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생"과 이승환님의 "강의석과 기존 언론의 공통점"은 상당 부분 맞닿아있는 셈이겠구요. 헌데 이 대목에서 제가 한 고민은, 그럼 이 구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이런 부분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차원에서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은 유효하지 않아보였기에, 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저 말이 가리키는 것은 아마도, 지엽적인 것을 중요한 것으로 부풀려 그것을 선정적으로 고발하는 보도 행태일 텐데요, 제가 볼 때 강의석씨가 가진 언행의 결격은 "지엽적"인 거라고 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부분은 '선정적인 고발'이 될텐데, 분명 최근의 강의석씨 기사에는 그런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이런 고발 역시, 저널리즘의 중요한 전략이나 기능의 일부로 비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그로 인한 피해는 뚜렷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선정적인 고발' 자체를 공박하는 건 효과적인 전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광범위한 지적이기 때문에, 역으로 유효하기가 힘들다고 할까요. 다시 말해, (의도가 그렇진 않으셨겠지만)언론의 속성에 대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비평을 가하고 계신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비평은 '근본'적인 만큼 너무도 많은 부분을 타격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대상은 보수언론으로든, 진보언론으로든, 어디로든 흐를 수 있습니다. 여기 1인미디어도 예외는 아니죠.

'선정적인 고발'에 대한 근본주의적 비평이 어디까지 확장, 적용될 수 있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악플 호객행위"란 말이, 현 상황의 어떤 특수한 부분을 속시원히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뒤집어 어떤 상황을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는 개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민노씨께서 예를 들어주신 "적대적 공범"관계의 "역할극"이라 불릴 만한 특정 언론 보도의 패턴 역시, 어떤 의미에선 무엇을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닐런지요.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의 내용이 "역할극"으로 전락하는 언론보도 행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데 반해,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 속에 깃든 선동적인 어투나 고발의 구조는, "역할극"이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언론 보도 형태의 근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이 말의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어떤 당착을 느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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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yingkid, '강의석, 찌라시즘, 악플 호객행위'에 대한 논평 중에서

예리하고, 열정적인 논평에 우선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 )  우선 논평하신 대상글은 현상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 글입니다. 글의 물리적인 부피로 봐도 그렇구요. 이에 대해선 이하에서 좀더 풀어쓰고자 합니다.


1. 논평하신 주제에 대해 좀더 일단 생각나는대로 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제가 볼 때 강의석씨가 가진 언행의 결격은 "지엽적"인 거라고 할 수 없는 듯합니다." 특히 '결격'의 의미가 문장 내에서(문맥상으로도)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데요. 제 글은 이런 제한적 이해의 전제에서 드리는 대답입니다.

2. 공론화할 수 있는 소재와 가치의 차원
강의석을 통해 공론화되는(그럴 가능성이 높은) 이슈의 중요성(가령 병역문제)에 대해선 저 역시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의 차원에서 그 이슈를 밀어붙이고 나가기에 너무도 허술하다는 것이 문제겠죠. 강의석의 언술이나 그를 인용하고, 재활용하는 언술 모두요. 강의석의 엉뚱한 논리전개는 그렇다고치고, 강의석을 '희생양' 삼는 찌라시즘 기사들 역시 강의석이 구사하는 논리를 그대로 전달하거나(그래서 그대로 답습하거나), 혹은 오히려 그 수준을 더더욱 저열한 것으로 표피화시킵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그 의미를 좀더 효과적으로 공론화시키겠다는 의미에서의 '선동적인' 전략이 갖는 의미는 현저하게 그 가치를 상실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선정주의 자체가 목적인 고발 vs. 방법론적 전략으로서의 선정주의적 고발
선정성, 선동성이 물론 가장 쉽고, 유효한 대공중 전략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어떤 이슈의 중요성을 자각한 노련한 담론생산자의 철학적 원칙을 견지한 방법론일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좀더 많은 눈과 귀를 붙들기 위해 벌이는 직업적으로 숙련된 찌라시즘 전공자들의 '기술'일 수도 있구요. 이런 일반의 방법론을 인정하지 말자라고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후술할 '이율배반'은 이런 차원의 이율배반은 아닙니다.

고발의 선정성과 고발의 전략적인 방법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략적인 방법론으로서 '선정성' 혹은 '선동성'이 채택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역으로 '선정성'이 전략적인 방법론과 등가로 교환되는 것은 또 아니죠. 그것은 선동과 선정성을 활용하는 그 개개의 상황과 개개의 구체적인 조건들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건대, '강의석'류가 생성하는 이슈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이슈를 끌고 갈만큼의 최소한의 문제제기, 혹은 담론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때문에 여기에 '선정성'을 방법론으로 더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슈는 재밌는 이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유희가치도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 이슈는 그 어떤 중요성도 갖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죠. 그리고 그 이슈를 띄우기 위한 전략 역시도 유효하지 못한 전략일테구요.

위와 같은 판단하에서 제 짧은 글은 그 '무의미'를 표피적으로 화장 떡칠해서 팔아먹는 그 '행태'와 '경향'에 대한 단순한 비판 목적을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선정적 고발'에 대한 공격이 갖는 단순한 취지, 그 이후의 '대안'을 언급하시는 부분은 이 글의 원래 취지와는 다소 먼 이야기이긴 합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해보죠.

4. "근본주의적 비평"...이 아니라 그냥 인상비평입니다.
'근본주의적 비평'이라고 제 짧은 글을 폼나게(? ㅡ.ㅡ;)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제 글은 그저 즉각적인 인상비평에 가까운 글입니다. 이것을 저는 긍정합니다. 논평해주신 제 글은 20분 안쪽에서 쓰여진 글이고, 여기에 어떤 새로운 고민이나, 혹은 이전에 했던 고민들을 다시 회고적으로 성찰하거나, 그 고민의 재료들을 다시 전략적으로 조합하거나, 이런 논리조작은 전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말씀해주신 그런 깊이 있는 '대안'에 대한 제 나름의 고민을 담은 글이 아닙니다. 명징한 상징으로서 호밀(intherye)님께서 말씀해주신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을 나름으로 널리 알리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 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해주신 부분에 대해 간략히나마 제 입장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말미의 이율배반에 대해선, 저로선 다소 강하게 항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물론 그 취지에 대해선 제가 기존에 써왔던 주제 혹은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고, 또 제가 그런 이율배반에 대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말씀해주신 취지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소 착오가 계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착오가 있기 마련이고, 그 착오가 때로는 창조적인 오독인 경우도 있겠지만요. ^ ^;

ㄱ. "악플 호객행위"는 선정적인 외피를 갖고 있을지언정 그 안에 담겨진 함의가 적어도 (극복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진실'을 내재하고 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때문에 같은 비교 대상으로 말씀해주신 '언론의 역할극'(에서 드러나는 선동과 선정주의)와는 그다지 큰 관계가 없는 언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는 그 현상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비판언어'로 평가해야 마땅하지, 그것이 갖는 표현의 강도만으로 언론의 선정주의나 역할극에서 등장하는 과도한 선입견의 언어로 평가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ㄴ. 그리고 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텐데, '언론의 역할극'은 그 자체로 반드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역할극'이라고 표현하는 대개의 문맥은 대한민국 언론이 갖는 과도한 정치적인 당파와 집단적인 이기주의, 그리고 동업자 의식 속에서 그 담론생산자(집단)의 '정치, 경제적 위치와 조건'과 괴리된 담론생산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론은 언제어디에서나 나름의 역할극을 벌여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대체로 '계급적인 특징'을 강하게 갖는 역할극이었겠죠. 그 역할극의 배우가 자신의 물적 존재근거를 배반하거나, 혹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양상들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저는 너무 너무 가증스럽거나, 혹은 그냥 (정서적으로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겠지만요.

가령 오마이뉴스는 진보적인 매체입니까? 아니면 보수적인 매체입니까? 오마이의 선동주의와 모험주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오마이의 생존 전략이 과도하게 변질된 형태입니까?  물론 오마이 전체(여기에서는 오마이를 '한겨레'와 바꿔 불러도 무방합니다)를 추상적으로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부당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최근 오마이뉴스 오연호씨가 말한 '연립주택론'(촛불 마케팅?의 일환으로써 블로그의 미디어적 가능성을 논한 글에서)은 거기에 분명히 진정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언론기업으로서의 '오마이'에 대한 비지니스적 욕구를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블로그가 갖는 미디어적 잠재력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상한 비유를 오연호씨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읽기에는 좀 웃겼습니다.

왜냐하면 오연호씨는 스스로를 무슨 민주주의 투사로, 민주주의를 위한 미디어의 선구자로 규정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앞서 언론사 CEO로서의 욕구를 좀더 강하게 그 글에서 담고 있다고 저는 느꼈고, 또 그렇게 그 글 자체를 읽었을 때 그렇게 (이성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그 양자간의 이율배반은 생산적인 '긴장'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홍세화씨의 식상한 레퍼토리이긴 하지만)의 제스처, 그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즉흥적으로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이라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엔 이렇다는 것입니다.  불가피한 자기 배반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존재가 향하는 존재론적 지향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기만하고, 자기를 속이고, 또 그렇게 이율배반의 삶을 삽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존과 현상을 내용과 형식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죠.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이율배반' 자체가 갖는 (본질적인) 모순이 아니라, 그 이율배반이 어쩔 수 없이 불러오는 '갈등'과 '긴장'입니다. 그 갈등과 긴장 속에서 이 비참한 세계가 '나와 너'로 이어져 있다는 공동체적 소망을 끝끝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최후의 비전은 공동체적인 상상력과 개인의 이기심, 그리고 그 이기심을 구성하는 욕망을 서로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다소 추상적이 되는데, 간단히 다시 되돌아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악플 호객행위'는 어떤 대한민국 저널리즘(찌라시즘)과 이를 둘러싼 시스템의 메카니즘이 갖는 구조적 경향에 대한 단순한 묘사, 혹은 상징적 지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좀더 견고하게 그 현상의 의미를 포착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극복과 대안을 담은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니고, 그저 그 '출발점'으로서의 문제의식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저로선 그것만으로 '기존의 언론의 부정적인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문제는 좀더 심도깊게 논의되어야 마땅하지만요.

'cryingkid'님께서 지적하신 문제제기의 취지에 대해선 깊이 공감합니다. 이 점에는 전혀 오해가 없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리고 싶고, 또 거듭 고마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끝으로 사족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그저 연상이 이끄는대로 좀더 이어가자면,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저로선 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은 정말 서로 다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썼던 글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했지만, 기존의 저널리즘 생산물에 의해 생겨난 수동적인 세계인식에 대한 관극틀을 적극적으로 깨뜨려, 그 세계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불러 올 수 있는 것, 저는 그런 주관적인 상상력과 공동체적인 상상력의 결합이 블로기즘의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기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의 일기장이자, 동시에 낯선 누군가에게 열려진 공간으로서 이어져 있는 블로그가 갖는 잠재력은 매우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저널리즘(찌라시즘)의 천박한 호객행위나 혹은 저널리즘의 역할극에 내재된, 혹은 거기에서 파생된 부정적인 속성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블로기즘의 가능성은 매우 중대하고 저는 평가합니다. 그 잠재력은 매우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고민거리를 우리 자신에게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는 이전의 세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거대한 집단의 기억'을 '자기 삶의 생생한 주관적 토대' 위에서 직접적인 자기 관여 속에서, 스스로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또 관계적이고, 공적입니다.

그 블로그가 새로운 미디어로서, 온라인 실존의 근거로서 부피와 무게로서의 정치적, 사회적인 역사성을 획득한다면, 그런 수준으로 진화한다면,
그 기억을 자신의 실존 속에서, 그 실존이 체험한 관계적 대화의 풍경들 속에서 불러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의미는 더이상 '즉자적 감수성'으로 수용되지 않고, '대타적 감수성'으로, 그러니 관계적 감수성으로 수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무슨 환상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가능성으로 남겨져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추후에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 최초 발아점
강의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스러운' 사회 (이승환)
어떤 콘텐츠가 살아남을까? (위 글 후속글)
intherye논평

* 직접 발아점
cryingkid, '강의석, 찌라시즘, 악플 호객행위'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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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oe 2008/09/26 13:27

    '강의석'이란 분이 뭐하는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음.. 자랑은 아닙니다.ㅠ.ㅠ 그런데 참 이 업계가 좁기도 하지만 논의되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려면 주어진 시간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네요. 평소 연예가 소식, 찌라시적 기사들에 눈길을 줄만한 관심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의 비관심 카테고리에는 블로그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 파워블로그가 되는법'이란 낙서는 사실 그런 이야기들, 빈껍데기 아니냐는 풍자의 의미가 컸습니다. 그런데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는 느낌입니다. 음.. 횡설수설중입니다. 그런면에서 민노씨가 참 대단해보입니다. 다양한 문제점이 있는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 머리로 소화해서 다시 엮어내는 것(일단 그것만으로도..^^;). 그래서 말인데요. 민노씨 블로그에 다양한 외부 블로그의 글에 대한 접근 기능을 보다 확장해주심이.... 지금도 많이 확장해 주시고 연결해주시지만, 좀더 세분화해서 방문자들이 관심 영역의 글을 찾아 볼 수 있도록...^^;

    뭐 이게 제가 메타블로그의 추천기능을 거의 신뢰하지 않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어떤 이유에서 추천한 글인지가 일단 가장 중요한 문제라서요. 만약 믹시 같은 곳(누가 추천했는지 그래도 볼 수 있는)이 각자 가진 추천 포인트가 한정되어있고, 최소 10점(숫자보단 뭐 별이나 지금 쓰고 있는 것이 낫겠고요. 왜 추천해주었는지 알 수 있게 색깔까지 달리하면 더 좋겠네요. ^^;)까지 줄 수 있고, 하지만 1점 줄때는 자신이 가진 포인트가 깎이지 않는다 뭐 이런등등의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좀더 분별력은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쩜..

    휴.. 흥미로운 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서 반가운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 되면 좋겠네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9/29 21:29

      말씀하신 '블로그리뷰'는 블로그의 가장 주요한 영역 중 하나가 되어야 마땅한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블로거들은 무엇보다 글을 쓰는 것에 못지 않게 서로 '읽어주는' 독자이자 비평가로서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결정적으로 좀 게으러서 말이죠.
      앞으론 좀 더 신경을 쓸까 싶네요. ^ ^;;

    • 민노씨 2008/09/30 18:44

      '강의석'은 군대가지 말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게 전혀 씨알도 안먹히는 건 강의석에게 일말의 가능성이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아직 군대가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솔깃(?)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일종의 대리적인 영웅놀이에서 그 영웅이 갖고 있는 전리품의 크기랄까, 그런 것들에 대한 투사심리인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강의석은 가짜 영웅이거나, 혹은 적어도 다윗(처럼 동정심?을 일으키는)같은 영웅도 아닌 셈이죠. 일종의 (다소 부정적인 어감에서의) 광대랄까.. 그런 이미지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ㅡ.ㅡ;

    • nooe 2008/10/01 20:36

      전 이런 문제들에 대해 좀 다르게 대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예를들어

      부패한 경찰과 성매매업소 포주들
      찌라시 언론과 포탈

      등등 이런 힘의 대립 구도에서 어떤 틈이 발생할꺼라 생각합니다.

      '강의석'씨와 '찌라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정색'하고 대응하는 것보단 그로인해 발생한 어떤 틈을 잘 살리는 분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고요. 군대문제와 찌라시 언론의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로요. 뭐 생각이야 곧고 깊게 하시는 분들은 많겠지만 표현의 문제에서 묻혀지는 글쓰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요. 표현방식과 소통의 기술의 문제에서 블로그하시는 분들이 찾아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 이런 문제에서도 절실히 느껴집니다.민노씨가 생각하시는 블로그 과련 일들을 통해서도 이런 부분들이 잘 살아나기를 바라고요.

  2. nooe 2008/09/26 17:35

    그 사람이 누군지 떠올렸습니다. 머리 긴 사진땜에 연상을 못했습니다.^^; 군대에 관련된 인물^^;은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박태환씨에게드리는편지는 군대에 대한 내용이었군요. 관심 없는 사람이라 글을 읽어보지 않았었는데 지금 읽고 왔습니다. 이 글 하나로는 나름 기지가 돋보이는 그럭저럭 괜찮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워낙 금단의 영역이라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높이 사주고 싶기도합니다. 그런데 역시나 무지 얻어맞는군요. 인격모독 수준으로요. 휴... 이런 집단적 대응이 참 무섭습니다.사실 오래전 지하철에 자기 개가 싼 똥 안치운 사람보다 인신공격을 해대는 집단에 기가찼습니다.

    여러모로 참..착잡하네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9/29 21:40

      http://www.naeilshot.co.kr/opinion_studentforum.asp?id=studentforum&mode=view&idx=103

      누에님 덕분에 다시한번 찬찬히 읽습니다만...
      뭐랄까요, 강의석군에게는 좀 안된 말이긴 하지만, 스스로 '악플'을 유도하고 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한심한 수준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물론 문제제기의 취지라는 차원에서는 일말이나마 공감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제가 본문에서 밝힌 바, 그 글이 '병역문제'라는 극도로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를 밀고 나가기엔 너무 유치하고, 선동적이고, 자기 논리에 대한 심사숙고도 없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이런 유치함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그게 대중심리라는 것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네요... ㅡ.ㅡ;

      착잡하다는 말씀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 nooe 2008/09/30 17:25

      뭐 그냥 피식 웃고 치워버릴 수 있을 정도의 글이어야할텐데요.

      대중심리라는게 좀 뿔나있다는걸 말해주는 사건이기도하네요.

      '국민영웅을 공격하는 하찮은 천것(때로는 신)을 국민병장들이 밟아주는 모습?'

      저작권,검열,영웅주의,집단주의,찌라시즘,군사주의...얽히고 섥혀서 거대한 종양이 되는 모습입니다.

      시원하게 터지면 좋으련만요.

  3. 땡글아빠 2008/09/27 13:08

    글의 논제가 전부터 제가 관심을 가져왔던 것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언론의 상업성 내지는 선정성을,,, '천박한 호객행위'로 묘사하는 부분들에서 진한 공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조중동이라는 보수언론들이 존재하며 근거하는 기반이기도 하지만
    최근들어 <한겨레>나 <오마이>같은 자칭 진보언론들까지도 함께 빠져들어가는 '더러운 마약성'을 지닌 패륜적아적 행태가 아닌가 합니다.

    특히 <한겨레>에서 잠시 블로그를 가졌던 저로서는 <한겨레>측의 블로그 운영에서 보이는 한겨레 운영자들의 이중적 행태가 더욱 역겹게 느껴졌던 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물론 <조중동>에서 블로깅 체험을 했더라면 더욱 심했을 가능성이 많겠지만,,, 그것은 이미 자칭 보수언론이 지닌, 또 그들 스스로 어느정도 인정하는 기득권적이고 포퓰리즘적 속성이나 차라리 그렇다 치부할 수 있지만,,, <한겨레>같은 그 시작 자체가 민중들의 기대와 힘으로 이루어진 언론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비열한 배반행위'로 더욱 분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적 상황에서의 신문이라는 매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보자면,,, 어쩌면 어쩔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일부 진보언론에 대한 저의 분노는 사실 지난 대선에서 진보세력이 외면받았던 원인과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보는 지난 대선 진보세력의 문제점은,,,노무현 정권을 대신할 대체 신진세력이, (노무현 정권 출범당시 진보세력사이에서 그렇게 비난받았던) 김민석이와 같은 무한정한 권력에 대한 탐욕에 빠진 권.력.광.신.도.와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질수 있으면,,,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포플리즘적 행태,,,

    이것은 지금,,, <조중동>과 <한겨레>가 함께 구사하는 '언론의 천박한 호객행위'와 다름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주목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사회에 일부 '양의 탈을 쓴 하이에나'집단들^^은 그것이 진보측이든 보수측이든 견제받아야 하고 그 설자리의 땅이 좁아져야 세상이 더 살만한 곳이 될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급히 쓰느라 문장구사가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안하여 읽으시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9/29 21:47

      여기에서 뵈니 반가움이 더 합니다. : )

      말씀해주신 한겨레의 문제는 그 내부성원이 변질되었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기존의 관성에 안주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점은 아쉬움이 깊죠.

      다만 한겨레와 조중동의 '호객행위'가 갖는 역사적인 평가는 다소 달라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 호객행위가 언론'기업'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전략'이라면,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조중동과 한겨레가 생산하는 그 최소한의 콘텐츠가 지향하는 풍경 역시 다른 것은 분명하니까요.

      문제는 한겨레 패러다임으로는 더이상의 유효한 사회개혁(?)이 불가능한 지경으로 관성화된 '적대적 공생'의 메카니즘이랄까요? 한겨레처럼 시민사회의 열정에 의해 탄생한 매체가 시대의 새로운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지 못하고, 기존의 관성에 스스로 기득권화되어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한번 찾아뵈야 할텐데요.. ^ ^;
      언제라도 연락주시길..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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