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오 포와 911: 매트릭스와 인간조건

2008/03/24 17:03
부제 : 다리오 포와 정치경제학적 상상력


0. 지난 주말 일등신문의 짧은 서평을 읽다가 눈길이 가는 문장을 만났다.

"투기꾼들은 매년 수천만 명이 가난으로 죽는 경제에서 뒹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뉴욕에서 2만 명이 죽은 게 무슨 대수인가? 누가 그 학살을 수행했는지 간에 이 폭력 행위는 굶주림과 폭력과 비인간적인 착취 문화의 정당한 소산"
- 다리오 포 (이탈리아, 199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출처 : 미국이 미운 이유. 김성현 기자)

이 대한민국 일등신문이 잘하는 게 있다. 엉터리 번역, 악의적인 번역이다. 외신을 소개해도 그 피인용 문장이 원래 위치했던 바의 문맥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인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객관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독한 엉터리 당파성으로 '창조적 번역'과 기사 배치(나는 저널미장센이라고 부르는)를 곧잘 행하는 신문이다. 그래서, 물론 이런 짧은 서평에 무슨 대단한 의도씩이야 있었겠어, 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위 '다리오 포'가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가, 영어난독증에도 불구하고, 일단 궁금했다. 별로 길지도 않은 문장이니까, 뭐, 한번 찾아보기로 한거다.


1.
다리오 포(Dario Fo)와 '911'로 구글링하니까 바로 첫 번째 링크로 위 번역문의 원래 문장(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영어번역의 재번역했을 수도 있겠다. 이탈리아어로 말하거나, 혹은 썼을 것 같기도 해서)을 알려준다.

The great speculators wallow in an economy that every year kills tens of millions of people with poverty so what is 20,000 dead in New York? Regardless of who carried out the massacre, this violence is the legitimate daughter of the culture of violence, hunger and inhumane exploitation.
- Dario Fo (1997 Prize for Literature) in an email newsletter.("Idiocy Watch #8" (The New Republic, 2001/10/29))

'the legitimate daughter' 를 '정당한 소산'이라고 번역한 것이 좀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그 번역을 탓할 수야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관용어구로로 널리(?) 쓰이는 표현 같은데, 논리적인 귀결, 정도로 '순화'시켜서, 덜 감정적으로 썼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2.
아무튼 각설하고, 지금까지 만난 911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 가운데 개인적으론 가장 인상적인 논평이다.
물론 911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아무런 의미도 아니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혹은 위 일등신문 기자의 짧은 서평에 인용된 의도처럼 반미국정서의 발현이라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911의 희생들은 마땅히 기억되어야 하고, 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증오의 '다른 한편'으로서 알 카에다는 비판받아 마땅할테다.


3.
하지만 다리오 포의 짧은 논평은 정말 문제를 근원에서 질문하고 있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든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체로 비가시적이다.


4.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른다.
매트릭스가 정말 중요한 영화인 이유는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원형적 풍경을 놀랄만한 영화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일테다. 영화 '매트릭스'의 구도는 '인간 vs. 기계'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의 매트릭스 구조는 '인간 vs. 정치경제적 욕망의 구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정치경제적인 욕망은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의 이면에서 현실을 조정하는 '담론들'이다. 이 제도와 관습과 의식, 욕망 유통의 구조가 가장 본질적으로 우리들을 지배하는 일차적인 틀이 된다. 물론 이걸 조정하는 세력은 경제권력, 정치권력, 담론권력, 그리고 이들의 유기적인 공모와 이를 통해서 구조화된 그 유형 무형의 카르텔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현실세계가 정말 현실세계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자신이 '정말 살아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단 한번도 실존적으로 고민하지 않은 정치경제적 욕망의 '명령'에 의해, 그 '필요'에 의해 사육되고 있거나, 혹은, 놀랍게도, 그렇게 사육되기를 원한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엔터테인턴트 산업, 특히 광고산업이 지배하는 지상파와 케이블, 거대신문들의 질투와 비교에 기반한 콘텐츠 생산 시스템과 그 실질적인 경향이다. 그리고 이 욕망을 자연스럽게 모방하도록 학습시키는 학교 교육의 '제1명제'(사학비리 + 인권탄압 = 대학진학률 높으면 전혀 상관없음)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소비의 욕망과 소비할수록 오히려 결핍와 허기를 불러일으키는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디자인하는 과시적 소비는 질투와 시기의 감정을 점점더 내면화한다. 그래서 이 잔인한 시스템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욕망과 필요들은 인간이 인간이도록 하는, 혹은 인간을 인간으로 불렀던 그 조건들을 조금씩 지워간다.

문득 문득 느끼는 본질적인 결핍감, 이 익숙한 낯섬, 무엇인가 내 삶을 조정하는 것 같다는 불편함... 거기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은, '대학생 된 다음에 가능'하다고 선생님들은 설교하고, 실존의 불안과 삶에 대한 몽상들은 '배부른 소리'로 매도되며, 이 인간의 조건에서 '자유롭게 탈출'해서 근사한 외제차를 몰고, 대기업에 취업하며, 안정된 직장에서 요령있게 '농땡이' 부리는 그 어느 날 문득, 그래, 너는 그래도 현실에 잘 적응했구나, 성공했어, 잘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 쾅 찍히는...
그 순간이 우리가 기다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세속세계의 구원이다.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우리가 그저 살아 있다고 착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다리오 포는 질문하고 있다.




* 관련 참조글
Miracle in Milan (Beppe Grillo)
다리오 포 : "그는 웃음과 심각함을 혼합하여 사회의 불평등과 악습을 부각시켰고 동시에 우리에게 폭넓은 역사적 관점을 제공했다. (중략) 그는 중세시대의 광대들을 흉내내어 권력을 징계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품위을 고양시키는 작품을 썼다." (글 중에서)



* 우리나라에 출간된 다리오 포의 책들은... ( 알라딘   교보문고 )
세 권이 나온 것 같다.
그런데 모두 절판, 혹은 품절. ㅡ.ㅡ;

그래도 노벨문학상 작간데... 좀 심한 것 같다.
혹 이 글 읽는 독자 중에 다리오 포 우리말 번역서 가지고 계시면... 연락 부탁..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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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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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08/03/24 17:08

    * 제목 수정. 다리오 포와 911: 매트릭스와 인간조건.
    * 부제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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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eson 2008/03/24 17:40

    언제 부터인가 X-File의 "Truth is out there" (진실은 저 너머에)라는 말이 너무 실감나게 다가오는 세상입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3/24 22:18

      그러게나 말입니다.
      권력의 본질을 숨기는 위장장치들은 점점더 정교하게 발전하는 것 같아요.

  3. 생각의탄생 2008/03/24 18:48

    예전 글로 한번 링크를 걸어주셨는데, 또다시- 영광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너무 씁쓸한 내용인지라
    눈물이 다 나네요. 이미 읽어보셨겠지만- 14년동안 아무런 변화 없던 학교가 이 사태에 대한 대응은
    놀랍게도 너무 빠릅니다. 모교를 사랑하는 졸업생을 '졸업생을 사칭하는 불순세력'이라 칭하면서
    고소고발 이야기를 하니, 참 더러워서 일단 다 삭제를 한 상태이지요. 휴-
    너무 씁쓸해서. 오늘 저녁에는 바로 그 고등학교 친구와 잘 먹지 않는 술을 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배워가는 세상은 왜이리 불편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덧. 글의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서, 어렵게 걸어주신 링크가 유효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마디쯤은 관련 내용을 써내려가고 싶었지만 어..어렵네요 ^^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3/24 22:22

      같은 블로거끼리 영광이라뇨. : )

      제가 읽은 기억으로는 정말 냉정하게 쓰여진 이성의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이지 이성이 통하지 않는 분들이네요, '분순세력'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까 다시 삭제하고, 수정하신 글을 읽었는데요.
      무척 아쉽네요.

      나중에 마음이 정리되시면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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