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기도가 되는 곳... via media

2008/08/27 18:52
거기다 적은 글들로 심기가 불편한 분들이 뒷담화하거나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통에 마음이 산란했다. 이런 일로 마음에 파장이 이는 건 분명 내 그릇이 작은 탓이요, 마음이 깊지 않은 탓이겠다.

수련과 내공이 깊지 못해서 얻은 상처라 해도, 우선 싸매고 치료하고 봐야 한다. 자칫 만신창이가 되면 남겨둔 수련의 일정을 소화할 틈도 없이 불구가 되어 하산해야 한다. 예전엔, 죽도록 싸워봐야 하리, 했는데, 돌아보니 객기였을 성 싶다. 우선 싸매고 보살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움츠리는 건 자연스런 보호 본능이다.  [....]

게시판에서 그야말로 장난질하는 사람이나 뒷담화하는 분들은 극히 적은 한 두 사람에 불과하고, 사실 또다른 배려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화살에 맞는 사람은 그 충격을 감당하고 그 상처를 싸매느라, 혹은 그것이 나중에 덧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이 참에, 사서 고생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까?

- 주낙현, 집으로 돌아오는 길 1. 중에서.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포용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일이나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관용이라고 한다면, 이는 포용과 관용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톨레랑스는 톨레랑스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불용(앵-톨레랑스)을 포함하는 것인데.”

- 집으로 돌아오는 길 2. 중에서


블로깅하다 마음 지치면, 가서 위안만 찾고...
또 그렇게 염치 없이 잊고 지내다, 또 마음 어지러우면, 다시 그렇게 찾는...
그런 곳이 있다.

'via media :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오늘도 오랜만에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우연처럼 거기에 내 마음이 있더라.
내 쓸쓸한 마음 거기에 있고, 그 마음 풀어놓고, 그렇게 스스로 바라보고, 응시하는 글이 있더라.

나 역시 세상을 참 쉽게도 경멸하지만, 세상은 참 신기해서, 그 경멸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성찰들을 만나게 해준다. 그런 성찰을 만나면 마치 그 우연이 나에게만 있는 축복처럼 새삼 신비롭게 느껴지는 거다.  나는 빨강머리 앤을 너무 좋아하는데, 앤이 그랬다. "세상을 경멸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언젠가도 어떤 글에선가 인용한 문구지만, 앤의 바람처럼, 세상을 경멸하기 위해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좋아하는 한 형님이 있다. 그 형님은 소위 386인데, 첫 입학한 의대에서 제적당하고, 다시 역사학과에 들어가서 운동하다 구속되고, 최근까지는 대리운전을 하시다가, 지금은 답사를 하시면서 책을 쓰신다. 그 형님은 일제시대가 다시 와도 나는 이제 운동 안한다, 이런 회한이 담긴 말씀도 언젠가 하셨는데, 그 형님을 생각하면 나에게 들려준 이런 말이 떠오른다.

"너는 미제를 좋아하는 사대주의자다. 그래도 아는 것만 말해서 좋고, 소박해서 좋아."

나는 미사대주의자란 소리는 태어나서 그 형님에게 처음 들었다.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어느 정도는 나에게 머문 것들에 대해 내가 이야기한다고 말씀해주셔서 나는 참 기분이 좋았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다.

역시나 같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수다장이고, '고독도 가나와 함께라면 감미롭다'류의 유치한 CF 카피의 세계, 그 감수성의 바닥에서 한치도 올라올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그렇다...

얘기가 옆으로 샌 것 같기는 하지만, 주낙현 신부님의 글들은 그 형님을 떠올리면 느껴지는 그 말의 풍경들처럼 나에게는 항상 따뜻하고, 포근한 어떤 공간이고, 시간이다. 거기엔 마치 내가 가끔씩 "태어나길 참 잘 했어..." 이렇게 느끼는 봄밤, 불켜진 초저녁의 감미롭고, 따뜻한 바람이 낮게 불고 있는 것 같다.

주낙현 신부님의 글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또 견뎌야 하는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자는, 기꺼이 즐겁게 고민하자는 메시지를 그 안에 담고 있다. 그건 글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기도다. 나는 성당에 나간지도 한참이고, 영세도 뭣모르고 어릴 적에 날림으로 받았지만... 주낙현 신부님의 기도는 종교적인 신념을 떠나 언제나 깊은 감동과 위로를 나에게 준다.

주낙현 신부님 글에서 다시 우연한 선물처럼 깊은 위안을 얻어서...
그 고마움을 적어봤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 발아점
주낙현, 집으로 돌아오는 길 1.
집으로 돌아오는 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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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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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니돌 2008/08/27 20:46

    민노씨 덕분에 RSS 리더의 배를 불릴 수 있게 되었네요. :)
    이런 글을 써야 하는데,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래저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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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8/29 17:37

      별말씀을요.
      겸손이 과하십니다.
      레이니돌님 글 참 매력적입니다. : )

  2. 2008/08/28 09:29

    저도 어제 그 글 읽고 마음이 짠~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을 겪게 될 때가 있는데 성직자이시지만 모든 걸 포용한다 식이 아니라 솔직한 마음도 드러내 보이셔서 더 위로가 되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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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8/29 17:44

      펄님 말씀처럼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가 갖는 감동이 그저 성직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물론 그 마음도 고결하기는 하겠지만요..)이 주는 감동과는 다른 좀더 인간적인 공감을 이끌어주는 것 같습니다...

  3. 손윤 2008/08/31 04:36

    개인적으로도 "너는 미제를 좋아하는 사대주의자다."와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동병상련 비슷한 감정을 느껴봅니다(왜 이런 말들을 들었는지, 듣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지만). 요즘 rss로만 읽고 흔적을 남기는데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모두의 주낙현 신부의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포용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일이나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관용이라고 한다면, 이는 포용과 관용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톨레랑스는 톨레랑스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불용(앵-톨레랑스)을 포함하는 것인데.”라는 말을 다시 보기 위해서 들어왔다가, 흔적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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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9/01 17:41

      손윤님 정말 오랜만에 댓글창에서 뵙네요.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 )

      추.
      항상 말로만 끝났던...
      이번엔 정말 조만간 맥주라도 시원하게 한잔... ㅡ.ㅡ;;

  4. 히치하이커 2008/09/01 21:14

    덕분에 좋은 곳을 알았사옵니다. : )

    그러고 보니 저도 미제 참 좋아하는구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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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9/01 23:14

      고마운 댓글이로군요. : )
      감솨~!

      추.
      저는 미제 별로 안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아, 미제 영화(드라마)와 미제 음악은 좀 좋아하긴 합니다. ㅡ.ㅡ;

  5. 비밀방문자 2008/09/0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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