 '지라르를 넘어서서'라는 장으로 분류된 부분들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이다. 특히 지라르 비판과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장은 위에서 비교적 상세히 인용한 "13.근본적 인류학의 기본구조"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김현은 우상파괴자들(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지라르를 분석한다. 창건적 폭력과 속죄양과 금기의 효용에 대해 설파하는 지라르의 입장에서 그 위계와 차이를 무화시키며 모든 욕망들의 금기를 파괴하는 회의의 대가들(니,프,마)은 "금기가 없어지면, 사회 건설적 폭력이 그 긍정적인 힘을 읽고 부정적으로 작용"(62)하도록 만드는 위험한 사상가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라르 이론이 가질 수 있는 위험(정치적 보수주의)을 비판하는 부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특히 '14. 지라르 비판 2'에서 앙리 메쇼니크를 빌려와 지라르 이론이 가질 수 있는 파시스트적 사유 양태를 비판하는 부분은 음미할만 하다. 이 비판은 지라르의 종교인류학이 정치적인 욕망의 위장된 체계(비합법적인 폭력의 기만 요소)로 기능할 수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한 비판이면서, 지라르의 엄숙주의와 보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인용하면 이렇다.

"파시즘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라르에게 있어서도, 질서는 폭력, 단순주의, 사회 질서 합법화, 반-비판에 결부되어 있다. 이 사유에 대한 증오는 역사적으로 카톨릭 신화에서 지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이다. 기원숭배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멸시를 품고 있다. 신의 편에 서기 대문에 이 사유는 개인에게 적대적이며 그 누구든 멸시한다."(메쇼니크) 그의 사유 양태는 파시스트적이기 때문에, "그의 담론은 과학의 담론이 아니라, 신화의 담론이다. 신화의 담론이란 의미를 전체성, 통일성, 진리와 동일시하며, 그것으로 자기의 의미, 유일한 의미를 만드는 담론이다. 그외의 것은 혼돈일 따름이다"(메쇼니크) 모든 것을 진실한 하나로 귀착시키는 "그의 담론은 [...] 모든 것을 하나로 귀착시키기 때문에 그의 담론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 [....] 그의 담론은 합리적 이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질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다"(메쇼니크) (63)

4. 김현은 내 사유의 전범들 가운데 하나다. 김현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사유가 언어로 풀려지는 그 주형의 윤곽들을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김현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불만스러운,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책들 가운데 하나가 김현 전집 10권에 수록된 [폭력의 구조 혹은 르네 지라르]와 [시칠리아의 암소 : 미셸 푸코 연구]다. 이 비평서들은 너무 분절적이고, 파편적인 서술체계를 취하고 있어서, 물론 그렇게 파편화된 사유의 조각들을 통해 유연하고 입체적으로 지라르와 푸코를 다시 종합하려는 그 새로운 시도야 인정한다고 해도, 지라르와 푸코의 사유체계를 자신의 관점으로 최소한이나마 소화하지 못한 독자들(나같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독서를 요구한다. 개인적으론 푸코에 대해서 보다 지라르에 대해서 특히 더 그렇다. 그건 개인적인 체험치가 푸코 쪽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하게 푸코를 이야기하는 김현보다 지라르를 이야기하는 김현이 좀더 명료하고, 좀더 평이하게 느껴지긴 한다.

지라르를 통해 "1980년초 폭력의 의미"를 숙고하는 김현의 고민은 좀더 명료한 언어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좀더 현실과 부딪히는 치열함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불문학자로서의 학구적 성찰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 짙다. 그 사정을 미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된 해의 상징성(1987년)을 고려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지라르를 통해 이야기되어야 하는 건  80년 5월 광주인데, 그 광주는 그림자로만 머물러 있다.

5. 1980년 5월 광주에서 "폭도"로 불린 사람들은 마치 지라르의 예수처럼 자신들의 무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희생양들이다. 혹은 욥처럼 "속죄양 만들기, 집단 살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 의미있는, 지워져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희생은 사회 건설적인 폭력, 혹은 창건적인 폭력의 결과는 전혀 아니다. 그 희생들은 비합법적 폭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유린된 야만성의 상징들일 뿐이었다. 그 비합법적 폭력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화적인 담론 기제들에 의해 지워지고, 위장되며,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희미해져 간다. 점점 더 욕망과 죽음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서로 투쟁하며, 마치 그 둘이 한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는 걸 모른척 한다.

다시 돌아온 5.18에 김현의 '폭력의 구조'를 우연히도 다시 읽는다. 예수라는 희생양이 그 폭력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도 이 땅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폭력 기제들의 추악함을, 욕망과 모방의 내재된 폭력성이 가해자들의 질서 위에서 위장되어 가는 그 야만성의 기제들을 폭로한다. 이제 합법으로 위장된 폭력의 구조는 죽음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 구조 속에서 우리들은 항상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며, 그 모든 폭력의 구조적 얼개들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 위장과 기만의 동력, 우리 시대의 신화는 배타적이며 경쟁적인 욕망과 그 유혹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욕망들과 결합한 무수히 많은 매개들, 우리들의 사랑스런 미디어들은 날마다 새로운 욕망의 변주를 들려준다. 우리는 기꺼이 거기에 뛰어들어 삶을 죽음과 맞바꾼다. 이제 우리 시대의 폭력은 보이지 않는 구조다. 우리들은 그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매일 매일 투명한 죽음들을 만들어낸다.


* 관련
조선일보, 80년 5월


* 발아점
"2시간19분 짜리 성서" (inthegroove)


* 확장점
5.18 상념 (비아메디아, 2009. 5. 22) 
이 글에 남겨진 주낙현 신부의 논평을 정리한 글.
인식과 고민의 깊이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졸문에 너무도 과분한 논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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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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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09/05/18 23:33

    * 제목 수정.

    perm. |  mod/del. |  reply.
  2. 비아메디아 2009/05/19 16:04

    다시 옛 독서, 그러나 부족한 독서를 되새겨 주고, 무엇보다도 5.18에 대한 겹치는 상념들을 돌이켜주는 글입니다. 지라르는 그렇다고 쳐도, 왜 김현에게 광주는 "그림자로만 머물러"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광주 자체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왜 르네 지라르라는 생소한 - 물론 대가의 통찰력을 가진 - 인물의 매우 파격적인 이론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했을까? 외국의 이론을 우리의 경험에 대비해 봄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이를 우리 삶에 대한 분석에 적용함으로서(문학 비평이든, 문화 비평이든) 우리 생각의 방법과 지평을 넓히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것이었을까? 여전히 어떤 이론은 저마다 그 발생학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데, 그 이론을 그 맥락에서 동떨어진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적용하는게 그리 적절한 것일까? 하더라도 그 비판적인 거리두기의 지점은 어디일까? 그런 점에서 김현 혹은 나 같이 외국에서 공부하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서구가 마련한 경험과 이론의 정치함에 눌려, 근본적으로는 보편주의를 전제하는 일에 쉽사리 빠지지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까지 잡다하게 닿았습니다. 논리적인 것은 아니고요.

    그러다 다시 지라르를 조금 들춰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폭력에 대한 통찰을 신화 분석이나 그 밖의 인류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분석(이 아니고 그 전제를 무차별하게 적용한다는 비판이 있지만)을 통해서 길어올리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거니와, 욕망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게 자리잡은 이 폭력과 은폐의 구조를 까발기는 폭로의 전략으로서 매우 소중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지금까지 몰랐던 걸 이제 내가 알려주마'하는 그의 단정적인 태도에 내 마음이 흐트러진 탓인지 몰라도, 어떤 전제된 구조에 모든 것을 끼워맞추려는 인상이 들어요. 그가 늘 '시원' '창건적'이라는 수사로 어떤 천형처럼 박힌 어떤 폭력의 원형을 말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그 자신 천주교 신자로서 그 무의식에 내재한 어떤 원죄 신학이 비치는 듯 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가 보기에 유일하게 혁명적인 "예수의 사건"이 다시 속절없이 그가 말하는 폭력의 구조에 포섭되는 이유가 뭔지도 그저 환원론적으로 말할 뿐이고. 그러니 뭔가 빠진게 있다,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결이 겹쳐서 전개되는 살아있는 이야기라는 것이에요.

    나 같은 성서학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원형적인 시원을 밝혀주는 신화이기 이전에, 출애굽(Exodus)라는 사건의 경험에 기반하여 세계와 우주에 대한 해석학으로 마련된 결과물이거든요. 출애굽기의 이야기가 그 이전의 창세 신화와 이후의 역사 해석의 원리가 되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해석학 혹은 해석과 분석의 근거가 되는 경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늘 반복되어 기억되는 "떠돌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다고 해방된 사건의 경험"이겠지요. 이것은 어떤 원형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풍요로운,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떠돌이의 경험, 박해받았던 노예의 경험, 그리고 여기서 해방된 경험이었단 생각에 이르러요. 분석의 과잉이 풍성한 이야기의 기억을 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5.18 을 다시 돌아봅니다. 질문은 민노씨의 말마따나 "이제 합법으로 위장된 폭력의 구조는 죽음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속수무책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5.18"은 숫자 그 자체로서 큰 울림과 떨림이 있었어요. 그 숫자로서만도 떠올려지는 화면들(우리는 나중에 질낮은 비디오로 숨어서 봐야 했으니까), 풍문들(우리는 몰래 귀속말로 전해들어야 했으니까)이, 그리고 거기서 나온 참을 수 없는 분노들(진보 논리 이전에 우리는 눈물을 훔치고 옷을 찢고 일어섰으니까)이 우리의 살갗과 눈물에 범벅이 되어 이야기로 남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 사실 5.18을 '사태'로 부르든,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든, '민중 항쟁'이라 부르든,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던거죠. 5.18이라는 숫자로서 우리에게는 5.18 의,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와 생생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지요.

    한동안 "5.18"은 출애굽 사건처럼 우리 삶과 사회의 변혁에 대한 해석의 토대로서 작용했고,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최소한 지난 25년여 동안 "5.18"은 이런 점에서 가장 극악한 폭력에 대한 폭로요, 진보적 운동의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되는 그 경험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재생산되는 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5.18을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았나, 우리는 자기 입맛에 따라 늘 멋대로 요리하고 치장하는데 써먹긴 했어도, 그 의미는 과잉되어 넘치는 대신에, 아직 펼쳐지지 않았던 그 속의 이야기들은 묻혀지고 잊혀지지 않았나, 그 사이에 망각의 시간에 몸을 던져서, 그 화면과 풍문과 분노로 몸에 새겨졌던 이야기들은 하나씩 잊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지요. 기억되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기억될 지를 마련하지도, 아니 우리 스스로 그렇게 기억하지 않고, 점점 늙어가는 피부에 우리의 감수성을 내버려두고 둔감해지지는 않았는지 하는 상념에 이르러요.

    어찌보면 무엇보다도 그 살에 새겨진 이야기들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선후 관계는 얽혀있을 것이나, 폭로의 전략 효율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수성이 무디어져 그 폭로가 식상해진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분석과 전략 속에서 우리는 대상을 늘 밖에 두다 보니,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거나, 쉽게 면책하고 맙니다. 폭로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니 결국 "매일 매일 투명한 죽음을 만들어" 내는 일에 공조하는 셈이기도 하고, 폭력을 까발기기는 커녕, 여전히 스스로 폭력 은폐의 주체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5.18 과 민노씨 글 탓에 아주 잡스런 생각이 "창조적인 오해"에 기대어 부조리하게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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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20 03:24

      서두에 잡다하신 생각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깊이 깊이 공감하는 편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세속적 비평'을 강조한 이유, 조혜정이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에서 강조한 바는 주신부님께서 아쉬워하신 바로 그 부분, 그런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발생학적인 맥락"이라고 지적하신 부분에 통감하는데요. 김현은 [폭력의 구조]에서 우리나라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들과 제주도 개벽 신화를 분석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적극적인 정치적 실존을 투사해서 읽혀지지는 않더랍니다. 그저 한 사례로만 읽혀질 뿐이죠.

      주신부님께서 여기에 담아주신 논평은 그저 여기에 남기기에는 너무도 큰 아쉬움이네요... 그 문장 하나 하나에 배어 있는 인식과 고민들에 거듭 거듭 제 부족한 각주를 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제 글 본문에 보충하겠습니다만, 주신부님게서도 '비아메디아' 블로그에 담아주시면 주신부님 독자들께 인식의 장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듭 거듭 고마운 마음을 전할 뿐입니다.

  3. 민노씨 2009/05/20 03:44

    * 본문 오타 수정.
    * 비아메디아 논평 본문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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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상식맨 2009/10/10 10:12

    탈북자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를 읽어 보시면 5.18의 실체에 대해서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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