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좀더 각론들을 풀어주시거나, 혹은 벅샷님의 실존적인 기억들, 사건들을 예시하셨더라면 더욱 흥미로웠을 것 같다는 독자로서의 욕심을 갖게 되네요.

저는 기억의 문제...에 대해선, 그 기억을 매개로 하는 권력작용의 문제에 관심이 큽니다.
그러니 어떤 기억은 일찍 파기되고, 어떤 기억은 오랫동안 살아남고 하는 그 기술적, 권력적 메커니즘에 관심이 있는데요. 특히나 기억의 파괴를 위해 수행되는 어떤 조직적인(이것은 의식적인 차원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준'의식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뻘짓의 메커니즘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통털어 담론생산 및 유통 메커니즘이겠지요.
자본 및 정치권력과 지식 권력,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매개적 권력이라는 삼각형을 생각해보면 점점더 그 매개적 권력의 위상 혹은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 매개적 권력의 상층부는 여전히 고전적인 지식권력, 혹은 그들을 관리했던 거대 담론권력들이 담담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그렇게 (대체로) 대중들을 호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발화 및 수용 시스템의 발전은 이 양상을 좀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거로서 이야기해본다면, 이런 복잡 미묘한 매개적 권력들 간의 전투에 우리들은 블로거로서 이미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수용자로서의 권력(비유하자면 '수용미학'이나 '독자반응비평'의 창조적인 해석틀처럼요)이 이 지점에서는 주목될 것 같고, 우리가 역사로 말해온 것들, 우리가 정치라고 이야기해온 것들, 좀더 일상적으론 우리가 '뉴스, 혹은 사건'이라고 말해온 것들, 총체적으로 우리들의 기억 시스템에 자발성을 부여하는 기술적인 기제를 획득했다는 의미가 강한 것 같습니다.

종종 인용하곤 하는 해롤드 블룸의 '영향의 불안' 이론을 변형해서 적용하자면, 권력은 자기 스스로를 존립시키기 위해 어떤 기억이든 변형하고, 왜곡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극도의 자기 정당화적 메커니즘이겠죠. 권력의지가 인간성의 바탕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 권력의 자기 운동성이 성찰과 적절한 긴장을 만들지 못하면서 점점더 관계를 파괴하는 위계적 질서를 강요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이런 위계적인 질서를 거절하는 항체를, 기억 파괴에 저항하는 성찰적 기억의 네트워킹을 우리 블로거가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인용했던 마르쿠제의 지적.
행복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실패한 목표을 기억 속에 저장함으로써 예술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싸움에 참여할 수 있다. 생산 능력에 대한 물신숭배에 대항하여, 물적 조건에 의한 개인의 노예화에 대항하여, 예술은 모든 혁명의 궁극적인 목적인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표상하게 된다. (71)

모든 고착된 의식은 망각적이다. 예술은 화석화된 세계를 말하게, 노래하게, 춤추게 함으로써 거기에 대항한다. 과거의 고통, 과거의 기쁨을 잊는다는 것은 억압적 현실원리 하에서의 삶(의 에너지)을 축소시킨다. 기억은 고통의 정복과 기쁨의 영원함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 기쁨 그 자체는 고통에 의해 가려진다. 냉정하게도 그렇지 않나? (하지만) 역사의 지평선은 열려져 있다. 기억이 변화를 갈망하는 싸움의 동력이 된다면, 이 싸움은 [...] 지금까지 억압당한 하나의 혁명을 위해 수행되리라. (74)

- 허버트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 청하:1983. 중에서



* 발아점
기억과 자아 사이 (벅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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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기억과 자아 사이

    Tracked from Read & Lead 2008/11/03 20:57 del.

    '메멘토'를 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전직 보험 수사관인 주인공이,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인해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 상실증 환자가 되어 자신의 이름, 아내를 잃은 사실, 범인의 이름만을 기억한 채 범인을 추적한다는 얘기다. 주인공은 기억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항상 메모를 하면서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을 힘겹게 이어가게 된다. 자신이 묵은 호텔, 방문한 장소, 만난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 등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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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로스 2008/11/03 12:49

    와우 스킨이 상큼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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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11/03 12:59

      오랜만에 맘에 드는 스킨을 발견해서요.. ^ ^
      앞으로 좀 찬찬히 수정을 해야겠는데.. 아는게 없어서 삽질 좀 할 것 같네요.. ㅡ.ㅡ;

  2. Read&Lead 2008/11/03 21:04

    민노씨께서 올려주시는 글들을 읽으면서

    권력이 관계 파괴적인 위계적 질서를 강요하기 위해 기억을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것을 견제하는 차원의 블로깅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의 좁디 좁은 사유가 민노씨의 넓은 사유 공간과 연결되면서 제 사유의 폭과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귀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블로깅을 통한 사유의 레버리지는 참 가치있는 것 같습니다. ^^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11/03 21:13

      별말씀을요. ^ ^;;
      그저 앙상한 초겨울의 나뭇가지 같은 글일 뿐인걸요.
      오히려 벅샷님의 글들을 이런 저런 사고의 발아점으로 삼을 수 있어 저로선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 부족한 생각의 나무를 자랄 수 있도록 앞으로도 많은 자극을 주시길 기대해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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