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련  2009/06/24 17:30
반지성주의라는 표현을 밑에서 보고(민노씨 주: 내가 답글로 적은 "이택광씨 블로그는 제가 이택광씨께서 성토하시는 '반지성주의자'인 것 같아서 피하고 있습니다"를 지칭) 나경원의 발언 취지를 다시 보니, 반지성주의의 쌍둥이라 할만한 '반 일상언어주의'가 역시 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 일상언어주의는 파리통 언급하는 제 블로그의 글에서 정리해 본 태도라는.. 어쨌든 반 일상언어주의는 지적 강자의 의무 태만일테니, 지적 약자의 의무 태만에 비해 더 큰 문제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듯 합니다.


1. 탁월한 지적이다.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래서 좀 식상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이지만, 지성주의는 지적 아리까리즘이나 지적 속물근성, 혹은 지적 배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니 그 반대이어야 한다. 왜 그토록 탁월한 지성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세속적 비평'을 주창했는가? 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은 그토록 자극적인 막말(여기에 대해선 때론 비판할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특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류)을 서슴치 않는가? 거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지하철 독서를 위해 한 일년째 내 작은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책이 하나 있다. 대여섯번은 읽었을 것 같다. 블로그에서도 종종 언급하곤 했다. 그래도 읽을 때마다 새롭다. 지하철을 탈 때면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또 읽는다. 마르쿠제가 68혁명의 젊은이들을 위해 바친 [해방론]이다. 거기에 '언어의 계급성'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들은 언어(랭귀지)-말(빠롤)에 지고의 권리를 부여하는 문화를 주장한다. 부르조아 계급이 가공한 언어는 자기 계급의 부속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수 개인들의 부속물인 언어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의사 소통의 양식으로 강요되고 있다. 언어는 의사 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현실인식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 인식 수단으로서의 기존 언어는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지적(知的)이기 때문에 경제적 특권에 의해 사회 생활의 갈등과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정 계급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리용학부 연락기구 Majuscule('대문자'), [어떠한 대학? 어떠한 사회?] 발췌, pp.45~46. 1968.5.29.
정치적 언어학은 기존 체제의 갑옷이다. 급진적 반대파가 자기 자신의 언어를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잠재의식적으로 지배의 가장 유효한 '비밀 무기들' 중 하나에 대항하는 것이다. 법정과 경찰에 의해 유효화된 현존의 법과 질서의 언어는 억압의 목소리일 뿐만 아니라 억압의 행위이기도 하다.
- H.마르쿠제, '변화하고 있는 전복세력들', [해방론](1969, 비콘프레스, 보스톤), 청하편집부 역, p.92. 1984. 
 
3. 어떤 지극히 난해한 언어가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놓는 언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마취된 지성과 감수성을 부수는 해방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어가 소위 지식인들만의 '암호'로 머물러선 곤란하다. 지식인(더불어 '저널리즘')은 그 난해한 언어를 시민의 일상어로 '번역'해야 하는 의무를 가장 우선해서 부여받는다. 폐쇄적인 배타성의 언어로 그 언어를 가둔채로 끼리끼리 즐겁다면, 그렇게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스) 속에서 자신들끼리만 지적 선민의식에 취해 있다면, 그 언어는 지성의 언어가 아니라 반지성의 언어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세속언어' '일상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저련의 논평, 특히 "반 일상언어주의는 지적 강자의 의무 태만일테니, 지적 약자의 의무 태만에 비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은 거듭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더불어 이런 논의의 연장에서 새로운 모바일 혁명의 여명기에 웹 콘텐츠의 생산 및 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자 정보 처리가 인지에서 감성으로 가는 현상"에 대한 아거의 글은 좀더 구체적인 질문과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 참조.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에 대한 김성곤의 해설
현대의 이러한 극도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형식주의적이고 현실과 괴리된 비평에 정면으로 도전한 비평가가 바로 [시작. Beginning]과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다. 사이드는 현대비평은 너무 고답적, 귀족적이기 때문에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것이 보다 더 세속화(worldly)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이드에게 있어서 비평행위는 곧 현실참여가 되고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때문에 이 세계도 곧 하나의 커다란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1983년에 나온 그의 비평서의 제목이 [세계와 텍스트와 비평가 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인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처럼 급진적 마르크시스트 비평가도 아니고, 월터 잭슨 베이트처럼 보수적 극우파 비평가도 아닌 다만 고뇌하고 행동하는 오늘의 지식인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 이후 미국문학비평의 미래는 어쩌면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비평가들의 노력에 의해 밝아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이드는 우리의 주목에 값하는 이 시대의 중요한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

- 김성곤, '신비평 이후의 미국문학비평', [미로 속의 언어], p. 22. 민음사. 1986.

* 관련 링크
국민호구론 : 나경원의 발언에 부쳐
노정태
이런 저런 댓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아거, 터치 시대의 글읽기 2 : 문자를 느낀다?

* 발아점
저련
(이 링크는 저련의 인문사회 공부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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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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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퍼렁어 2009/06/24 22:08

    초등생을 위한 헌법 백과 뭐 이런 책들이 잔뜩 있었으면 좋을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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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6/25 06:46

      백과까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초중고 과정에서 특히 '헌법' 교육을 제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만요...;;; 더 바라자면 헌/민/형 삼법은 중고과정에서 좀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치면 좋겠고요.

  2. 비밀방문자 2009/06/25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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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6/25 06:52

      구구절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을 주셨는데요, 뭐.
      그런데 왜 비밀글로 쓰셨을까나요? ㅎㅎ
      많이 친하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좀 친하다니 서운합니다. ㅋㅋ

      특히 "한겨레가 사회약자와 노동자들을 위한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잘 읽혀지지 않는것처럼 민노씨의 이야기는 모두 구구절절인데 나는 읽기가 좀 어려워요 눈에 잘 들어오지않는 이유가 뭘까요??" 라고 질문을 주셨는데요... 저도 그게 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ㅠ.ㅡ;;

      이 글 쓰면서도 실은 좀 딱딱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고요.
      어찌해야 할는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게 제 스타일(ㅜ.ㅜ;;)이 되어 버린건지..
      아, 고민이고만요.

  3. 비밀방문자 2009/06/25 02:56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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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6/25 06:52

      트리플A형이라는게 있근영! ㅎㅎ

  4. 저련 2009/06/25 13:08

    지적 의무를 쌍무적으로 보는 제 주장을 좀 더 일반화시켜본다면, 지적인 영역에도 롤즈의 정의 원칙을 도입해서 주장을 해 볼 수 있겠군요. 그러니까..

    1. 모든 지적 존재는 지적 주제들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2. 각 지적 존재의 지적 능력 사이에서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오직 다른 지적 존재의 지적 능력을 고무시켜줄 수 있을 때 뿐이다.

    물론 아주 형식적 규범이니까 구체적인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뇌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할 것입니다. 특히 2번은 구체적인 계약의 내용에 따라 매우 다른 구체적 형태를 띄겠죠. 그러나 이 정도로 명쾌한 규범 제시라면, 지적 영역에서의 정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정식화 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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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6/25 23:11

      역시나 흥미로운 논평이십니다. : )

      더불어 위에 종소리님께서도 지적하신 것처럼 일상적인 대중언어의 감수성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은 진지하게 다시 회복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배우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처럼 다소 딱딱한 글쓰기 스타일이 독자의 (정당한) 선입견으로 익숙해진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 것 같아요... 물론 그런 고려가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나 자기 스타일에 대한 억압이 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 억압적 요소를 창조적인 긴장으로 이용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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