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대한 일종의 '짝글'


내 감수성을 결정한 영화는 왕가위 영화들이다.
아니, 어떤 영화를 보면 그 영화가 내 감수성과 완벽하게 일치하거나, 내가 나에게조차 고백하기 부끄러운 숨겨진 욕망의 풍경들을 온전히 재현한다고 느끼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 영화들이 바로 왕가위 영화들이다. 왕가위 초기 영화들이 나는 좋다. 헐리웃 가서 찍은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 아니, 아직 보지 않았다. 물론 나는 비교적 최근작인 [2046]도 무척 좋아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해피투게더] 이후의 왕가위에 대해선... 뭐랄까, 좀 심심하달까. 그런 느낌이 강하다. 물론 영화적으론 좀더 세련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달까... 그런게 별로 맘에 들지 않아.

왕가위 영화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가장 낭만적이면서, 가장 쓸쓸한 '엇갈림'이라는 테마를 다룬다. 그리고 언젠가 농담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왕가위 영화는 (굳이 수식을 달자면) '실존적' 자위행위에 대한 가장 탁월한 예술적 형상화다. 그건 비루하고, 아름다우며, 쓸쓸하지만 따뜻하다. 거기에는 기억과 욕망과 망상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 모든 것들을 둘러싼 이미지의 속삭임, 그 공간을 흐르는 숨죽인 울음이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나에게 도착하는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왕가위의 영화들, 특히나 [열혈남아]의 공중전화 키스신와 왕걸의 노래들, [아비정전]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화면을 가득 적시는 비오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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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사춘기, 그 열띤 축제 같은, 저주 같은, 온 영혼에 화상 입은 것처럼 예민한 감수성의 피부들, 한 줄 바람만 불어도 온 몸이 화끈거리는, 그런 거... 그런게 있었을거다. 그 기억들은 대체로 내가 몹시도 애착했던 어떤 여자(들)와 함께 왔었고, 어떤 목소리와 어떤 살의 촉감들과 함께 왔었다. 그 기억들이 아직도 문득 문득 나에게 온다. 그러면 나는 소리없이 환청의 나레이션처럼 마음 속으로 말한다.

내 옆에 없다.
나는 실패했다...
내 삶은 이제 여분만 남겨져 있을 뿐이다... 



* 발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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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내 인생의 영화 (1) : 열혈남아 (旺角卞門, 1988)

    Tracked from Different Tastes™ Ltd. 2008/08/24 20:59 del.

    열혈남아 (旺角卞門, 1988) by 왕가위 제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이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사당동의 재개봉관 3군데를 돌아가며 한 10번 정도는 본 것 같네요. 바야흐로 홍콩 영화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열혈남아"도 그런 와중에 만들어져 국내에 소개되었던 영화였는데 다른 느와르물과는 조금 달랐었죠. 왕가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열혈남아"(몽콕하문, 1988)는 극장에 아주 잠시 걸렸다 비디오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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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수아씨 2008/08/20 23:58

    오랜만에 커피 캬라멜에 대한 이야기가 업데이트 되었군요^^
    민노씨 옆에 지금 누군가가 없을 지언정 그것을 실패라고 하지 마시고..
    빠른 시일 내에 과거 이야기가 아닌 마냥 달달한 이야기들도 가득 올려주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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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8/08/21 01:23

      아씨님 격려 말씀 들으니 큰 위안이 되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2. 민노씨 2008/08/21 01:23

    * 왕걸 노래 유트뷰로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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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어지 2008/08/24 20:58

    <열혈남아>는 내 인생의 영화 1호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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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wangn 2008/12/13 17:35

    잘 읽었습니다
    처음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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