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시대: 자기반영적 드라마로서의 사회운동

2012/08/23 04:27
지난 8월 16일 [더 많은 수다 2012] 포럼 중 '사회운동 더 창의적으로' 세션에서 발표했던 자료다(PPT). 참석자(청중)은 주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었는데, 한 스무 명 쯤 되었을까. 강의나 발표를 많이 하지 않아서 아직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청중이 많은 쪽과 적은 쪽, 그 둘 모두에게 장단점이 있겠으나, 나는 아직은 청중이 적은 쪽이 좋다. 사소한 단상들.

1. 청중이라는 말. 오병일 님은 '청중'보다는 '참석자'라는 표현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도 수동적인 의미가 다소 강한 청중보다는 뭔가 능동적이고, 수평적인 느낌의 단어가 뭐 없나 궁리해보지만, 적당한 표현이 당장은 생각나지 않는다. '참석자'는 강사(발제자)와의 쌍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개인적으론 별로다. 야학에선 교사를 '강학'(가르치면서 배운다)이라고 하고, 학생을 '학강'(배우면서 가르친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컨퍼런스든 포럼이든 말하는 사람만 말하고, 듣는 사람은 듣는 그런 구도를 나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대개는 그렇게 된다. 이번 발제에선 그런 느낌이 강해서 좀 아쉬웠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셔서 질문도 많고, 딴지도 많을 줄 알았는데...

2. 자기 표절에 대한 불안.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테마로 강의, 발제를 준비할 때 처음부터 새로운 자료들,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지, 아니면 기존에 썼던 자료를 업데이트해서 써도 되는지 좀 헷갈릴 때가 있다. 이번 발제 테마는 총론적인 차원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웹과 SNS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였는데(처음 오병일 님께서 발제를 맡기셨을 때는 좀 다른 취지셨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미 기존에 학부생의 교양강좌(특강) 자료로 대학생들이 웹과 SNS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를 내 나름으로 구성해본 발제가 이미 있어서, 이번 '수다 포럼'에선 그 자료를 상당히 많이 썼다. 2/3 정도는 이미 있는 자료를 썼고, 새로운 내용은 1/3 정도 뿐이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리더라. 물론 기존 자료들도 다시 모두 한장 한장 손보긴 했다.

아무튼 누가 볼지, 점점 더 독자들도 줄어드는 판에, 댓글이라도 하나 달릴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잠시 동안이라도 시간과 관심을 선물할 거라는 기대로 올린다. 슬라이드 쉐어에 올렸는데, 임베드로 공유한다. 물론 여기서 공유는 내용 공유와 다운로드 참조용이지(뭐 그다지 참조할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적인 의미의 공유는 아니다. 발제 자료에 한정해선 앞으로 CC-BY-NC-SA(출처-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정도로 좀 타이트하게 정책을 가져갈 생각이다. 내 블로그의 CC 라이센스는 BY-SA(출처-동일조건변경허락)이다.










비례대표 늘리기는 또 다시 시기상조

2012/08/04 01:26
더프로젝트의 소셜아젠다 캠페인, #정치의 미래 중 1번 질문을 수정해서 답하며   

(원래) 질문1. 국회가 국민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기 위해 국회의원 수, 특히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늘린다면 어떻게 늘리는 게 좋을까요?

0. 질문 자체에 대해
이론적으론 아주 쉽지만, 현실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아주 어려운 질문. 사소하게 질문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국민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기 위해 국회의원의 (물리적인) 수가 늘어나야 한다'고 질문은 전제하고 있는데, 그 전제문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잘 듣는 것'(A)과 '국회의원 수 증원'(B) 사이에, 설명도 필요 없을만큼 널리 알려진, 합리적인 인과가 성립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내가 과문해서 그러리라. 아무튼 내가 이해하지 못한 질문이라서 여기에 대해선 답할 길 없고, 질문을 '비례대표를 늘리는 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한정하도록 한다. 따라 이하 현300명의 국회의원 수에는 변화가 없는 대신에 '비례대표의 수'를 늘리고, 지역구 의원의 수를 대폭 줄이는 안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현재 비례대표 국회의원 수는 54명이고, 지역구 의원의 수는 246명이다.

새로운 질문. 비례대표 비중을 늘리는 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1. 이미 나와 있는 모범답안: 독일식 정당명부제도

대부분의 (소위 진보적인) 정치학자들, 지식인들은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강하게 찬성하고 있다(고 안다). (참조. 19대 총선에 독일식 선거제도를 도입했다면) 이론적으로, 그리고 독일의 경험을 빌면, 이건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울만큼 '모범 답안'이다. 하지만 공간을 한국으로 옮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2. 통진당 사태가 남긴 숙제

통진당 두 가지 점에서 진보 진영에 숙제를 남기고 있다(여전히 사태가 진행중이라는 점이 그야말로 놀랍고, 지겹다). 하나는 진성당원제이고, 나머지 하나가 비례대표제다. 그 둘은 불가분이고, 여기에 정당이 이 두 가지 요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지, 정당이라는 시스템 자체의 완성도랄까, 시스템의 효율성이 문제된다. 현재 수준의 정당 시스템은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다는 걸 명확하게, 아주 지겹게, 대하 드라마 방식으로 끈질기게 입증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의 비례의원 후보 선출 시스템이 잘됐다는 거 전혀 아니다.

3. 대중의 뜻과는 상관없는 대중정당(?)

적어도 통진당 사태를 통해 일당백(?)의 열혈 당원이 소위 '국민' 혹은 '대중의 상식'과는 상관없이 정당 시스템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리고 인터넷강국이라는 한국에서 전자투표를 통해 진행된 비례대표 경선이 얼마나 특정의 이해에 맞게 왜곡될 수 있는지도 보여줬다. 그 구체적인 책임 소재에 대해선 별론으로(왜냐면 그 진실추구 과정 자체가 그야말로 미로라서, 통진당 사태에는 더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고) 어쨌든 통진당으로 대표되는 대중적 진보정당은 대중과는 상관없이 운동하고, 운영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지난 몇 달에 걸쳐 온몸으로 증명했다. 이러면서 대중정당이라고 우기면, 그야말로 주먹이 운다.  

4. 국민과 대중은 항상 옳은가? 옳더라도 게으르다.

간단히 말하자. 현재 국민들이 보여주는 정치적인 관심의 수준과 정도로는 진성당원제의 확대과 내실을 기하기 어렵고(경기동부와 같은 특정 계파에 의해 정당조직이 좌지우지되는 현실 정당시스템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고), 그런 바탕에서 비례대표를 늘린다 한들 비례대표의 경선 규칙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우며(누가 나왔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 정당시스템이 이런 문제들을 조율할만큼 성숙했냐면 오히려 이런 최악의 조건들을 장기화시키는 퇴보와 퇴행을 거듭해오고 있다고 봐야한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당과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나눠먹기식 비례후보, 이미지에 기댄 전략(?) 후보가 정당의 유일한 비례 전략(??)이다.

5. 결론: 또 다시 시기상조

결과적으로 비례대표의 확장, 증원은 추구해야 하는 목표지만, 현실적으로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달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겹게 반복되는 말이지만, 한 사회의 수준은 그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 정당은 국민의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사족.
'더프로젝트'는 '더 체인지'와 '한겨레경제연구소'의 공동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는데, '소셜아젠다캠페인'의 '소셜'에서 블로그는 정말 찬밥이구나를 절감한다. 페이지 구성이 트위터와 페북을 위주로 짜여 있다. 블로그는 그야말로 원조 '소셜'인데, 너무 홀대 받으니 좀 그렇다. ㅜ.ㅜ; 블로그 참여는 엮인 글로만 가능한 것 같다. 역인 글 주소를 겨우 찾아서 우측에 있는, '작성자'도 표시되지 않는, 내 게시물은 지우고, 트랙백을 쏴야지 하면서 원문을 퇴고했다.  트랙백 주소: http://socialagenda.kr/index.php?document_srl=1276&act=trackback&key=231

사족2. 글을 걸수 없었습니다. ㅜ.ㅜ; 이게 뭐하자는 시츄에이숑인지 잘 모르겠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족 3. 더프로젝트의 자기 프레임에 가두려는 링크 설정은 좀 거시기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건가 싶을만큼. 더프로젝트 사이트에 다른 링크를 걸어서 페북에 올리면, 그 다른 링크가 표시되는 게 아니라 더프로젝트 사이트가 뜬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


<수술 덜 된 논현동 언니들>을 그리는 무명만화가께서 저에게 작품에 대한 소감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에 짧게, 작품을 한 번 다시 쭉 감상한 뒤에 생각나는 대로의 단상을 답장드렸습니다.
그 답장을 사소하게 퇴고해 올립니다.



1. 컨셉 / 스토리

기본적으로 아주 훌륭합니다. 특히나 매회 다음 회를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배치한 깨알같은 추리극의 요소들은 멋진 기법이라고 봅니다.

2. 미시적인 에피소드

다만 캐릭터에 기반한 에피소드의 풍성함은 다소 약한 느낌입니다. 저 개인적으론 <논현동>은 사회풍자적인 느낌으로 많이 다가오는데요. 전체적으로 그 풍자는 인물들의 내밀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지 않고, 경제적인 조건이나 구조적인 인식(남/녀의 사회정치적 조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현재로도 아주 상징적인 에피소드지만, 예상가능한 에피소드라서 마치 사회, 경제적인 조건들을 이야기화한 느낌이지, 이야기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이 드러나는 느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이라서 좀더 비유적인 방식이나 숨겨진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가령, 유년이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체험들이 좀더 미시적으로 표현되면 그 풍자가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문구를 굳이 인용하자면,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보다 랭보나 보들레르의 시 속에 현실을 변혁하는 더 큰 정치적인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는 마르쿠제의 전언이 떠오릅니다.

3. 짝패로서의 캐릭터

현재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성형의 불가피함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체화한 인물들인데, 즉, 성형중독자 혹은 성형워너비들인데요. 이런 인물들의 짝패로서 성형수술을 아주 반대하는, 혹은 성형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 주변인물들이 배치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 배치가 처음부터 이뤄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앞으로도 충분히 그런 인물들을 일종의 '파트너' 혹은 전략적인 '짝패'로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독자가 애착할 수 있는 캐릭터의 구현

현재로선 4인방의 캐릭터가 아직 명시적으로 구현된 단계는 아니라 봅니다만, 저 개인적으로 그 4인방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인 호감이나 또는 연민을 구체적인 감정의 단계로 체험한 인물은 아직 없습니다. 각각의 인물이 갖는 의미론적인 요소들을 좀 더 분명 가져가면 좋을 것 같아요. 더불어 그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알리바이'(독자와의 공감대)를 만들어주시면 어떨는지요? 현재로선 다소 머리가 텅 빈 성형수술 워너비들의 수다에 치중한 느낌이 강해서, 그 인물 하나 하나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인방 중에 문학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도 있을 수 있고, 사회운동에 의외로(?) 관심이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단순한 성형미인 워너비의 캐릭터에 좀 더 입체감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더불어 사회가 성형미녀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나 이중적인 시선들도 드러낼 수 있다 보고요. 

저는 성형 미인 워너비들 나쁘다 생각하지 않고, 그네들의 '병맛' 대화에 담긴 고민이 폄하될 필요도 없다 봅니다. 그 4인방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여자들이고, 그게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놓은, 혹은 주입한 '병맛'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러니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적 육체를 세뇌당한 '불쌍한 파블로프의 개'에 불과한 존재라고 해도, 그녀들의 집념과 노력, 그리고 용기 그 자체는 저 같은 유치하고, 이기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 보기엔 아주 훌륭하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녀들을 그저 '병맛 4인방'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병맛 4인방'으로만 기억될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녀들을 구원해주세요.
저는 그녀들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 단상은 이 정도입니다.
제 단상은 그저, 마땅히 그러실테지만, 사소한 참조로만 삼으시길.
제 부족한 단상이 조금이나마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민노씨 드림.


여행 1. 혹은 그 바다에 떠 있던 구름

2012/08/01 14:55

여행은 항상 나에겐 이중적이다. 설렘과 실망의 이미지. “미로 속의 공간은 신비”롭지만, 거기에 들어가면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지는(정현종) 그런 느낌이랄까. 설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행복한 일이지만, 그 설렘 속으로 들어가면 언제든 나는 아이처럼 실망을 만나지는 않을지 조바심을 낸다. 내가 만들어내는 실망이 훨씬 더 공포스럽지만, 내가 만날 실망도 항상 염려가 되는 건 사실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여행은 항상 행복과 두려움의 이미지들이 교차한다. 우리는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속에 빠져서 여행이라는 새로운 곳을 흘러가니까… 하지만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낯선 공간과 시간은 하나의 무대 같은 느낌이라서, 그 무대는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행복한 공간이지만, 하지만 난 노련한 배우는 아니니까. 실수하지 않을까 마음 속에서 심장이 콩콩 뛰는, 그렇게 심장이 뛰는 설렘과 두려움을 누군가 발견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는 아이가 된다.

그 바다, 거기에 떠 있던 구름이 마구 마구 몰려온다.
거기에는 너무 커다란 행복의 이미지와 너무 너무 깊은 슬픔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그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소중해서, 난 아마도 그 구름들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섬: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것

2012/07/23 04:59
사랑한다는 건 그녀의 외모라던가, 목소리에 길들여지고, 중독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그녀가 만들어내는 어떤 공간이다. 그 공간은 결핍한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의 공허가 항상 꿈꾸던 그런 곳이다. 거기에서 피어나는 풀잎 하나에도 당신은 기뻐 눈물 흘린다. 거기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목숨 마칠 각오가 되어있다. 하지만 당신을 감싸던 그 풍경은 쉽게 사라진다. 그녀는 그 풍요를 언제라도 지워버릴 불안과 결핍을 만들어낸다. 덧없는 신기루처럼, 너무 쉽게, 기쁨은 사라진다. 그리고 당신이 영원히 알지 못할 슬픔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게 비정하리만큼 냉정한 세상의 법칙이다. 대부분의 당신은 어느새 더 공허하고, 굶주린 자기를 발견한다.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그 저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인간에겐 아무런 애정도 없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탓해선 안된다. 당신도 이미 그녀에게 똑같은 결핍과 슬픔을 선물했으니까.

당신은 그녀를, 목적어로서, 사랑할 수 없다. 부버의 말이 맞다면, 다만 사랑은 당신과 그녀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당신은 그녀와 함께 작은 피난처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눈동자, 목소리들은 어떤 풍경을 만든다. 그 눈동자, 목소리가 머무는 곳은 당신의 깊은 그림자 속이다. '그녀'라는 존재는, 신비로운 마법처럼, 당신의 결핍을 일꾼 삼아 소망의 풍경을 만든다. 그리고 당신과 그녀는 '그 곳'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잠시, 우리를 둘러싼 이토록 잔인한 세계를 잊는다. 그리고 함께 영원을 소망한다. 그건 한없이 외롭고, 덧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섬이다.

* 발아점: Ederle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