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 괄호

2009/05/02 23:56
원래 괄호의 역할은 문맥을 슬림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 이것은 마치 냉장고가, 그 고유의 역할과는 다르게, 버리는 것에 대한 죄의식을 희석시키는 쓰레기 통으로 기능하는 것과 비슷하다.
- egoing, 괄호 중에서

괄호를 애용하는 편이라서 왠지 찔린달까..
한편으론 항변하고 싶달까 뭐 그런 마음이 겹칩니다.

찔리는 마음은 이고잉님의 취지를 잘 알기에, 그리고 그 취지에 충분히 공감하기에 그런 것이고, 그럼에도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괄호가 글이 만들어지는 실존의 호흡으로 생겨나는, 비유하자면, '창조적인 바이러스'인 경우도 없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의미의 전달과 소통은 물론 그 효율성을 염두에 둬야 하겠지요. 다만 그 효율성의 풍경들도 다채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생각하는 그 효율성이란, 때론 평면적이고, 단선적인 인식의 단순화에 이끌리기도 쉽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저는 가급적이면 독자들과의 소통 가능한 실질적인 풍경들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기는 합니다.

다만 여전히 피상적인 효율성의 가치, 오류 메시지에 대한 불안이 너무 강조되면, 우연적인 실존의 떨림으로 생겨날 수 있는 '창조적 오류'가 갖는 가치들의 '누수'도 없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더불어 듭니다.

추.
문장에서 괄호가 갖는 의미를 버려지는 음식물에 대한 일상적인 죄의식(냉장고)과 연결시키는 발상은 참으로 탁월하네요. : )


* 발아점
egoing, 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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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ubject : 창의력의 원천은 부실함

    Tracked from ego+ing 2009/07/24 23:14 del.

    창의력의 원천은 부정확함이다. 정확한 것은 확정적이지만, 부정확함은 불확정적이다. 확정적인 것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창의력은 불확정적인 것, 다시말해 부정확함을 근원으로 두고 있다. 기억만해도 그렇다. 기억이란 참 부실하다. 잘 까먹고, 왜곡되기도 쉽고, 기억 간의 간섭도 쉽게 일어난다. 이러한 부실함이 인생을 고단하게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도 한다. 시스템은 이의 대칭점이다. 시스템의 정확함은 종종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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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르페오 2009/05/03 13:52

    민노 씨를 통해 또 좋은 글을 읽네요. :D
    누구나 글을 쓸 때 괄호를 사용하는 것을 최소로 줄이려고 하지 않을까요?
    친절한 글쓰기를 위해 또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고요.
    그렇지만 egoing 님의 글을 읽으니 그 용법에 대해 또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날이 개고 한적한 휴일입니다. 잘 보내고 계신지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술 한 잔 기울이면 좋겠네요.
    술 좋아하는 승환 님도 불러서 말이죠.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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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3 15:19

      맞습니다. : )
      저는 제 자신 글쓰기에서 가급적 괄호를 줄여야겠군.. 이런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만, 이고잉님의 글을 접하면서 괄호의 용법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잘은 아니고요... 그냥저냥..;;;
      어제는 동네극장 마지막 회에서 '박쥐'를 보려다가... 의외로..매진이더만요.. 역시나 휴일이라서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하루 이틀 미루기로 하고, RSS 리더를 읽어내려가다가 첫줄에 박쥐에 관한 스포를 유출하는 꽤나 좋아하는 어떤 블로거벗의 글을 읽고 참으로 뜨아했더랍니다. ㅡ.ㅡ;;

      맥주 한잔 좋죠! ^ ^

  2. Noname 2009/05/03 20:12

    재미난 글이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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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4 20:00

      별말씀을요, 이고잉님께 고마운 일이죠. ^ ^;

  3. 검은괭이2 2009/05/03 22:22

    헉... 저도 괄호를 많이 쓰는 편인데...... 왠지 슬프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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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4 20:01

      아이코, 슬플 것까지야.. ^ ^;

  4. ginu 2009/05/03 23:23

    저도 괄호를 즐겨(게다가 일부러) 사용하는데... 좀 뜨끔하긴 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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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4 20:02

      저도 때론 습관처럼 사용하기도 하는데, 좀 뜨끔하더랍니다. ㅎ

  5. egoing 2009/05/03 23:53

    창조적 가치의 누수는 멋지고 의미심장한 표현인데요? 괄호와는 거리가 있지만, 또 다른 의미의 창조적 떨림에 대한 엉뚱한 트랙백 하나 걸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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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4 20:04

      별말씀을요, 그저 약간은 반대를 위한 반대인 것 같아서 좀 민망뻘쭘합니다. 이고잉님께서 말씀하신 냉장고 비유는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 )

  6. 여형사 2009/05/06 18:13

    괄호와 냉장고... 정말 절묘한 비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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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6 18:36

      맞습니다! ^ ^

  7. egoing 2009/07/24 23:15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트랙백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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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7/26 19:56

      죽어가는 글에 물을 뿌려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 )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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