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덜 된 논현동 언니들>을 그리는 무명만화가께서 저에게 작품에 대한 소감을 부탁하셨습니다.
이에 짧게, 작품을 한 번 다시 쭉 감상한 뒤에 생각나는 대로의 단상을 답장드렸습니다.
그 답장을 사소하게 퇴고해 올립니다.



1. 컨셉 / 스토리

기본적으로 아주 훌륭합니다. 특히나 매회 다음 회를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배치한 깨알같은 추리극의 요소들은 멋진 기법이라고 봅니다.

2. 미시적인 에피소드

다만 캐릭터에 기반한 에피소드의 풍성함은 다소 약한 느낌입니다. 저 개인적으론 <논현동>은 사회풍자적인 느낌으로 많이 다가오는데요. 전체적으로 그 풍자는 인물들의 내밀한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지 않고, 경제적인 조건이나 구조적인 인식(남/녀의 사회정치적 조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현재로도 아주 상징적인 에피소드지만, 예상가능한 에피소드라서 마치 사회, 경제적인 조건들을 이야기화한 느낌이지, 이야기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조건들이 드러나는 느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이라서 좀더 비유적인 방식이나 숨겨진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가령, 유년이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체험들이 좀더 미시적으로 표현되면 그 풍자가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문구를 굳이 인용하자면,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보다 랭보나 보들레르의 시 속에 현실을 변혁하는 더 큰 정치적인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는 마르쿠제의 전언이 떠오릅니다.

3. 짝패로서의 캐릭터

현재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성형의 불가피함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체화한 인물들인데, 즉, 성형중독자 혹은 성형워너비들인데요. 이런 인물들의 짝패로서 성형수술을 아주 반대하는, 혹은 성형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들, 주변인물들이 배치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인물 배치가 처음부터 이뤄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앞으로도 충분히 그런 인물들을 일종의 '파트너' 혹은 전략적인 '짝패'로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독자가 애착할 수 있는 캐릭터의 구현

현재로선 4인방의 캐릭터가 아직 명시적으로 구현된 단계는 아니라 봅니다만, 저 개인적으로 그 4인방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인 호감이나 또는 연민을 구체적인 감정의 단계로 체험한 인물은 아직 없습니다. 각각의 인물이 갖는 의미론적인 요소들을 좀 더 분명 가져가면 좋을 것 같아요. 더불어 그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알리바이'(독자와의 공감대)를 만들어주시면 어떨는지요? 현재로선 다소 머리가 텅 빈 성형수술 워너비들의 수다에 치중한 느낌이 강해서, 그 인물 하나 하나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인방 중에 문학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도 있을 수 있고, 사회운동에 의외로(?) 관심이 있는 친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단순한 성형미인 워너비의 캐릭터에 좀 더 입체감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더불어 사회가 성형미녀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나 이중적인 시선들도 드러낼 수 있다 보고요. 

저는 성형 미인 워너비들 나쁘다 생각하지 않고, 그네들의 '병맛' 대화에 담긴 고민이 폄하될 필요도 없다 봅니다. 그 4인방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여자들이고, 그게 사회의 부조리가 만들어놓은, 혹은 주입한 '병맛'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러니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적 육체를 세뇌당한 '불쌍한 파블로프의 개'에 불과한 존재라고 해도, 그녀들의 집념과 노력, 그리고 용기 그 자체는 저 같은 유치하고, 이기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 보기엔 아주 훌륭하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녀들을 그저 '병맛 4인방'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병맛 4인방'으로만 기억될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그녀들을 구원해주세요.
저는 그녀들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조금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 단상은 이 정도입니다.
제 단상은 그저, 마땅히 그러실테지만, 사소한 참조로만 삼으시길.
제 부족한 단상이 조금이나마 작품활동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민노씨 드림.


여행 1. 혹은 그 바다에 떠 있던 구름

2012/08/01 14:55

여행은 항상 나에겐 이중적이다. 설렘과 실망의 이미지. “미로 속의 공간은 신비”롭지만, 거기에 들어가면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지는(정현종) 그런 느낌이랄까. 설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행복한 일이지만, 그 설렘 속으로 들어가면 언제든 나는 아이처럼 실망을 만나지는 않을지 조바심을 낸다. 내가 만들어내는 실망이 훨씬 더 공포스럽지만, 내가 만날 실망도 항상 염려가 되는 건 사실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여행은 항상 행복과 두려움의 이미지들이 교차한다. 우리는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속에 빠져서 여행이라는 새로운 곳을 흘러가니까… 하지만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낯선 공간과 시간은 하나의 무대 같은 느낌이라서, 그 무대는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행복한 공간이지만, 하지만 난 노련한 배우는 아니니까. 실수하지 않을까 마음 속에서 심장이 콩콩 뛰는, 그렇게 심장이 뛰는 설렘과 두려움을 누군가 발견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는 아이가 된다.

그 바다, 거기에 떠 있던 구름이 마구 마구 몰려온다.
거기에는 너무 커다란 행복의 이미지와 너무 너무 깊은 슬픔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그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소중해서, 난 아마도 그 구름들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섬: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것

2012/07/23 04:59
사랑한다는 건 그녀의 외모라던가, 목소리에 길들여지고, 중독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오히려 그녀가 만들어내는 어떤 공간이다. 그 공간은 결핍한 당신을 위로하고, 당신의 공허가 항상 꿈꾸던 그런 곳이다. 거기에서 피어나는 풀잎 하나에도 당신은 기뻐 눈물 흘린다. 거기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목숨 마칠 각오가 되어있다. 하지만 당신을 감싸던 그 풍경은 쉽게 사라진다. 그녀는 그 풍요를 언제라도 지워버릴 불안과 결핍을 만들어낸다. 덧없는 신기루처럼, 너무 쉽게, 기쁨은 사라진다. 그리고 당신이 영원히 알지 못할 슬픔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게 비정하리만큼 냉정한 세상의 법칙이다. 대부분의 당신은 어느새 더 공허하고, 굶주린 자기를 발견한다.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그 저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건, 원래 그렇게, 인간에겐 아무런 애정도 없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탓해선 안된다. 당신도 이미 그녀에게 똑같은 결핍과 슬픔을 선물했으니까.

당신은 그녀를, 목적어로서, 사랑할 수 없다. 부버의 말이 맞다면, 다만 사랑은 당신과 그녀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당신은 그녀와 함께 작은 피난처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눈동자, 목소리들은 어떤 풍경을 만든다. 그 눈동자, 목소리가 머무는 곳은 당신의 깊은 그림자 속이다. '그녀'라는 존재는, 신비로운 마법처럼, 당신의 결핍을 일꾼 삼아 소망의 풍경을 만든다. 그리고 당신과 그녀는 '그 곳'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잠시, 우리를 둘러싼 이토록 잔인한 세계를 잊는다. 그리고 함께 영원을 소망한다. 그건 한없이 외롭고, 덧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섬이다.

* 발아점: Ederlezi


에델리지(Ederlezi): 내가 늘 돌아가던 거기

2012/07/20 22:17
기형도를 빌자면, "단 한 줄"(오래된 낙서) 혹은 그르니에식으로 말하면, '다시 돌아가서 늘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어떻게 널 그토록 잊고 지내왔던 걸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

2012/07/15 05:44

deulpul의 글, “시인 이상이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을 읽고 

나는 시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봤자 ‘시의 시대’로 불렸던 80년대의 시들에 한정되긴 하지만. 특히 황지우(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그 전까지만 읽었다)와 박노해('참된 시작'은 별로였고, 노동해방문학의 르뽀시들도 그땐 참 우와! 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노동의 새벽’이 여전히 좋다)가 참 좋았다. 하지만 가장 반복해서 여러 번, 그 여러 번은 한 쉰 번 이상, 어쩌면 백 번 이상 일텐데, 그렇게 여러 번 읽은 시집은 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과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가 거의 유일하다. 정현종의 서늘하지만 따뜻한,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도회적 감성이 좋았고, 장정일의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이나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는 그 객기와 뒤틀림의 감성이 꽤 공감 어리게 신났던 기억이 난다(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별로). 오규원, 황동규, 그리고 황인숙과 유하, 김지하, 이상, 김수영, 함민복 등은 그냥 그때 그때 읽었다. 유하 시집(아마도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 김지하를 인사동 찻집에서 보고 ‘지하 형’이라고 부르는 어떤 후배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잔상은 그런 세속적인 편린들일 뿐이다. 그 밖에 유명하다는 랭보, 보들레르, 발레리, 로트레아몽, 네루다 등의 시를,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 읽었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를 뽑자면, 그건 아마도 황지우나 박노해의 시는 아닐 거다. 아마 네루다의 ‘망각은 없다’나 이성복의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를 뽑을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서처럼 내가 오래전 가장 ‘좋아했던’ 시는 황지우의 ‘나는 너다. 17’이다.

나는 너다. 17

내가 먼저 대접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대안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지금 읽으면 그때만큼 좋진 않지만, 그땐 참 환장하게 좋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낱말들은 너, 바람, 풍경, 무지개, 아이…다. 그 어감이나 조어 자체의 물질감이 좋다기 보다는 그 낱말이 지시하는 이미지의 빛과 투명함이 좋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달고나’도 좋더라. 하얗고, 귀엽고,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