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테메 (epistēmē)

2009/04/30 14:13
에피스테메 (epistēmē)

0. 요약.
어느 시기에만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바꿔 말하면 어떤 시기를 그 시기로 특징짓는(시대구별의 표준이 되는), 앎(지식)에 대한 (비가시적인) 인식 토대로 작용하는 관계들의 총합. 푸코 본인의 말을 빌자면 "일정한 시기에 있어서 인식론적 형상들, 학문들, 그리고 형식화된 체계들을 낳게 하는 언설적 실천들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체"(지식의 고고학)

위 간략한 에피스테메에 대한 요약을 읽어본 독자들은 대체로 동의하겠지만, 읽어봤자 아리까리한 건 여전한 그런 개념이라고 개인적으론 생각하는 바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 흔히 비교되기도 하는데(이광래의 '미셸 푸코'에서는 이에 대해 꽤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에피스테메는 쿤의 '패러다임'과는 구별되는 푸코만의 고유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함축해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은 "역사적인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인, 선험적인 개념)"이라는 말인데, 역시나 즉각적으로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하는데, 이 역시도 아리까리하기는 마찬가지다(덧. 저련의 댓글 논평 참조)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특히 서설에서 '언술' '담론'에 대한 서술들은 이 '에피스테메'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실천적인 예시'로 적당한 시사점을 주지 않나 싶은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인다. 특히 "언설적 규칙성들의 수준에서 학문들을 분석하고자 할 때 제반 학문들 사이에서 일정한 시대 동안 발견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미셸 푸코)라는 지적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 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자 "동업조합적 제도"라고 말하는 것과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의미론적인 울림을 준다.

아래에서 인용한 문장들은 이 '에피스테메'를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을 주는 미셸 푸코에 대한 평론서에서 옮겨온 것이다(물론 저작권 문제되면, 아무래도 비평을 위한 인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적으니, 바로 삭제할 예정이시다...;;; 이런 책 별로 살 것 같기도 않은데, 이렇게나마 노출도를 높여주는 차원에서 넉넉한 해당 출판사와 저자의 이해가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이런 글이 있는지 저자나 출판사가 발견할지도 의문이기는 하지만... )


1. 푸코와는 별 상관없는 에피스테메
에피스테메 [(그리스 어)epistēmē]
[명사]<철학>
1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이르는 말.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실천적 목적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원리 및 원인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이르는 말.

에피스테메
과학적 지식, 직업적 ·전문적 지식, 지식 일반을 가리키는 말.

철학용어로서는 실천적 지식(프로네시스)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지식, 또는 감성에 바탕을 둔 억견(臆見:독사)과 상대되는 참의 지식을 말한다.독사와 에피스테메의 구별은 이미 파트메니데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한 것은 플라톤이다. 그는 에피스테메와 에이도스를 밀접하게 관련시키면서 독사와 아이스데타(감성적으로 파악된 것)에 대립시킴으로써 참된 지식의 위상(位相)을 인식론적 ·존재론적으로 규명하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

2. 김현의 푸코 연구서인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설명하는 에피스테메
3) [말과 사물](1966)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그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것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것은 어떤 시기에 인간에 대한 온갖 종류의 앎의 밑바닥에 있는 심적 하부구조이며, 역사적인 아 프리오리를 구성하는 개념 장치이다.

푸코가 과학사나 일반 사상사와 혼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에피스테메의 역사는 에피세테메에 의해 구분되는 역사권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을 강조한다. 안정되고 항구적인 대상에 대한, 더 충실한 해석이나 더 현실주의적인 이해의 방향으로 가는 지식 체계를 그 책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그 책은 오히려 네 개의 에피스테메(민노씨 주: 르네상스 1500~1660 - 고전주의 1660~18000 - 근대 1800~1950 - 1950년대 이후) 사이에 존재하는 수수께끼 같은 불연속을 분석한다. 그 에피스테메는 17세기 중엽까지 지배한 전-고전적 에피스테메, 180세기말까지 그 뒤를 이은 고전주의적, 현대적(민노씨 주 : 이광래는 "근대"로 번역하는 걸, 김현은 "현대"로 번역한다. 둘은 같은 표현이다), 그리고 끝으로 1950년경 이후에야 형성된 동시대적 에피스테메이다. [말과 사물]에서는, 첫번째 에피스테메와 마지막 에피스테메는 개괄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고전주의적, 현대적 시기의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의 계기를 묘사하고, 인과적으로 그것들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 푸코가 노리는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드러내놓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데, 고의적으로 에피스테메 변화의 원인이라는 문제를 피해한 것이다. (Merquior, Foucault ou le nihilisme de la chair. P.U.F. p42.)

푸코가 고의적으로 에피스테메 변화의 이유 규명이라는 문제를 피해간 것은 그가 개념사를 중요시하는 바슐라르, 카바이예스, 캉기예의 현대과학사학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스승이었던 캉기옘은 40, 50년대의 프랑스 인식론을 지배한 바슐라르의 제자이며 후계자이다. 그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그의 인식론의 중요한 분석 도구로 이용했으며, 그것은 불연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많은 프랑스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바슐라르와 매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알튀세르까지 그 개념을 이용하여, 마르크스의 존재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이론의 밑바닥에는, 과학적 인식과 일반적(상투적) 인식 사이에는 단절이 있으며(그 단절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 인식론적 방해물들이다), 과학적 인식의 획득은 지식의 축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발견에 의거한 단절에 의해 얻어진다는 생각이 숨어 있으며, 그 생각의 더 밑바닥에는 인간의 사유는 오류에 의거해 있으며, 인간은 계속적인 교정에 의해 그 유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는 오류의 이름이 숨어 있다. 오류는 그러므로 악덕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 자체이다. 오류에 대한 위협적 언사는 오류의 교정이라는 치료술적 언사로 뒤바뀌고, 단절은 당연한 인식론의 한 범주가 된다. 푸코는 그 바슐라르의 학파에 속해 있다. 그의 단절은 그러므로 역사 이해의 결여가 아니라, 그의 이론적 성찰의 당연한 결과다. 역사를 계속적인 교정의 연속으로 본다면, 역사의 인과론적 설명은 그 의미를 거의 잃게 된다. 아무런 내적 논리 없이, 마치 산소가 갑작스럽게 발견되어 연소라는 현상이 설명되듯, 에피스테메들이 계기적으로 나타난다면, 인과 관계보다 현상의 의미가 더 중요시될 것이 틀림없다.

푸코를 뒤따라가자면, 전-고전적 에피스테메는 유사성과 조응의 에피스테메다. 그런데 갑자기 17세기에 유사성과 조응의 에피스테메가 붕괴하고 재현의 에피스테메가 나타난다. 그것은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의 넋이며,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말까지를 지배한다. 19세기부터,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는 조종을 울리고, 역사가 전명에 나서게 된다. 질서의 역사로의 변화이다. 사물들은 도표에서 해방되어, 그 내석 공간을 드러낸다. 내적 공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대적 에피스테메의 범주는 인간학적이다. 그것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성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 시칠리아의 암소, 김현문학 전집10, 문학과 지성, 1992. pp.181~182.

3. 이광래의 [미셸 푸코]에서 설명하는 '에피스테메' (이하 괄호의 숫자는 해당 책의 페이지수를 표시)
그는 역사의 연속성과 전체성이라는 도그마를 거부하면서 사상사의 리듬을 부여하는 본질적인 단절과 변화에 대해 역설한다. 즉, 지(知)의 질서에 있어 인간의 지각이나 관행을 일변시키는 불연속성을 명백히 드러내려 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어떤 사대의 앎을 구성하는 요소는 데카르트와 칸트, 또는 헤겔과 같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이름을 숨김으로써 이들의 이름과는 무관하게 생산되는 일련의 언설에 있다. 헤겔에서 있어 사상사는 인간의 의식적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며, 이러한 논리는 일원론이라는 철학적 진리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 사상사는 의식의 어떤 일반적인 모델로도 환원될 수 없다. 사실상 모든 시대의 언설, 즉 앎의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말해지는 것'의 총체를 생산한다. 이에 따라 그가 계획한 역사연구도 어떤 시대의 episteme를 구성하는 언설의 총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에피스테메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을 논하지 않으며 하나의 에피스테메 내에 있는 사상가들은 그 이전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다.(79)


...[계보학]이라는 용어로 푸코가 자신의 평생 동안의 연구방법을 조명한 경우를 살펴보자. 푸코는 1983년 미국의 버클리대학에서 레비노우, 드레이퍼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계보학에는 세 가지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자신을 지식의 주체로 구성하는 진리에 관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다.
둘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체로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권력분야에 관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다.
세재, 우리가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윤리에 관한 역사적 존재론이다.
이와 같이 계보학에는 세 개의 축이 있을 수 있다. 이들 세 개의 축은 [광기의 역사]에서는 다소 뒤섞여 있었지만, 모두가 각각 등장한 바 있다. 진리의 축은 [임상의학의 탄생]과 [말과 사물]에서 연구되었고, 권력의 축은 [감시와 처벌]에서, 윤리의 축은 [성의 역사]에서 연구되었다. (Paul Raninow, The Foucault Reader, Penguin, 1984, pp.351~352).
이상에서 보듯 푸코의 사상적 파노라마는 굳이 '계보학'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더라도 초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푸코 나름대로 정의한 에피스테메와 연관된 언술형성으로서의 앎에 대한 분석이었다. (84)


...... 푸코에게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사유방식의 경계가 무엇인가? 우리의 현대 서구인들은 어떻게 현상을 질서지우는가?
푸코의 인간과학의 고고학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역사적인 전망 속에 제기된 하나의 대답을 제공하려는 시도다. 푸코는 이 책(말과 사물)의 머리말에서 "모든 문화에 있어서 질서정연한 규약이라 불리우는 것의 사용과 질서 자체에 대한 반성 사이에는 질서와 그것의 존재양태에 대한 순수한 경험이 놓여 있다. 이 연구는 그 경험을 분석하려는 시도이다"(푸코, '말과 사물'(1966), 이광래역, p.13. 민음사, 1987)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말과 사물]의 주제는 경험에다 질서를 부과하는 근본적인 문화적 규약들(codes)이다. 즉 그것은 "어떤 질서의 공간 내에서 지식이 구성되었으며, 어떤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선험적 관념)에 근거하여, 그리고 어떤 실증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이 출현했고, 학문이 구성되었으며, 경험이 철학 내에서 반성되었고, 합리성이 형성되었고, 그리고 얼마 후에 해체되고 소멸해 버렸는가에 대한 탐구이다."(푸코, '말과 사물'(1966), 이광래역, pp.19~20. 민음사, 1987) 따라서 푸코는 이처럼 "사유의 어떤 형식을 필요케 하는 그런 것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해 '고고학'이라는 상표를 골라냈다. 고고학은 필연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이고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사유형식들-푸코는 이것을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을 다룬다.
그에 의하면 에피스테메는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선험적 관념)'다. 그것을 일군의 다양한 언설을 지탱하는 감춰진 질서이다. 그것은 앎 바로 밑에 누워 있는 조직이며 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의 피안에 있고, 어떤 시대 또는 어떤 영역에 있어서도 학문에 무의식적인 골조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일정한 시대에 우리 인식의 지평과 문화적 구조를 가능케 하는 하부구조를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 그것은 지식의 공간에 배치된 경험의 근본적인 존재양식, 역사적 과정에 내재해 있는 구조의 필연적 체계, 혹은 일정한 시대의 특징적인 지식과 눈에 드러나는 역사의 줄거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의 총체다. 그에 의하면,
에피스테메는 일정한 시기에 있어서 인식론적 형상들, 학문들, 그리고 형식화된 체계들을 낳게 하는 언설적 실천들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체이다. .... 에피스테메는 매우 다양한 학문 영역들을 넘나들면서 하나의 주체나 정신 또는 어떤 시대의 지배적인 통일성을 나타내는 인식의 한 형태나 합리성의 한 유형이 아니다. 그것은 언설적 규칙성들의 수준에서 학문들을 분석하고자 할 때 제반 학문들 사이에서 일정한 시대 동안 발견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다.(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갈리마르, 1969, p.250)
이처럼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일정한 시대 동안의 언설=실천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체(서구 사상에 있어 여러 시대들을 특징지우는 관념적인 층)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란 곧 고고학적 모델을 발견해내는 일이었다. 때문에 푸코는 [말과 사물]의 영어판 서문에서 이른바 사상적 고고학을 가리켜 "무형식의 지식체계에 대한 역사"라고 표현한 바 있다. (144~146).

- 이광래, '미셸푸코', 민음사, 1989.


* 재밌는 관련글
블로거 선민이 쓴 '표절발견'이란 글에 따르면, 위 이광래의 글은 김현의 위 인용에도 등장하는 브라질 학자라는 메르키오르(Merquior. 위 김현이 인용한 그 책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메르키오르가 쓴 푸코에 관한 연구서)를 표절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물론 진실이야 난 모르겠다. 이광래의 [미셸 푸코]는 대단히 망라적으로 미셸 푸코의 철학적 연대기를 기술하고 있기를 하지만, 위 선민이 지적하는 것처럼 종종 어색하기 짝이 없는 번역투, 망라적인  '짜깁기' (인용)의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김현의 책은 반면 너무 단편적으로 분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적어도 김현의 '호흡' 안에서 푸코가 다뤄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광래의 글의 호흡과 구별된다. 물론 김현도 인정하는 것처럼 이광래의 '푸코 관련 서지'는 거의 모든 관련 서적들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청나게 꼼꼼한 서지인데, 솔직히 저 많은 글들 가운데 얼마나 읽었을까... 싶은 유치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려니와, 저 많은 책들을 참조하면서 저자 스스로의 관점이 상당부분 지워진 것은 아닐까 싶은 의구심도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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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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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련 2009/04/30 16:20

    역사적 아프리오리라는 말은 칸트의 a priori를 염두에 두고 했을 법 한 말입니다. 다만 칸트에게서 저 속성이 포함되는 것들은 transendental한 것들인 반면, 즉 모든 정신에 들어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구조인 반면 보편성이나 객관성이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푸코의 독자적 용법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가 에피스테메를 사용하면서 칸트를 명시적으로 언급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서양철학에서 칸트의 지위를 생각하면 비슷한 개념이 있을 경우 그의 개념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의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물론 푸코의 독자적인 수정은 절대로 아니고, 제 얕은 독불철학 지식으로도 해석학의 아이디어를 따 와서 칸트의 선험성을 개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푸코의 업적이라면 그것이 구체적인 학문적 작업들 속에서 실제로 있고, 역사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쿤의 패러다임은 칸트의 transendental한 것이 분석철학에서 어떻게 개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쿤이 시행하는 수정의 중요한 전거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이 경우는 해석학처럼 문헌연구라는 경험적 연구에서 발전되어 나왔다기보다는, 우리의 개념체계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당시 분석철학의 전제에 대한 도전으로서 언어에 대한 화용론적 입장을 채택하고자 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기획 위에서 채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천재 스타일이라 칸트를 면밀히 검토했을지도 좀 의심스럽긴 합니다.. 또 이런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자체가 푸코에게 영향이 있었을 가망이 있는데, 그건 뭐 푸코에 대한 전기적 연구를 잘 뒤져봐야 아는 일이니 대충 그럴 수 있다는 것 정도만 짚어둬야 듯 합니다.
    F는 독불철학, K는 영미철학의 맥락에서 각각 개념 체계들의 역사적 상대성을 주장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요약하면 될 껍니다. 모두 결국 개조하려고 덤벼든 상대 이론은 칸트의 지성 이론이고. 공부할수록 칸트는 정말 태산준령과도 같습니다.

    사실 현존하는 유일한 <말과 사물> 한국어판은 꼼꼼히 따져 읽을 것이 아니고 푸코의 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그려내려 하는 독자에게는 충분한 번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장을 뭉개고, 단어선택 꼬이고, 조금씩 생략하고 뭐 이런 정도겠죠. 물론 <지식의 고고학>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경험적 논증을 하려는 책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일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경제성은 충족시켜주니 한국어판을 보고 다른 언어 판본을 대조하는게 꼼꼼한 독자에게 유용한 방법일 듯 합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4/30 17:43

      우선 깊이있는 보충논평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조만간 카페 5주년을 맞는다는 공지를 읽었는데, 5주년 미리 축하드리고요.
      ( http://cafe.naver.com/abcde1 )

      리승환 동무의 릴레이에도 참여하셨었네요.
      흔적을 발견하고 참 반가운 마음이 들더군요.
      ( http://kigike.tistory.com/111 )

      칸트에 대해선 책을 몇 권 사긴 했습니다만, 읽는 시늉만 내다가 말아서 제다 딱히 답할 내용을 찾지 못하겠습니다만,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 중에서 '계몽주의, 현대성, 성숙성'(부제 : 푸코-하버마스의 칸트 해석에 대하여)이라는 장에서는 논평해주신 바와 연상되는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간단히 옮기는 이런 문장들이죠.

      ~~~ ~~~ ~~~ ~~~ ~~~

      계몽주의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른 시대다. 다시 말해 계몽주의는 자신의 현재성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철학적 기능 중의 하나다. 1784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 대답하려 한 칸트는,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난 지 약 9년이 지난 뒤에, 자신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진 다른 사건을 다룸으로써 거기에 대답하려 한다. 그가 1798년에 던질 질문은 대혁명이란 무엇인가이다. 그에게서 흥미있는 것은 그가, 큰 사건들에서 진보의 기호를 찾아서는 안 되고, 덜 위대하고, 덜 지각적인 사건들에서 진보의 기호를 찾아야 하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혁명에서 기억의 가치가 있는 것은, 혁명의 드라마나, 혁명적 움직임, 위엄 따위가 아니라, 혁명이 드러나는 양태, "혁명이,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주시하고, 목격하고, 거기에 이끌려 간 구경꾼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양태"이다. 진보의 증거를 이루는 것은 혁명적 전복이나 혁명적 과정이 아니다. 혁명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열광에 가까워지는 열망의 공감'이 중요하다. 혁명의 주된 배우가 아닌 자들의 머리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들이 자기가 주역 배우가 아닌 혁명과 맺는 관계"이다. 혁명에 대한 열광이야말로, 칸트에 따르면, 인류의 도덕적 기질의 표현이다. 그 기질은 두 방식으로 표현된다. - 하나는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정체를 구성하련느 방식으로, 또 하나는 공격적 전쟁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혁명에서 의미 있는 것은 그런 정체를 향한 인류의 열망이다. 혁명은 그것을 주목한 사람들의 열광덩어리지,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전복 원칙이 아니다.

      자기들에게 걸맞는 정체의 선택, 전쟁을 피하는 정체가 바로 계몽주의의 과정 자체이며, 그 계몽주의의 과정 자체가 혁명이다. 그 둘은 그러므로 절대 잊혀질 수 없다. 그것은 인류의 기질 자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푸코의 결론 :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와 혁명이란 무엇인가는 칸트가 자기 자신의 현대성을 문제삼은 두 형태다. 그 두 질문은 19세기 이후의 모든 현대 ㅊ러학을 사로잡은 질문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그것의 큰 부분을 사로잡은 질문이다. 여하튼 서구 현대성을 세운 특이한 사건으로서의 계몽주의와 이성의 역사 속에서 합리성과 기술이라는 형태의 설립과 발전, 앎의 자율성과 권위 속에서 드러나는 영구적인 과정으로서의 계몽주의는 사상사의 한 삽화에 지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은 18세기 이래 우리 사유 속에서 인각찍힌 철학적 질문이다"

      칸트는 푸코가 보기에 두 개의 위대한 비판적 전통을 세운 철학자이다. 그의 비판서에서, 그는 진정한 지식이 가능해지는 조건의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의 전통을 세웠으며, 그것은 진실의 분석 체계로 발전하게 된다. 또 하나의 전통은 우리의 현재성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따지는 전통이다. 그것은 진리의 분석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존재론, 우리 자신의 존재론이다. 그 자신의 언명에 의하면, 푸코의 철학은 후자의 존재론이다. 그가 꾸민 계보에 의하면, 그것은 헤겔에서, 니체와 막스 베버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이어지는 철학이다.

      이 글(/강의)에서 푸코는 매우 논란이 많을 두 개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나는 칸트의 어떤 텍스트들은 그의 비판서들과 달리 현재(/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칸트 이해의 길을 연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을 누가 뒤따르고 있는가? 또 하나는 푸코 자신은 헤겔, 니체, 베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갈래의 빌판을 야기시키는데, 헤걸, 니체, 베버,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과연 하나의 틀 속에 가둘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그 비판을 이룰 것이고, 푸코를 신-보수주의라고 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하버마스의 비판이 그 한 비판을 이룰 것이다. 그 비판을 푸코가 견디어낼 수 있을까 없을까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푸코는 조금도 풀어주지 못한 채, 다시는 가둘 수 없는 바깥으로 떨어져나간다. (218~220).

      ~~~~ ~~~~ ~~~~ ~~~~ ~~~~

      좀더 옮겨적거나, 풀어서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나중으로 미뤄야겠네요... ㅡ.ㅡ;


      추.
      '말과 사물'은 솔직히 잘 안읽혀서요...
      조만간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련님의 조언을 염두에 두고 있겠습니다.
      논평에 다시금 고마움을 전합니다.

    • 저련 2009/04/30 18:10

      칸트에게서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반성을 찾으려 하는 것이 푸코의 기획이라는 게 김현의 주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정리 좀 해보면서 했던 생각이지만, 칸트가 특히 <순수이성비판>에서 했던 기획과 푸코의 집중 대상이 완전히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a와 not a로)나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은 확실히 적절한 듯 합니다. 물론 정당화를 위해서는 험난한 길을 거쳐야만 할 것입니다만.

      말과 사물을 통한 푸코의 기여는 철학사가 아니라 경제학사, 생물학사, 언어학사를 통해 인문과학 전체에 공유되고 있던 개념체계가 있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를 정당화했다는 데 있는 듯 합니다. 즉 집중 대상이 철학사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칸트 <순수이성비판> 에서 전개된 초월적 감성/지성 이론 및 이성 이론과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일단 결코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유추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민노씨 2009/04/30 18:39

      그래도 일반적인 언어 용법에 가깝게 서술된 송두율의 짧은 논문(언젠가 사회와 사상에 게재한 '포스트모더니즘, 보약인가 독약인가')는 제가 지금까지 읽은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계몽주의 옹호파(?)와 푸코(를 비롯한 프랑스 일군의 사상가들)를 위시한 '반인간주의'의 대립 관계를 가장 알기 쉽게 풀이한 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칸트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에 대해선 제가 칸트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덧붙이기 어렵습니다만, '계몽의 변증법'와 하버마스의 '계몽의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연장으로 자신의 사상적인 계보를 설정하는 푸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와 갈라서는 지점은 '이성'과 '주체'에 대한 태도,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평이한 일반 어법으로 풀자면(물론 제가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요), 하버마스가 칸트의 총체성에 대한 미련을 품고 있다면, 푸코는 칸트를 하버마스와는 달리 해석함으로써, 그 총체성에 대한 회의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버마스가 푸코를 '신-보수주의자'라고 비판한 취지는 오히려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그 명징한 역사적 사실(양차 세계대전과 핵실험, 환경 파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화 등)를 비판적으로 고려한다면, 하버마스의 입장이 오히려 너무 낙관적이거나, 혹은 순진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무정부주의자'라는 비판은 어울릴 것도 같지만요.

      즉 '인간(성)'을 구성한다고 믿어지는 이성이라는 것, 그 이성 자체에 내재된 폭압성, 그리고 그 폭압성에 개입하는 권력과 지식의 담합들을 역사적인 실증을 통해 풀어내는 푸코의 담론이론은 오히려 하버마스의 점점더 잔인한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계몽이라는 미완프로젝트'보다는 좀더 실천적이고, 좀더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추.
      웹상에서 돌아다니는 짧은 PDF형식의 논문 가운데는 '푸코이론이 회계학에 미친 영향'(정호웅 경상대 교수)라는 흥미로운 글도 있더군요.
      ( http://iss.gsnu.ac.kr/upfiles/ssresearc ··· 2585.pdf )

  2. leopord 2009/05/01 00:43

    <오리엔탈리즘> 소개글도 함께 잘 읽었습니다. 사이드는 춈 훈륭한 듯... (;;;)

    전 이진경이라는 틀을 통해서 푸코를 간접적으로, 그리고 좀 더 정치학적으로 걸러읽지 않았나 싶군요(그의 <철학과 굴뚝청소부>, <맑스주의와 근대성>, <철학의 외부>가 저의 밑천 전부였습니다.OTL).

    푸코와 하버마스 둘 다 결국에는 칸트를 앞에 두고 싸운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순수이성비판>을 아직 접해보지 못했지만... 현대철학은 정말 좋든 싫든 플라톤과 칸트와 마주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칸트> 같은 책도 참 흥미롭습니다. (http://sigwriting.egloos.com/1235981 제가 참 좋아하는 블로거의 촌평입니다.)

    푸코와 들뢰즈에 대해 간만 본 것이 벌써 5년 전 일;; 지금 읽고 있는 분야(경제학)와 결별할(!) 그 날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르겠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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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5/02 00:19

      이진경씨를 통해서 푸코를 주로 접하셨군요. : )
      저는 마크 포스터나 레비나우, 김현이나 이광래 등의 푸코 비평서나 포스트모던과 관련한 잡다한 잡지들의 짦은 논문들, 혹은 유행처럼 쏟아져 나온 비평서들(가령 그 중에서 그래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강내희가 편저한 '포스트모더니즈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도 맞나 모르겠네요. 강내희가 관여한 두 권, 하나는 대표적인 논문들을 번역해서 묶은 것과 다른 하나는 주로 소장 영문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문을 써서 묶은 것 이 두 권의 책들 가운데 후자)을 통해서, 또는 (탈)구조주의(이것도 역시나 무슨 유행처럼 책들이 쏟아져나왔던 기억이 있네요)와 관련한 비평서들을 통해서 그리고 수박겉핥기식으로 뜨엄뜨엄 읽은 푸코의 저작들('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 '성의 역사123'.. 이상하게 '감시와 처벌'은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영미권 학자들의 관심사가 푸코의 '권력이론'이었기 때문에, 역시나 우리나라의 학자들 역시 이런 부분을 자주 다뤘고, 그래서 간접적으로 많이 접했다고 느꼈기 때문인가싶기도 하네요.)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솔직히 이상의 책읽기들은 현재 솔직히 저에게 남긴 것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없다는 것이 좀더 정확한 소감이겠습니다. 물론 가장 크게는 제가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가 그 이유겠고, 제 지적인 역량이 부족해서가 그에 버금가는 이유겠습니다만, 언젠가 조혜정이 이야기한 것처럼('식민지 지식인의 삶읽기와 책읽기' 이것도 제목이 맞나 모르겠네요. 그 중에서 2권은 말고 1권) 때로는 지적 속물근성이랄까, 지적 현시욕을 위해서 별 감흥도 깨닫음도 또 스스로 책을 통해 대화할 수 있는 여지도 마련하지 못하고, 그저 읽기 위해 읽는달까요.. 그런 것을 느껴서,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를 잃었달까, 게을러졌달까.. 아무튼 복합적인 원인으로다가 이런 철학서들을 읽는 걸 그만 뒀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랬다는 것입니다... ^ ^

  3. 박동찬 2011/05/04 13:09

    공돌이도 이해 가능하도록 좀 간단하게 써주세요... 댓글의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런 문장은 공돌이의 background process 를 zombie 화 시키며 memorry rick 를 발생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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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5/07 15:09

      네, 주신 의견 깊이 새기겠습니다. ^ ^

  4. kloud 2012/02/11 02:42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수집욕에 의해.. 인용되어있는 부분 펌했습니다.. (문제가 될 경우 삭제 할께요!)

    제가 듣기론, 책의 부분 인용은, 어느정도 홍보효과도 있어서 크게 문제시 되지 않는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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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2/02/11 07:12

      시간이 허락하시면 아래 글들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http://www.minoci.net/52
      http://www.minoci.net/94
      http://www.minoci.net/164
      시간이 없다면 http://www.minoci.net/710 만이라도 : )

      정말 시간이 없으시면 아래 조문과 판례만 읽으셔도 됩니다

      저작권법 제28조 (공표된 저작물의 인용)
      공표된 저작물은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하여는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이를 인용할 수 있다.


      * 관련 판례
      28조상 '정당한 인용'의 조건(피인용저작물과 인용저작물의 관계)
      ㄱ. 그 인용의 범위는 표현형식이나 인용목적 등에서 피인용저작물이 보족, 부연, 예증, 참고자료 등으로 이용되어 인용저작물에 대하여 부종적 성질을 가지는 관계에 있어야 하고,
      ㄴ. 인용의 정도에 있어서도 피인용저작물을 지나치게 많이 인용하거나 전부 인용하여 원저작물에 대한 시장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서는 아니되는 등 인용이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
      (출처 : 서울고법 1996. 7. 12. 선고 95나41279 판결:확정【손해배상(지) 】[하집1996-2, 318])

    • Kloud 2012/02/12 03:00

      답글 감사합니다. 제가 몰랐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많네요..
      링크해주신 글이 길어서 일단 마지막 것만 읽어봤는데요... 나머지는 나중에라도 꼭 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 민노씨 2012/02/15 01:19

      별말씀을요. : )
      조금이라도 참조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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