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아점
책을 읽다 짜증을 내다 (바하문트)

1. 우리말(의 형태)은 의미를 함축하기 보다는 의미를 풀어 놓는 방식과 훨씬 더 친하다고 나는 느낀다. 이게 무슨 국어학 지식에 근거한 의견은 아니고, 글을 쓰다보니 저절로 얻게 되는(느끼게 되는) 경험칙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말에서 조사나 부사, 용언(형태)의 (과도한) 발달은 그런 성격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 문장 주체의 신분에 대한 언어적 배려(쉽게 말해 '존칭/존대')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단순한 문화적인 환경이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가령 비교적 최근에 썼던 'deserve'만 하더라도, 여기에 해당하는 명료한 단어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디절브'라고 말하는 입장(쓰는 입장)이나 듣는 입장(읽는 입장)을 상상해보면 대단히 명료하다. 그건 단어 자체가 웅변한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할만 하다' '~할 만한 자격이 있다' '~얻을 만하다' 라는 우리말로 말하거나, 쓰면 그 의미가 다소 헐거워진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적당' '합당' '자격' 등의 유사 의미로 한정하기엔 'deserve'란 단어가 갖는 단호하고, 명료한 울림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사상과 감정이 언어로 고정되는 과정에는 많은 환경적인 제약이 당연히 뒤따른다. 가장 커다란 제약은 언어 그 자체에 내재된 형태의 차이(문법의 차이), 그 문법에 내재된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에 의한 제약이고, 그건 아주 본질적인 제약 가운데 하나다.

2. 한편, 문학이란 그 자체로 세계라는 텍스트에 대한 개별 작가의 '비유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다. 그렇지만 앞서 간략히 지적한 한국어 서술 형태와 영어 동사의 형태 차이, 그리고 문학 일반에서 갖는 비유의 중요함을 인정하더라도, 비유의 과도한 사용은 언어의 설명 기능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명료한 의미 전달을 방해한다. 그런 일차적인 설명 기능이 약화된 뒤에는 아무리 심오하고, 아름다운 비유가 사유와 감정의 풍경들을 풍성하게 가꾸더라도, 그건 언어를 위한 언어, 자기 만족을 위한 작가들끼리의 '암호'가 되버리기 일쑤다.

소위 글쟁이들의 '비유를 위한 비유'들에 대해선 나 역시 종종 짜증이 샘 솟는다. 그건 마치 비유하기 위한 비유 같다. 자신과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좀더 정확하게, 좀더 풍성하게 풀어 놓는 고뇌와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언어 강박증, 비유 강박증, 유치한 장난질 같다.

언젠가 어떤 작가(비평가)는 세계라는 텍스트의 진실을 설명해 줄 단 하나의 표현이 존재하고, 그 표현을 찾아 작가들은 여행한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아마도 신비평의 입장에 선 누군가가). 나는 물론 세계라는 텍스트의 진실이 단일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을 통해 재현된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비유를 위한 비유들이 넘쳐나는 '울렁증'의 시대에 작가는 그 하나의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작가에 대한 영원한 잠언들 가운데 하나다.

3.
"그 글이 잘 쓰인 글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잣대 중 하나는 외국어로 번역을 해보면 된다는 것." (바하문트)

물론 비유 강박에 걸린 글을 읽은 짜증, 그 후유 상태에서 쓴 다소 과장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과장이라는 점을 넉넉히 인정하는 바탕에서 좀더 생각해보면, 이 지적은 매우 재밌고, 의미있는 지적이다. 위 지적은 아틸라가 영어 못하는 나를 위해 썼다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댄 브라운의 진짜 재능은 아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주제에 대한 따분한 연구와 조사와 탐구 과정을 마치 할리우드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그의 필력이다. 그 필력의 비밀은 바로 위에서처럼 생기 넘치고 발랄한 동사다. (김현, OTL English, '따분한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요령', p.260)

작가 자신의 사변적인 인식, 그 풍경을 확장하기 위한 비유와 그에 따른 용언의 사용은 때론 매우 필요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그저 사변 그 자체에 그치고,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자기치장적인 매너리즘에 그친다면 독자도 잃고, 자신도 잃는 지름길이다.

댄 브라운과 같은 작가들은 (글 읽는 독자의) 쾌락(영화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는)을 위한 글을 쓴다. 그러기 위해 동사를 적극적인 활용하고, 그것은 매우 의도적일테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권장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바 '문학을 위한 문학'의 풍토에 여전히 함몰되어 있는 우리 문단에서 작가의 사변적인 인식을 주저리 주저리 고백하는, 아니 차라리 강박증에 걸린 듯이 '비유를 위한 비유'를 늘어놓는 풍경들은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실은 요즘 주목받는다는 소설이나 시, 평론들은 잘 읽지 않아서 큰 체험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간헐적인 체험치에 의한다면 여전히 고리타분한 '말을 위한 말, 비유를 위한 비유들'은 마치 문학의 전통처럼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연장에서 김훈의 글이나, 공지영의 글이 대중들에게 호응받는 이유들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하다. 김훈과 공지영은 작가의 사념을 치장하는 비유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글을 쓴다(혹은 쓴다고 한다). 김훈과 공지영의 글들은 짧게 서술하고, 그렇게 사건과 인물들의 객관적인 행동들을 지시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충족시켜 나간다.

사족이지만, 나는 김훈과 공지영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지영은 특히나 단편적으로 신문연재를 통해 간헐적으로 읽었을 뿐이라서 이 판단은 선입견이라는 점을 밝힌다. 영화 '우행시'와 소설 '우행시'가 별 차이가 없다면, 공지영은 인터뷰에서 대충 만족스럽다,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 영화도 소설도 대단히 실망스럽다. 그러니까 좀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공지영에 대해선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아주 질려버렸다. 그녀는 정말 스스로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참 쌍으로 놀고 있다. 이런 감상만이 밀려 온다. 물론 선입견인데, 이 선입견을 고치고 싶은 생각 아직 없다.

4. 요즘 꽤나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중에 국립 오페라합창단 문제를 보더라도, 말을 위한 말들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합창단을 위한 말은 그 많은 말들 가운데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말과 글들은 대개는 '합창단'을 위해서 생겨난 말과 글들인텐데, 점점 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자기애적 옹호, 혹은 다른 입장에 대한 조롱과 배타적인 거부로 변질된다. 시쳇말로 뭐하자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그 말과 글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차가운 냉소만이 내 안에서 차오른다. 그런 와중에 이런 관심을 발견하는 건 기쁨이다. 물론 그 방법은 좀더 고민되어야겠지만... 죽은 정명훈과 목수정에 굳이 인공호흡 시도하며 좀비 논쟁을 부추기는 비급좌파의 꼰대짓과 비교한다면 훨씬 성숙한 태도라고 본다. 말과 글은 목적을 갖는다. 그 목적은 항상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어야 한다. 말과 글이 향하는 목적이 말과 글, 그 자체가 되면 그 글은 대개는 죽은 글이 되기 쉽다.


* 관련 추천
일곱, <깡통> 말할 수 없는 말, 잊혀져가는 의미, 사라져가는 감정 (누에)

* 보충 의견
종소리 2009/04/20 08:43

[....] 일단 전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즐기는 편인것 같아서 참견해 봅니다.
글을 쓰는 사람치고 언어의 유희에 빠지지 않기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게다가 저는 주저리주저리 고백 형식의 글도 좋아합니다.
공지영은 아니더라도 김훈의 그 명료한 언어에 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마디로 동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읽다보면
작가나 혹은 글의 주인공내면에 앉아있는 느낌을 받곤하는데
어쩌면 그 내면은 저나 독자의 내면과 같기도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물론 쥐어짠 듯한 글까지 독자가 사랑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런 글들이 우리 사회와 문단에 유행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고백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시간을 지내온 사람들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바뀌어야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요즘의 새로운 세대가 그 많은 형용사와 부사로 자신의 내면을 고백해야 할 것들이 있을까하는 것이지요
이미 신세대 소설은 간결한 동사만으로 행위의 포착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는 대세가 아닌가 하네요
대세란 또하나의 문화코드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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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
  1. nooe 2009/04/19 12:15

    아..저도 반가운 마음에 자러가기 전에 여기도 일단 트랙링크 드립니다.
    http://nooegoch.tistory.com/408

    '예술'에 대한 댓글대화에 남긴 부분에서처럼, 작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은 비유를 남발하냐 아니냐는 평가지점에 놓는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든요.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언어를 갈고 닦아가는 이런 사람들은 '대중'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쓰느냐 아니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이 높아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평가의 방식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참 많은 두가지 지점 사이에서 평가를 내리는 이런 '잣대'가 전형적인 '규율'로 굳어진 경우가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 '예술가' 등에 대한 논쟁처럼요. 논쟁에 거론되는 특정 인물이 갖고 있는 문제도 큰 경우가 많지만 논쟁 혹은 토론의 방식이 '생산적'이 되거나 그것을 통해 문제를 극복해가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지적했던 문제들이 되풀이된다는 점.

    이런 점들 트랙링크에 드린 글에서 언급한 '한국어' 자체의 문제도 크고,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문제, 그 사람들이 모인 사회의 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무언가 문제를 풀어가는 지점을 찾아내기가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ㅠ.ㅠ (아까는 트랙백을 안받아 주어서 울었는데 이번엔 이런 횡설수설로 언어에 대한 글과 댓글을 쓴게 쪽팔려서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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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0 01:39

      물론 누에님의 입장도 넉넉하게 인정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것이 주된 논점은 아니고요.
      쉽게 말해서 왜 글을 쥐어짜는가.. 뭐, 이런 ㅡ.ㅡ;

  2. 오르페오 2009/04/19 18:04

    탁월하게 참신한 수사법들이 감동을 더해줄 때가 있는 것처럼, 그 반대의 불유쾌한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대체로 훌륭한 작품임에도 감동을 반감시키기도 하죠. 다만 자기만족적인 표현에 대한 강박을 버려라- 하고 모든 작가들에게 요구하기엔 글쎄요, 물론 그들 각자의 노력이 있어야겠지만 또한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안다면 당장에는 좀 무리인 것도 같습니다.
    발아점이 된 글부터 읽다보니 왠지 주변의 글쓰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떠올라서, 게다가 그들의 글에서도 그런 느낌을 간혹 받다보니 감정적인 변호가 되고 마네요. ㅎㅎ 이 글에 상관 있는 댓글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공지영 씨에 대한 민노씨의 선입견은 선입견이 아니라는 선입견이고요. ㅎ

    주목해야 할 4번은 사실 저처럼 블로그 눈팅이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의미있게 다가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처음엔 오페라합창단에 대한 관심으로 글들을 읽었었는데 굉장히 혼란스러워졌거든요. <굿바이 정명훈...> 글도 더불어 잘 읽어보았습니다. 날씨가 마음 설레게하는 일요일 오후입니다. 즐겁고 편안한 시간 보내고 있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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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0 01:42

      1. 비유가 작품에 스민다는 느낌이 드는 글이 있고, 비유가 작품의 장식적인 치장을 위해서 싸구려 악세사리처럼 변죽을 감싼다는 느낌이 드는 글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제 글은 그 차이를 지적하는, 어찌보면 대단히 당연해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그런 지적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합니다. ㅡ.ㅡ;;

      2. 공지영씨에 대해선 정말 체험치가 부족해서 말이죠, 결정적으로 그 체험치를 높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고요...;;;

      3. 저도 그 4번.에 대한 불만이 꽤나 큽니다... 본문에서도 썼습니다만, 정말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합창단 도와야하나/말아야하나... 이런 논쟁이 나아보입니다.

  3. JNine 2009/04/19 19:21

    일본어와 영어를 접하고, 필요에 의해 사용하게 되면서
    언어의 뉴앙스라는 것을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딱히 치환 가능하지 않은 단어가 생각보다 너무 많고, 설사 치환 가능한 적당한 언어가 '과거'에 사용되었었다고 해도, 그 과거의 유물을 파내는 것은 외래어나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 만큼이나 생소한 일이 되어 버려서 참 난감할 경우가 많더군요.

    예를 들면, 일본어에서 우리 말로 옮기는데 주저하게 되는 단어로 '야사시이'(보통 '상냥한' 혹은 '친절한'이라고 해석), 라던지 '이또시이'(보통 '사랑하는' 이라고 해석) 라던지, '코다와리' 라던지...영어의 경우 말씀하신 deserve를 비롯하여, 말을 하다 마땅한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영어로 말하게 되는(말하고 나서 상대의 반응은 '잘난척 해?' 라는 표정인 경우도 종종 있지만OTL) 단어들이 있지요. 이왕이면 풀어풀어 돌려 돌려 뉴앙스를 살려서 표현하려고 애쓰기는 하는데...

    영어에서는 word development라는 것이 글을 쓸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데...이게 동의어, 유의어만 나열하다보면...영한 사전에서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데 뉴앙스로는 분명히 의미가 이상해 지는 단어들이 있지요. 우리 식으로는 '계산하다' 정도로 해석되는 calculate, evaluate, compute, estimate 등등이 미묘한 뉴앙스 차이가 있고, 사용되는 곳이 조금씩 다른데...이걸 번역할 때에는 그냥 '계산하다'로 할 수 밖에 없는;;;

    딱 맞는 느낌의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혹은 숙어나 관용어)를 사용하면 될테지만, 단어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작가가 생각하는 뉴앙스를 공감하게 하기 위해 모두가 공감 가능한 비유/은유가 사용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아무 곳에나 멋진 표현을 찾으니 붕 떠버리는 것 같은,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표현들이 마구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 '뽕냥뽕냥' 이라는 말을 동생이랑 만들어 사용한 적이 있어요. 일종의 의태어인데
    '어떤 물건이나 옷감이 목화송이처럼 폭신폭신하면서 충분히 건조해서 건드리면 탱탱한 느낌이 나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읽으면 어감이 귀엽고 뉴앙스가 그럴듯 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사용했죠. 그런데 우리가 뽕냥뽕냥하다고 생각했던 느낌의 물건을 보여주면서 뽕냥뽕냥을 말하면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을 안해도 다음에 뽕냥뽕냥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높은 공감대로 사용하게 되더군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이 단추 참 뽕냥뽕냥 하다. 라던지 ㅋㅋ) (근데 왜 이 이야기를...티비 보면서 댓글을 달다보니 뭔가 하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까먹었다능;;;)

    아무튼 공감을 위한 비유/은유가 아니면 습관적 수사는 이해를 방해하기 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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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0 01:47

      1. 우리말에서 형용사나 부사의 활용은 문장의 감성을 대단히 높여주는 것 같기는 합니다.. 물론 그에 해당하는 외국어 표현을 몰라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단순히 일대일의 대체표현에 대한 불만이라기 보다는 문장성분에서 어떤 요소들에 관한 편차랄까, 그런 것에 대해 주목한 글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위와 같은 한국어에 본래 내재된 특질(혹은 한국어 관용표현들의 발전이 가져온 역사적인 특질) 때문에 '함축적인' 개념어, 쉽게 이야기하면 토론이나 대립적인 논쟁에서의 언어로서는 좀 덜 적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2. "'뽕냥뽕냥' 이라는 말을 동생이랑 만들어 사용한 적이 있어요. 일종의 의태어인데 '어떤 물건이나 옷감이 목화송이처럼 폭신폭신하면서 충분히 건조해서 건드리면 탱탱한 느낌이 나는' 정도의 의미"

      오, 언어를 창조하셨군용!
      대단히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 리카르도 2009/04/19 21:49

    흠.. 인용하신 바하문트님의 말은 그다지 공감가지 않네요.
    왜냐면 김형수라는 분의 책에서 인용한 그 글이야 말로
    가장 영어(또는 로망스어) 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직유법이나, 은유 또는 대유법이, 비판당한 글에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같은 언어적 사용법은, 도올이 말하는 것처럼,
    서양이 동양을 뛰어넘을수 있게 해준 연역적 사고(hypothetico-deductive method)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제가보기엔 간단하게 영어로 변환 가능해보이네요.
    아니 오히려 영어적인(?) 사고로 생각하면 오히려 더 읽기 편한
    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막 몇개 번역해본 초보 번역가로서 한마디 해보자면..
    deserve는 ~해도 돼, ~할수 있어 라고 번역하는게 가장 적당한것 같습니다.
    원래는 민노씨님 말한대로 그렇게 번역해야 하지만,
    자막이란게 대사가 길어질수록 보기에 불편하거든요.
    그래서 의미가 아닌 공간과의 싸움이 자막 번역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경우, 원래 의미는 형식상 평서문이긴 하나, 의미상 명령문으로 받아들이면 편할때가 많았던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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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0 01:51

      1. 바하문트님의 글에 대해서 여기에서 댓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 ^ 다만 제 입장에선 꽤 흥미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해서 잠깐 빌려온 것에 불과합니다.

      2. 오, 자막 번역작업도 하셨나보네요.
      말씀처럼 대화체의 언어에서는 말씀하신 방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 )

  5. leopord 2009/04/19 22:26

    꼭 그게 문창과 출신 작가들의 한계라고 단정지을 순 없겠지만, 비유를 위한 비유는 곧잘 빠지곤 하는 함정 같습니다. 그건 문장으로밖에 세상을 이해할 수 없고, 문장 밖의 세상과 연결되려는 욕망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거칠게 생각합니다. 요컨대, 작가와 세상과의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거나 회피하고 있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명 작가 분들의 조선일보 기고/인터뷰는 생활인 내지는 정치적인 ㅁㅁㅁ가 아니라, 작가 ㅁㅁㅁ로서의 자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작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인데, 링크하신 글에서 인텔리겐챠의 영향력 확대 욕망과 연관되면서도 조금 온도차가 있는 부분 같아요.

    그런데 제 글이 인용되니까 순간 화끈;;;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뭔가 재미없는 글입니다. 아무래도 현장감이 떨어지고 웹의 자료는 부족하고 저 스스로도 좀 맥이 빠지고 말입니다. 저도 티스토리 팀블로그에 가입했습니다만, 정확히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좀 모호해요. 시험이 끝나면 한번 그 쪽 사람들과 만나보던가 해야 할 거 같습니다(그런데 이 놈의 소심함이 으으;;).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4/20 01:55

      1. 레오포드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작가의 의도를 분석하는 방식은 물론 원칙이 되어야 하는 기본이 되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때론 그냥 습관으로 그렇게 쓰는건 아닌가, 혹은 관습적인 형태의 '문학'이란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해야 해, 라는 따위의 억압에 빠져이 있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요소가 없지 않겠다.. 이런 생각도 종종 합니다.

      2. 저는 아무리 위대한 저자라고 하더라도 조선일보에 적극적으로 기고하는 자라면 그냥 딱 잘라 말해서 아주 심하게 짜증이 나고, 싫습니다...;;;;

      3. 저로선 아주 막연한 차원에서 합창단을 지지하기는 합니다만, 제가 혹여라도 좀더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합창단노조원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알려야 하는 분들이니만큼 적극적으로 한번 접촉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6. leopord 2009/04/19 22:31

    덧. 저야말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되옵니다.OTL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4/20 01:57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고, 글을 위한 글이라는 억압 역시도 글이라는 것 자체가 갖는 즉각적인 허무, 무력함에 이끌려 나올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 않나 샆습니다.. : )

  7. 종소리 2009/04/20 08:43

    가벼운 마음으로 ^^*
    모두 언어에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신 분들이 참여하신것 같아 걍 나가려다가 ...
    일단 전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즐기는 편인것 같아서 참견해 봅니다.
    글을 쓰는 사람치고 언어의 유희에 빠지지 않기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게다가 저는 주저리주저리 고백 형식의 글도 좋아합니다.
    공지영은 아니더라도 김훈의 그 명료한 언어에 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마디로 동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읽다보면
    작가나 혹은 글의 주인공내면에 앉아있는 느낌을 받곤하는데
    어쩌면 그 내면은 저나 독자의 내면과 같기도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물론 쥐어짠 듯한 글까지 독자가 사랑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런글들이 우리사회와 문단에 유행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고백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시간을 지내온 사람들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바뀌어야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요즘의 새로운 세대가 그만은 형용사와 부사로 자신의 내면을 고백해야 할 것들이
    있을까하는 것이지요

    이미 신세대 소설은 간결한 동사만으로 행위의 포착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바램과 상관없는 대세가 아닌가 하네요
    대세란 또하나의 문화코드이기도 하구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4/20 09:01

      오, 친애하는 종소리님께서 이렇게 친히 방문해주셨네요. : )
      스팸으로 시작한 월요일 아침이 왠지 다시 행운을 가져올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남기신 의견을 보충하겠습니다.

  8. 종소리 2009/04/20 08:43

    글이 왜 안보이죠??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9/04/20 08:59

      잠시 오류가 있었던 모양..ㅠ

  9. 종소리 2009/04/20 08:44

    OTL

    perm. |  mod/del. |  reply.
  10. 종소리 2009/04/20 08:44

    OTL

    perm. |  mod/del. |  reply.
  11. 종소리 2009/04/20 08:45

    보이네 ㅠㅠ

    perm. |  mod/del. |  reply.
  12. 종소리 2009/04/20 08:48

    ㅗㅗㅗ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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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0 08:58

      글은 휴지통에서 복구했습니다. : )
      기념으로 남겨봅니다. ㅎㅎ

  13. 미루 2009/04/20 23:00

    공지영은 안읽어봤는데... 이름이 맘에 안들어서.. 대체로 공씨를 별로 안좋아하는... 성에 이응이 들어가면 별로 손이 안가더라구요. 근데 김훈 작가의 글은 참 좋아합니다. 그의 발언이나 소설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입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만, 그의 반듯한 문체는 큰 종처럼 명료하게 울리더라구요. 특히 칼의 노래는 두고두고 읽는 몇 안되는 책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국 소설을 잘 안읽어서 그 정도로 비유의 문제가 심한지는 잘 모르겠어서, 발아점을 찾아보니... 그렇군요.

    시를 읽으셔요. 요즘 한국시 참 좋더라구요. 좀 오래전에 나왔나.. 암튼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초는 정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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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1 07:13

      이름이 맘에 안들어서라니..;;; 좀 야박한 표준인 것 같기는 합니다.
      김훈의 글은 에전의 칼럼들이나, '칼의 노래' 정도를 읽어봤을 뿐인데, 글 참 잘쓰죠, 다만 개인적으론 그다지 뭔가 대단한 인식의 깊이를 느끼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80년대 90년대 초의 우리나라 시들은 참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 중에서도 황지우, 박노해, 이성복, 정현종, 기형도는 특히 더 좋아하는 시인들이고요. 너무들 유명한 시인들이긴 하지만, 그래서 모두 읽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개받은 김에 저도 한번 제 입장에서 권해봅니다. : )

  14. 곰곰 2009/04/21 14:05

    하나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각자가 거쳐가는 그 모든 여정 자체가, 실은 진실의 모습 그 자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케바케'라는 말은 너무 편리하게 쓰여져서 거부감이 들지만, 글에 있어서만은 각자의 주관이라는 것이 사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에겐 이해도 공감도 안 가는 글이 누군가에겐 가슴을 때리는 명문일 수도 있을 테고- 적어도 귀여니나 원태연류의, 고민없이 쉽게 써버린 글만 아니라면 각자 존재하고 싶은 대로 존재할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방식에 관한 생각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된다면 그건 또 싫지요.

    목수정씨의 글로 촉발된 논쟁 속에서, 많은 분들이 거명되고 또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는 걸 보면서 참 씁쓸합니다. 저는 김규항씨나 허지웅씨, 목수정씨의 글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어요. 하지만 모두들 나름대로의 '한 가닥'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명도가 있다거나 (그래도 사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요), 활동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움이나 올바름 같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의 한 가닥 진실'을 간직한 분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말이 꼬리를 물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오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이해해줘야 한다-는 건 아니고, 비판 받을 언행은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만 그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말을 위한 말의 함정은 '나는 옳다, 여기서 질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빠져버리는 것이 아닐지.. 뭐..뒷북이죠, 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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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1 20:23

      "하나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각자가 거쳐가는 그 모든 여정 자체가, 실은 진실의 모습 그 자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멋진 말씀이시네요. : )
      나머지 말씀에 대해서도 대체로 공감합니다.

      김규항씨에 대해선 왜 저러시나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고,
      허지웅씨야 그냥 뭐 아직 (꽤) 젊으니까...;; 뭐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고,
      목수정씨에 대해선 "정당하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는 명제보다는 "(내가) 잘못일 수 있기에 희생할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기울이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추.
      '케바케'는 처음엔 뭔가 했습니다..;;;; (제가 좀 과문해서리..'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줄여서 이렇게들 쓰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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