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봐 내가 그럴줄 알았어!"

2013/09/04 16:04
이석기 사태 단상.

심정적으로야 나도 이런 황당한 사건을 접하면 일단 까고 보자는 심리가 자연스럽게 발동한다. (그래 이석기 사태 얘기하는 거다) 나는 영어 졸 못하지만, 헐리웃 영화 보면 '아이 뉴 잇'하면서 아주 도끼눈 뜨면서 대사를 읊는 배우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남편이 바람 피우거나 거짓말이 들통나면 대사 작렬.

이석기 일당에 대해 '아이뉴잇'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렇다면 왜 막지 못했나. 적어도 왜 그 상종할 수 없는 일당과 영합했나. 현재 스코어 이석기 일당은 시대착오적인 똘아이들이고, 이에 대해 이석기 일당은 제대로 된 반박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아이뉴잇'하면서 도끼눈을 부라리는 그 인간들이 나는 더 짜증난달까.

1. 민주당 하는 짓을 보면 창조적인 정책 입안 능력은 고사하고, 그 흔한 정치적 선동의 프레임도 자기 걸로는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정치적 식물 집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은 늘 적대적 공생의 메카니즘에서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반대(하는 척 하면서) (결국)(편승)하면서 기생하는 정당 같다.

2. 이석기 일당의 행위는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 혹은 강하게 신뢰할 수 있는 추정적 정황으로 보건대) 범 진보권에서 표현의 자유를 들어 "너는 존나 싫은데, 니가 니 사상의 자유를 공격당하면 내 너를 함께 싸워주마"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엄청 똘아이의 엄청 거대한 해프닝인데, 그 똘아이들의 수장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라는 점과 그를 수장으로 삼은 집단이 (소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데.....

3. 그러니까 '내란음모'는 정치적 선동의 프레임에서 아주 크게 베팅한 것 같고(물론 이런 베팅은 올인해야 정상이긴 하다), 아주 과하다고 본다. 한상희 교수 의견처럼 소요죄 정도가 논의될 상황인데, 소요죄는 예비/음모를 처벌하는 조항이 없지 않나? 그럼 무죄? 형법상으론 무죄로 처리해야 맞다 보고. 범죄(조항) 없으면 처벌 없는거지 뭐. 다만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하면 족하지 않나 싶다.

4. 정치적 보복은 오직 국민의 선거를 통해서만 행해져야 한다. 적어도 이석기 히든카드는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함정수사'(?)라고 봐야하지 않나 싶다.

5. 초원복집 사태에서 민주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했던 자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는 이 엄혹한 시절에 부산 시민들이 그 민주주의를 부정했던 자가 옹립하고자 했던 영삼 할배를 대통령 만든 것처럼, 적어도 진보라면 이석기 사태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촛불을 더욱 크게 타오르게 하는 '기름'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끝)

추.
블로깅 역사상 최초로 페북에 먼저 쓰고, 블로그에 옮긴다. 나도 페북의 자발적 포로가 되어가는 거딘가? 심각하게 스스로 초라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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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매맞고 싶지 않다

2013/07/24 10:02
* 발아점(發芽點): 포털 뉴스 담당자에게 듣는다 5: 편집권에 관한 고민과 전망

"포털들은 광우병 시위를 비롯해 사회의 크고 작은 사태와 소동의 발화점(發火點) 노릇을 해 왔다. 그런데도 이런 탈선을 걸러내거나 피해를 구제할 장치도 없다" (조선일보 2013년 7월 5일 자 사설)

1. 언론 사설이라기 보다는 무슨 근엄한 집안 어른의 목소리 같다. 혹은 무슨 박정희 시대의 경찰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참 놀고 있다.

2. "광우병 시위를 비롯한 사회의 크고 작은 사태와 소동"은 그 자체로 "탈선"이 아니며, 그 사태와 소동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증거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탈선이라면 '선'을 정하는 건 누구인가? 그것은 언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 소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대화과 토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언론은 '정답'을 말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주고, 그 대화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그런 점에서, 일은 정말 열심히 한다고 하던데, 언론으로서의 철학을 논할 수 없을만큼 오만하고, 독단적이다.

3. 이런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이라고 광고하는 이 사회는 매맞고 싶은 사람들이 주인(?)인 그런 민주주의 사회인건가? 그런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고마해라, 많이 맞았다 아이가!"

4. 발아점인 '포털 뉴스 담당자 인터뷰 정리'는 아주 뜻깊은 시도다. 물론 이 쪽으로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대개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긴 하다. 그럼에도 포털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살아 있는 사람', 때론 분노하고, 때로는 열변을 토하는 그런 목소리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자료로서는 그 어떤 감동적인 칼럼이나 그 어떤 풍부한 비평보다도 값지다. 5회의 마지막 연재인 이번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언론이란 건 같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아갈 방향을 설계해 나가는 논의의 장이다. 그 각축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공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갈등이 중요하다. 객관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주관이 중요하다.”

언론의 객관성이라던가, 불편부당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맥락이다("같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언론이 순결하고 투명한 하얀 도화지 같은 것이라거나, 혹은 사실만을 전달하는 무생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언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언론을 사회의 공기라고 하는 이유라 믿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런 신념조차도 충분히 존중할만하다. 하지만 세상에 온전하게 객관인 사실도 그 사실에 관한 평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합리적인 주관"을 통해 이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대화'할 따름이다.

5. 가령 기사투 글쓰기의 관습적인 행태 중 하나인 "나"의 생략을 생각해보자. 글을 쓰는 기자는 실존의 인간이다. 그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취재원의 목소리를 균형감 있게 배치하고, 아무리 깊이 고민해 사안을 다루더라도 그 인간 자체가 하나의 관극적인 틀에 불과한 것이다. "합리적인 주관"을 가진 인간과 객관적인 척 하는 세계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저널리즘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많은 저널리즘의 철학적이거나 기술적 발전들이 녹아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나"를 지운다고 해서 기사에서 그 "주관"이 거세되거나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계의 모든 언론들은 다들 저마다 주관적이다. 다만 객관과 실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격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일보의 격은 술취한 가부장 혹은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의 그것이다. 나는 취객이나 폭력 경찰을 언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직장의 신' 단상

2013/05/28 12:18
1. 김삼순 업글 버전: 비현실적인 여주인공이 현실적인 상황을 신데렐라 풍으로 극복(?)한다는 김삼순의 구도와 유사하다. 그런데 사회적 의제로서 '비정규직'을 소재로 끌어온 점에서는 김삼순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김삼순의 비현실성을 극단으로 몰아붙였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극적인 요소로서의 캐릭터의 과장이라는 걸 인정하더라도, 다소 황당하기도 하다. (자격증이 너무 많고, 대한은행 화재사고 이후 만 5년 남짓동안 그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건 불가능하다...;;; )

2. 김혜수는 연기도 외모도 아주 매력적이다. 캐릭터 설정도 꽤 잘한 것 같다. 로맨틱코믹이 어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고, 어쩌면 영화보다는 TV드라마에 더 적절했 을수도...

3. 오지호는 자신이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역할을 맡은 것 같다(캐스팅 아주 잘했다). 잘난 것 같지만 어딘가 부족한 역할인데, 실제 오지호의 이미지와 아주 부합한다. 오지호는 배우로서는 약점이 있다. 너무 잘생겼다. 그게 원빈이나 장동건처럼 잘생긴 것도 아닌 게 너무 이국적으로 잘 생겼다. 그리고 뭔가 비어 있고, 가벼운 느낌으로 이미지가 축적된 느낌이다. 하지만 [직장의 신]에서는 그런 느낌이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린다.

4. 무대리(배우 이름 모름)의 연기는 아주 훌륭하다. 극중 캐릭터 해석이 아주 탁월한 듯. 표정, 특히 눈빛이 좋고, 발성과 호흡도 아주 좋다. 하지만 만년 과장(배우 이름 모름) 연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작정하고 비현실적인 코미디, 그러니 과장된 코미디를 보면서 울컥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연기를 잘한다는 거고, 극중 설득력이 아주 높다는 방증이다.

5. 정유미는 이런 캐릭터로 고정될 위험이 느껴지고, 전혜빈은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미스 캐스팅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서로 맞바꿔 설정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유미를 부잣집 딸로, 전혜빈을 부산에서 상경한 지방대 출신으로. 물론 극중 비중으로 보면 정유미(의 배우로서의 인지도가 더 높기 때문에)가 비중있는 조연이라면, 전혜빈은 비중이 낮은 조연이다.

6. 초반 꽁트와 나레이션 효과는 아주 훌륭하다.

7. 중간 중간 반복적인 주제곡의 사용은 다소 과한 것 같다.

8. 효과음은 (아주 효과적인데) 과연 저작권을 다 처리했을지 의문이다. 앵그리버드까지 등장하는데... 암튼 웃겼다.

* 우연히 한 편을 봤다가, 재밌어서, 나중에 몰아서 정주행.


* 관람일시/장소: 2013년 4월 8일 스폰지하우스 언론시사회

** 스포일러 주의: 독자에 따라 약한 스포일러~다소 강한 스포일러 사이.

*** 원래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하려고 쓴 초안인데, 퇴고/편집하지 않고 있다가 영화가 개봉하는 바람에 일단 여기에 올림. ㅡ.ㅡ; 퇴고/보충해서 슬로우뉴스에 발행할 수도 있지만... 편집팀에게 까일 수도 있다... ㅎㅎ



1.

이미지 그 자체가 유일한 스펙터클인 영화가 있다. 이야기로 보자면 [디워]보다 그다지 나을 것 없는 [트렌스포머]류의 황홀한 스펙터클 신파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미지로서의 영화, 그 본질을 거부하는 듯 이야기 그 자체가 중요한 영화가 있다. 이창동 영화는 이야기가 이미지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의미론적 서사구조가 이미지 자체의 구성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때론 이미지가 이야기의 극적인 흐름을 쫓지 못할만큼 완성도 높고, 깊이있는 사유와 고민의 흔적들을 그 내러티브의 틈 속에 담아내곤 했다.

이미지와 이야기가 삼투하면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영화들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영화들, 스탠리 큐브릭의 모든 영화들은 이야기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 그 자체가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이미지와 이야기의 의도적인 배반들, 엇갈림을 직조하는 영화들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전통에 있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 결국은 영화를 또 다른 언어로 밀어붙인 고다르의 실험적인 영화들이 그렇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테이크 쉘터]가 여기에 속한다.

2.
[테이크 쉘터]는 그 단조로운 이야기, 그 단조로운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아주 야심찬 드라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국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배반하며 영겁회귀하는 비극적 뫼비우스의 띠를 완성하는데 이른다.

질문은 단순하다.

1. 왜 마이클 쉐넌은 정신병적인 망상(폭풍)에 시달리는가.

2. 시스템의 결과인 이 파멸적인 묵시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3. 프로테스탄트 윤리 위에 성립한 미국자본주의에 과연 구원은 가능한가.

4. 사랑이라는 신화는 여전히 가부장이 잔존하는 기독 내러티브의 기만적인 속임수에 불과한가. 아니면 우리가 끝끝내 기댈 수 있는 건 가족주의와 결합한 사랑이라는 신화뿐인가.

5. 미친 블루칼라 가부장은 어떻게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미션은 성공했는가.

이 영화의 뛰어남은 이들 질문에 대해 관객에 따라 서로 다른 대답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시각적으로 그리고 이야기로서도 비교적 명확한 이 영화는 놀랍게도 서로를 배반한다.




---- 여기서부터 (독자에 따라) 강한 스포일러























마지막 장면에서 쉐넌의 광기가 실현된다. 마치 잔다르크의 소명처럼 쉐넌의 광기는 거대한 회오리 폭풍의 출현을 통해 치유된다. 그는 이제 광인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선지자다. 부당하게 공격당하고, 가혹하게 상처받은 쉐넌의 영혼은 이제 저 거대한 폭풍을 통해 구원받은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쉘터]의 결론은 두 가지 점에서 쉘터, 피난처로서의 구원을 포기해버린다.

체스테인에 의해 쉐넌은 인간의 길, 선택의 길, 치유의 길로 이끌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쉘터를 짓느라 멀리 여행할 돈이 부족해, 인근으로 떠났을 휴가지에서의 폭풍은 신의 길,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구조의 공간, 자연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제시된다.

쉐넌을 선지자로 본 관객은 이 재앙에 환호할 것이다. 쉐넌을 연약한 인간, 상처받고 불안한 직장에서 철저히 소외받는 블루칼러 가부장으로 감정이입한 관객들은 어쩌면 절망할 것이다. 사실 나는 그 둘 모두이다.

추.
연기는 정말 뛰어나다. 쉐넌과 체스테인의 빈번한 클로즈업은 이런 훌륭한 배우들 덕분에 그 효과를 충분히 배가한다.

마스터 내러티브는 [현대인의 소외] 정도 되려나?

왜소한 인간과 거대한 자연의 대비, 실존적 인간의 선택과 필연적인 (시스템의) 인과율 혹은 신화(로서의 자본주의)의 대비는 시각적으로도 아주 적절하게 묘사된다.

마지막 질문.
왜 기름비인가?



그저께(4월 3일) 중앙선관위가 주최한 간담회에 다녀왔다.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거 5일전 이틀간 부재자(라기 보다는 ‘사전 투표’에 가까운 개념인 듯) 투표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선관위 시스템 전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있으니까 제발 좀 불신만 하지 말고 믿어달라는 것.

간담회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인 선관위의 발표를 ‘구경’하다 온 자리였다. 다만 선관위 직원들과 솔직담백하게 짧게나마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보람이었다.

발표 내내 선관위의 피해의식은 역력했다. 그 피해의식은 "세계 최고의 시스템", "세계 최초의 제도" 따위의 최고형 수사를 보상적으로 이끌어내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내용인 선관위의 D-5 사전투표 제도는 당연히 환영할만하다. 이번 재보궐선거에서는 시범 운영하고, 2014년에 확대 시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 왜 D-5에서 이틀간인가? 5일 내내일수도 있고, D-2에서 정식 투표일까지일 수도 있는데.
- 해당 선거구로 우편 송부하는 기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 가령 안양이 선거구인데 부산에 출장 가 있는 동안에 투표했다고 치자. 부산에서 안양까지 송부할 시간여유가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양당제에 가까운 정치구도를 가진 감정적인 정치과잉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의 패배는 인정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왜곡된 환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희생양 제의는 모든 정치의 역사에서 존재해왔다. 그러니까 선관위는 억울해도 더 투명하게, 더 솔직하게를 강조하고, 실천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니까 선관위의 다소 억울한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징징거리는 모습까지 이뻐보일 리 만무하다. 어쩔 수 없다. 계속 투명한 기구와 투명한 절차,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정치적 패배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극히 일부 시민들의 음모론을 탓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지 고민하고, 좀 더 열린 정보, 좀 더 투명한 절차를 실현할 있도록 머리를 짜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그게 선관위의 의무고, 그게 공무원의 의무다.

한국 선거 제도와 그 선거를 치워내는 시스템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들 한다. 선관위 직원들은 아주 지랑스럽게 그 점을 강조한다. 앞으로는 그 시스템을 수출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리라. 하지만 물리적인 시스템, 형식적 얼개로서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아무리 세계 최고이면 뭘 하나. 정치 자체가 세계 최악인 걸. 그래서 선관위는 어쩌면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초래한 혐오와 불신을 대신 짊어진 희생양처럼 보이기는 한다. 무슨 일만 나면 ‘이게 다 북한 소행’이라는 그 SF적인 정치적 프레임을 가진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다소 부당하게 대신 띵 뜯기기고 대신 욕 처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하나다. 희생양이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선거가 국민의 축제일수 있도록 제도를 고민하고, 시스템을 고민하는 일. 그게 선관위가 계속해서 해야 하는, 선관위의 일이다. 다른 징징거림은 이미 충분히 족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