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기억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그 기반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듯이, 그래서 결국 처형으로 마감되었듯이,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늘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이다. 그 기억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인간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가해자들에게는 그 사건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 성삼일 - 다시 들춰본 생각 (주낙현, 2009.4.10) 중에서
시간이 상처와 아픔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기억으로 만들 때 그 시간은 치유의 어머니 같다. 더불어 시간이 우리의 안락함 아래 켜켜이 쌓여진 죽음들, 그 고통의 기억들을 지워버릴 때 그 시간은 마치 존재의 반대말 같다.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고, 동시에 고통의 기억도 지운다. 고통의 기억이 지워질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근거를 지워버렸으니까. 항상 소망은 고통 속에서만 생겨났으니까. 이제 텅빈, 시간 없는 공간만 남는다.
삶과 죽음, 시작과 종말 '사이'에 시간이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시간은 살아있는 자에게만, 존재하는 자에게만 흐르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달콤하고 투명한 죽음을 우리는 실천하고 있고, 거기에 둘러쌓여 있다. 어떤 철학자는 "기독교의 위대성-가치있는 모든 종교의 위대함-은 중간윤리(interim ethics)(주: 중간윤리는 슈바이처.1875~1965.가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구조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과 '종말'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 '지금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계하는 것이 종교, 특히 기독교 윤리의 특성이라는 취지로 역자 오영환은 각주에서 설명하고 있다) 에 있다"(주: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1933. 오영환역, 한길사, 1996. p.65.)고 말했다. 종교는 예정된 축복을 위한 행복의 약속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는 실존의 인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자살한 대통령의 죽음에 서럽게 오열하고, 분노했던 어떤 노인이 죽었다. 그는 고통과 그 고통이 만들어내는 소망의 연대를 위해 자기 생애 대부분을 바쳤다.... 그리고 이제 한 성공한 사내가 소망을 욕망으로 만들었고, 욕망을 종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욕망이라는 종교는 중간윤리에 대한 고민을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사람들은 그 사내를 욕했지만, 그 욕망에 대해선 침묵했다. 내심 그 욕망에 환호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내의 종교는 고통에 대한 기억을 망각으로 가두는 주술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매일 살아있는 것처럼, 시간 없는 공간 속을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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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중간윤리"라는 번역이 좀 애매하네요. 중간이 마치 middle을 말하는 것 같아서... interim이라면 임시-, 일시-, 과도- 라는 정도가 괜찮을 듯한데... 왜 중간을 택했는지 모르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설명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과도기적인 의미를 좀더 부각시키는 표현이었다면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논평 고맙습니다. : )
본질의 두려움..이 느껴졌고 그렇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그저 습관같은 단상일 뿐인데요..
공감해주시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 )
머리와 가슴에 혼돈이라는,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돌덩어리를 품고 계시는 듯..
혼돈속에 살면서 혼돈에 무감각하게 산다면 인간은 껍데기로만
살다가 그 껩떼기를 벗는 순간 가늠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진정한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을까요??
진지한 논평과 공감에 감사드립니다.
주신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추.
지금은 위장에 결핍을 품고 있어서 배가 좀 출출하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