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와 혁명

2007/05/04 14:59

#. 이 글은 예전에 쓴 글입니다. 한겨레블로그에 보관했던 글인데요. 간략히 현재 시점에 맞게 추고해서 옮깁니다. 분량은 좀 많이 줄이고, 특히 결어부분을 보충했습니다. 거기에 있던 글은 지웁니다. 공개만 하되, 발행(올블, 이올린 기준)하지는 않습니다(올블에서의 공개란 검색 제외설정을 의미합니다).






포르노와 혁명





0.
그건 하나다.
아니 그건 하나이여야 한다.


1. 두 개의 축제. 

일상은 축제면서, 기적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너무 허무하니까.
그건 '발견'해야 하는 축제면서, 기적이다.

소극적인 축제.
그러니까 그건 질주하는 숨가쁜 축제가 아니라, 문득 문득 흘러가는 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축제다.
난 그게 더 좋다. 

가장 열띤 축제, 일상의 반대말로서의 적극적인 축제.
그건 혁명일테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혁명은 아마도 모두에게 다른 풍경일테니까.
모두가 함께 꿈꾸는 혁명은 없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모두의' 혁명은 그 시작도 완성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건 계속해서 모두가 각자 꿈꿔야 하는 그런 거.. 아닌가 싶다. 


2. 한 청년 혁명론자와의 대화

어떤 열혈청년이 있다.
그는 혁명을 꿈꾼다.
그런데 그 모습은 아주 아주 오래전의 내 모습과 조금은 닮아 있기도 해서.. 난 그가 참 좋았다.
물론 그는 나보다 더 용감하고, 똑똑한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뭐랄까...
신념은 자기가 숨쉬고 있는 지금/여기를 초극할 수 있는 것 같은 용기, 혹은 환상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들뜬 마취 상태, 그러니까 목소리가 너무 높아지는거다.
이를테면 국가전복, 세계혁명, 완전한 자유, 관습적인 것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
그런 사이키델릭 조명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조명은.. 물론 멋지긴 하다. 
거기서 미치도록 춤추고 싶긴 하다..

그런데 어차피 인간은 관념 속에서 살지 않고, 숨 쉬면서, 똥누면서, 이리저리 잔머리 굴리면서, 어떻하면 저 여자를 꼬실수 있을까, 어떻하면 저 녀석에게 이쁘게 보일 수 있을까... 이러면서 산다.

적어도 난 그렇다.
아주 쪼잔하게, 아주 궁상맞게 그렇게 사는거다.
혁명가도 똥누고, 섹스한다.
이슬 먹고, 구름똥 싸지 않는다. 

(필넷의) 비밀방명록을 통한 대화에서(비밀방명록이니까 직접적인 인용은 최소한으로 하고, 추정적 승낙을 예상한 정도로만 서술한다), 난 그 멋진 청년에게 현실적인 한계, 그 조건속에서 최선이 아닌 성취가능한 '차선'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나마 쟁취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기를 권했다.

그러니까, 현재의 목소리 톤을 유지하고, 혁명, 국가전복의 사이키델릭 조명 아래서 구체적인 실천적 방법론에 대해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현실과의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싸움은 날 샜다고  좀 강한 톤으로 조언했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언은 무슨, 그냥 그렇게 생각한 걸 말한거지).


3. 무거운 질문 - 어떻게 바꿀수 있는거지?

몇 번의 방명록 대화가 이어지고..
그 청년이 물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난 솔직히 잘 모른다.
이런 거대한 질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지식과 체험, 지혜.. 모두 난 갖고 있지 못하니까.

다만 난 내가 갖는 소망은 안다.
그건 다르더라도 공존하는 거, 모자라더라도 함께 하는 거,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거다.

가령, 조선일보 월드를 끝장내는 거.
막연한 추상의 대안들을 난 참 싫어하는데,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난 조선일보 월드를 가능한 한 축소하는 게 내 구체적인 수준의 목표라면 목표다. 그건 차이를 차별화하고, 소수가 다수를 대신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그런데 겉으론 그 경멸해마지 않는 '다수'들에게 말랑말랑한 마취제로 나는 당신편이야, 이렇게 생쑈를 하는 거대 스피커니까.

그러니까 난 가식적 기만의 코드로서의 휴머니즘, 흔히 감상주의의 가면을 쓴 상업주의, 소수의 재벌과 수구적인 권력의 편에 선 이기주의, 그 정신적인 본령으로서의 엘리트주의를 온 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이 땅에서, 궁극적으론,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바뀔 수 없다면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라지나?
어떻게 바뀌나?
그건 현재로선 너무도 불가능한 꿈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최소한 그 기만의 매트릭스에서 한 명이라도 더 탈출하기를 나는 바라는 거지, 뭐.
조선일보라는 상징으로 대표되는 그 기만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자는 거다.
그건 현실적으로 '다윗'만들기 일 수 밖에 없다.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건 '다윗' 밖에는 없으니까.

어떻게?
난 그 다윗이 현실적으론 '한겨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 블로그 시대의 도래를 맞아 [한겨레 블로그]가 그 미디어 한겨레의 든든한 주력 엔진으로 장차는 자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겨레는 '다윗'의 상징일 뿐이고, 그게 어떤 다른 것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그 다윗'들'은 연대해야 한다. 아니, 그 연대가 다윗이다.

그런데 블로그 시대, 이건 실체인가?
이게 신화이든, 또 다른 상업화를 위한 미끼이든, 아니면 모든 시민들의 일인 '미디어'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를 이끌어낼  혁명적 물적 토대의 변화이든.. 난 그걸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런데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의심하고, 비판하는 건 좋지만.


4. 너 하나 지랄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진 않아.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겠다, 이런 비전은 나에겐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이니까.

그런데 [한겨레 블로그](구 필진 네트워크)는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한거다.
꿈이 컸던걸까?
참담한 기분이 든다.
역시 나 하나 지랄한다고 변하는 건 없는건가.. 싶은 패배감이 문득 문득 그렇게, 뽀샤샤한 아이처럼, 천연덕스런 표정을 하고서 아장아장 찾아오는 거다.

그런데... 

난 과연 얼마나 지랄 했나?
그 지랄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효과적이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지랄해야 하나?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운다.
그건 진리다.

그런데 가끔은 나처럼, 배우지 못하고, 쉽게 짜증만 내는 경우도 있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한겨레블로그에 대해선 난 잠정적으로 포기다.
[필통] 메인화면으로 들어가면, 여긴 작은 포털에 불과하다.
한겨레 미디어를 위한 장난감.
그게 현재의 [한겨레블로그]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벌렸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다지 장사 잘 될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장사 잘되더라도, 지금과 같은 그런 모습이라면 관심없다.
들어갈 때 마다 한숨 나온다.

각설하고...
글 마무리하자.


5. 한미 FTA는 섹스만큼 중요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 경제에 관한한 문외한인 나도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 줄은 안다. 이 정도 사안과 견줄 수 있는 건, 내가 생각하기엔, 섹스 혹은 포르노 외에는 달리 없다. 섹스에 대한 관심처럼 자연스럽게 거기에 관심을 갖아야 할 만큼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의 조건에 영향을 미칠거다.

그건 확실해 보인다.
그건 섹스의 황도, 그 기울어진 쾌도를 따라 유형하는 포르노 위성만큼 중요하다.

난 억지로 뭘 하는 건 정말 생명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자주 말하지만, 가장 질긴 생명을 갖는 경우란, 그 문제가 생존과 직결될 때이다.
그건 어쩔 수없다.
먹고 살아야지!

그런데 살만해지면, 여유가 좀 생기면, 그 때는 재미가 중요하다.
[한미 FTA] 같은 사안은 그건 정말 다수에게 어떤 형태로든 '생존'의 문제로 장차 적용되겠지만, 그건 지금 당장 보이지도 않고, 피부로 감촉하기도 힘들다.

누군가 그 잘못된 협정 때문에 죽는다면,
그는 왜 자신이 죽는지도 모른채로,
그. 렇. 게. 서서히 죽을거다.

그 죽음의 인과를 파헤치려면 고도의 정치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직 죽지 않은 죽음을 상상하는 건 그런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까지 머리 쥐어짜면서 상상하고 싶지 않은게 우리들이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재미'가 가장 강력한 생명력이고, 어떤 액션, 어떤 운동의 동인이다.
그게 어떤 식으로든 재미가 있어야 오래 지속되고, 힘이 생긴다.
순수한(난 이 말 별로 안 좋아한다) 도덕적 사명으로 당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짧다.

그 위대한 419혁명 세대도, 광주 세대도, 6월 항쟁 세대도 그걸 증명했다.
강만길은 [4월 혁명론]에서 그 혁명이 왜 미완인지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 혁명은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기댔기 때문에 실패했다.
'지저분한' 생존조건과는 별 상관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완일 수 밖에 없었다.
난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6. 우리들, 포털의 바다에 빠진 정치적 무뇌아들 

21세기 현재 스코어 우리들은 유난히 재미를 추구하는 유희적 인간이다.
또 전래 없는 나르시즘에 빠진 대책없는 자뻑들이다.
그러니까 재미없고, 잘난 맛 없으면 우린 시체다.
(우울하고 신나게도 이건 난 진실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 재미가 네이버의 연예인 성형수술이 아니라, 싸이월드의 토도리 따먹기가 아니라, 일상 그 자체이길 바란다. 그 일상의 사소한 관심들이 정치적인 상상력으로 피어나길 바란다(왜냐하면 이 세상에 정치적이 아닌 건 없으니까). 그 상상력을 훈련하고, 그저 일상의 정치적 상상력들, 그 일상의 사소한, 그런데 너무도 커다란 의미들을 '놀이로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블로그가 되길 나는 바란다.

말이 쉽지.
우리들이 일상을,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정치를, 자본을, 그 권력을 재밌는 '놀이'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있는 재밌는 것들, 자극적인 것들, 꿀물 나오는 그 온갖 것들을 '소비'하기도 바쁘다.
입을 떡 벌리고, 그 재밌는, 말랑말랑한 것들을 침팬치처럼 받아먹는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바보가 되는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이 있다.

그 재밌는 것들에 대해서 떠들지 말자는 건 아니다. 
더.불.어.
재밌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떠들자.

조금만 더 조그만 더 즐겁게 비판하고, 즐겁게 회의하자.
우리에게 있는 정치적 상상력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난 정말 그렇게 믿는다.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포르노에서 혁명의 상상력을 발견할 수도 있을테다.
연예인의 허벅지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을테다(이건 좀 과장이네 ㅡㅡ;;).

나는 누군가 [한미 FTA]을, [김승연]을 열나 재밌는 드라마로, 재밌는 영화로, 욜라 신나는 노래로 만들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상업자본은 그걸 영화로, 드라마로, 신나는 노래로 만들리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들자.
우리가 만들자.

조금 덜 재밌더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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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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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7/05/05 00:2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5/05 08:55

      지금 거의 마쳤습니다. : )
      이제야 봐서요.
      토요일 오전을 개인적으론 가장 좋아하는데, 이런 재밌는 설문을 하다보니 시간이 잘 가는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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