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글이구요(2000년 이전). 한겨레블로그에 보관했었던 글( 2006/01/24 12:52 )입니다. 한겨레블로그의 공식정책에 대한 제 정책은 제한적 포스팅과 콘텐츠 이전입니다. 그래서 옮겨오는 겁니다. 주로 주말을 이용해서 이전 작업을 할까 합니다. 공개하되 발행하지는 않습니다. 추고는 최소한으로 합니다. 이 글을 한겨레블로그에 등록한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한 필진(다운님)께서 제 다른 글(박정희 시대를 말한다)에 쓰인 '타인/타자'에 대해 질문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한 답변 성격도 있는 글이었습니다. 위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도 곧 옮겨올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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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 (Huis-Clos, 1944)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6.21~1980.4.15


[사르트르] 닫힌 방(Huis-Clos)
- 유사실존과 타자의 문제



1.“타인은 지옥이다”의 의미에 대하여
2.‘거울’의 의미

<닫힌 방 Huis-Clos>에는 지옥에 온, 그러나 왜 자신들이 지옥에 왔는지를 알지 못하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지옥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그들은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하는 건 그들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들은 막 죽어서 지옥에 온 인물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생성할 수 없으며,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은 존재이니까. 그래서 지옥에 왔으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비춰볼 수 없다. 즉 지옥에는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옷차림새를 다듬고, 볼에 묻은 속눈썹을 뗄 수 있는 ‘거울’이라는 물건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타인과 관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상실했다는, 관계의 매개를 상실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에서의 ‘거울의 부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관계가 의미를 생성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관계가 어떻게 가능이나 하겠는가. 내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그것이 이를테면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상징적인 거울’인 것이다. 그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이른바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간-주관성').


타인과 관계할 수 있게 하는 내부의 ‘또 다른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에는 그것이 없다. 즉 내가 ‘나’라는 ‘달팽이 관’을 벗어나, 나를 ‘볼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있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다. 그 시선을 통해서 나는 ‘나’를 본다. 하지만 이미 그때의 나는 스스로의 매개를 잃어버린, ‘상징적인 거울’을 갖고 있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어 거칠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저 대자(對自)의 관성(慣性)으로 움직이는 즉자(卽自)의 존재들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더 이상 의미가 아니다. 그의 본질은 ‘과거’이다. 즉 과거의 재현으로서만 그들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저 대상이다. ‘실존’이라는 말을 자유와 선택, 그리고 그런 조건들의 조합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흔들리는, 알 수 없는, 비결정적인 생성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의 무의미성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욕망하고 있다. 그들을 욕망하게 하는 조건은 그들의 과거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과거의 늪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존재이다. 그런 그들의 욕망은 서로 어긋난다. 가르생은 이네스를 원하고, 이네스는 에스텔르를 원하고, 에스텔르는 가르생을 원한다. 그들의 욕망은 서로 비껴나가고, 욕망은 물고 물린다. 그래서 그 관계는 정말 ‘본격적인’ 지옥이 된다.

왜냐하면 그 관계-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관계는 이미 엄격한 의미에서 관계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이런 조어가 가능하다면, ‘유사 관계’이다-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로 ‘작용’하는 관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욕망-왜냐하면 나의 욕망이 매개를 만나지 않고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에게도 매개를 갖지 못하니까-만이 있는 관계이다.

타인은 자기를 규정하는 존재인데, 그 타인이 나에게는 욕망의 대상이자, 내가 또 다른 타인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관계는 지옥이다.  그 관계의 ‘삼각형’은 서로 끊임없이 어긋나고, 어긋남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 반복해서 말하지만 ‘대타적인 생성’이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그저 끝없는 동어반복의 지루한, 숨막히는 시간과 공간만이 거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무대 위에 있는 그들의 현존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현존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닫힌 방>이라는 ‘연극’은 관객에게 스스로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서 구실한다. 연극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잔상이자, 과거 그 자체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옥이 있음을 부정하는 과거의 기억에 매달림으로써 ‘유사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그 ‘유사 실존’을 바라보며, 관객은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고, 그것과 비교하게 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타인은 지옥일 수 밖 없다’는 본원적인 부정과 한계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 들어설 수 없고, 의미를 생성할 수 없을 때, 매개 없는 욕망으로 자신을 파괴할 때, 그리고 그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스스로는 그 욕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할 때 타인은 지옥이 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거울’로 삼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오히려 웅변하고 있지는 않을까. 머리는 무거워지고, 마음은 굳어진다. 그렇지만 꿈에서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그래서 그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아침이면 따스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옥은 꿈꿀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스스로의 매개를 상실한 곳이니까, 아니 그것을 빼앗아 버린 곳이니까.


꿈꿀 수 있는 행복.
그걸 우리는 소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소망은 '관계' 속에서 시작한다.



[댓글 대화 - 플라토닉 러브는 유사실존인가?]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는 "유사실존"이고 "지옥"이 되나요?!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궁금하네요.

동양의학에서는 삼각관계가 생명의 필연적 실존입니다.
<본초문답>에는 생명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고리 관계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네-뱀-두꺼비"

두꺼비는 뱀에 먹이가 되고 뱀은 지네의 먹이가 되지만 다시 지네는 두꺼비의 먹이가 되는 고리관계입니다. 이것은 작은 범위의 고리일 뿐, 인간 또한 이러한 고리관계에서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생태계 전체 범위로 보자면 진화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여기기 쉬운 미생물의 먹이감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태계고리에서 각각의 생명체는 고등성과 원시성을 동시에 갖춘 것이라는 뜻입니다. (땡글아버님)


이하 땡글아빠님의 논평과 질문에 답합니다.

저로선 우선 고대철학,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관계로 그저 상식적인 의미에서 위 질문을 듣고, 그 질문 아래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사례를 참고하여 제 나름으로 답해드립니다.

1. 저로선 '유사실존'이란 조어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저로선 [완전한 실존 - 실존의 상실 - 그 중간적인 개념]으로서 위 조어를 사용하였습니다.
2. 그렇다면 아빠님께서 '플라토닉 러브'를 사용하신 취지는 [완전한 사랑 - 플라토닉한 사랑 -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구도하에서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3. 그렇다면 위 1.과 2.는 그 모델이 같은 논의로 다뤄질 수도 있으나, 서로 다른 논의의 평면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1.의 논의는 완전함 - 중간형 - 상실.이라면 2.의 논의는 완전함 - 완전함의 일부로서의 플라토닉 - 완전함의 일부로서의 에로틱.이기 때문입니다.
4. 다만 그 유사함은 인정되기 때문에 제 나름으로 성심껏 아빠님의 질문에 답해드린다면, 저로선 에토스(관습, 관성, 지속성)과 파토스(정열, 욕망, 순간성)의 엇갈림이 위 유사실존을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자는 서로 모순적인데, 위 희곡의 인물들은 에토스로서 파토스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파토스는 그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지, 관성이나 관습으로서 발현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건 지옥이 됩니다. 에토스와 파토스의 조화는 그 것이 발현되는 상황에 맞춰 생성되어야 하는데, 그 양자가 한 공간과 한 시간 속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 양립불가능한 불완전함과 모순 속에 인물들은 빠져 있고, 저로선 그 존재는 유사실존의 존재라고 느낍니다. 부족한 설명이지만, 제 나름으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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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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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치하이커 2007/04/23 11:12

    명색이 철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저보다 민노씨가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으헉...) 뭐, 사르트르야 워낙 유명한 극작가이기도 하지만요.
    전 아직 실존주의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뜬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삶 그대로를 사유하는 흐름이기도 하지만, 또 말하는 투는 좀 맘에 안 들기도 하고...하여간 모르겠네요. (...) 뭐, 차차 알게 되겠지요.
    사르트르는 초기에는 인간이 거의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다가, 점점 사회가 주는 제약을 중요하게 말했(다고 하)죠. 저는 그가 말한 '그릇된 믿음(bad faith)'란 개념은 무지 좋아라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맘대로 믿어버리죠. 쩝...
    사르트르 얘기가 나와서 참지 못 하고 횡설수설(...)하고 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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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4/23 10:02

      횡설수설이라뇨? ^^;
      정말 반가운 논평인걸요.
      고맙습니다.

      하이커님 덕분에 까뮈와 사르트르 논쟁에 대해 짧게 쓴게 있는데 것도 조만간 옮겨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네요.

      어떤 말이든 편하게 들려주시면 좋겠네요. : )

  2. nassol 2010/02/16 06:16

    남겨주신 댓글보고 이 글을 읽었어요. 매우 흥미롭게 읽었어요. 이 닫힌 방이라는 작품 꼭 읽어보고 싶어요. 이야기 비스무리가 뭔가를 썼었는데요, 쓰다가 말았지만, 이 이야기를 보니까 그 이야기 생각이 나요. 좀 더 생각해보고 다시 답글을 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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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03/04 04:29

      아이코, 이제야 댓글을 발견하네요. : )
      고맙습니다.

  3. nassol 2010/03/11 02:02

    안녕하세요! 흥미롭게 읽었던 글을 골라서 읽어봤어요.~ http://drop.io/blogreading01/asset/minoci-sartre 이게 파일의 주소이고요. 혹시 블로그 본문에 삽입하시려면, embed코드를 이용하시면 되요 ^^. embed코드는 제목 우클릭하면 메뉴에 나온답니다~ 앞부분과 뒷부분에 배경음악을 깔아보려고 했는데요, 앞부분은 잘 안 들릴 뿐더러, 뒷부분에서는 깜박했다는~ 왠지 민노씨의 글은 빠른 속도가 어울릴 것 같아서 빨리 읽어봤는데요, 어울리는지 모르겠네요 ^^ 그리고 본문 마지막 부분에 '소망' 부분 나오는 데, 잘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절묘한 타이밍에 목이 근질근질... 해서;;; 마음이 아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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