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어조로, IPTV가 가져올 '근미래'의 풍경에 대해 새드개그맨님께서 이야기한다.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떠오른 글이 있다.
개인적으론 블로깅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포스트 중 하나였는데, 그 글에는 미디어비평가 닐 포스트만이 자신의 책에 썼던 서문을 인용하고 있는 문장이 있다.
테크놀로지는 일견 몰가치적이며, 몰역사적인 것 같아 보인다. 진보는 오직 선이며, 좀더 근사하고, 달콤한 신세계를 향한 거절할 수 없는 유혹들이다. 하지만 가치가 내재되어 있지 않은 몰가치적인 테크놀로지는 없으며, 항상 거기에는 역사적인 함의가 깃들기 마련이다. 문명의 물적, 정신적 조건 속에서 버둥버둥 살아가는 인간들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거다.
그 풍경은 유동적이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테크놀로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렇게 산업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아니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기 위해 운동한다. 우리시대 자본의 최첨단 육체인 테크놀로지, 특히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혁신으로 이끄는 테크놀로지들은 그렇게 쉼없이 이동한다. 그리고 우리를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데려가는거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발전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마치 인간의 유희와 인간을 분리해서, 인간의 철학과 인간을 분리해서, 인간을 인간이라고 믿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인간과 분리해서 인간을 그저 %와 경제도표 속의 숫자들로 만들어버린다. 포털이 지배하는 웹에서는 인간은 '트래픽의 양'으로 계량화되고, IPTV가 지배하는 근미래에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들은 '클릭율'로 계량화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숫자로만, 이윤이 발생하는 어떤 확률적인 통계치의 일부로만 의미가 규정된다.
근미래.
온갖 환락과 쾌락이 넘치는 이미지들의 천국.
그 온갖 이미지들이 눈구멍 속으로 몰려든다.
디스토피아.
인간.
죽음.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시대.
어.떻.게.
시스템을 교란할 것인가.
어.떻.게.
질문하라.
대답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우리는, 아직, 대화의 풍경 속에 있다.
대화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덧.
조지 오웰가 근심한 미래와 올더스 헉슬리가 염려한 미래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징권력에 의해 권력이 '문화적으로 승계'되는 사회에 대한 근심어린 고민과 닿아 있다.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그 모든 성원들, 시민들,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든,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든, '속물적인 욕망'들은, 그 욕망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욕망들은 그 욕망을 채색하고 위장하는 각각의 이미지들을 갖고 있고, 그렇게 외투를 입는다. 조정하는 권력은 여전히 베일 속에 있고, 대신 그 권력을 둘러싼 다채롭고, 반짝이는 외투들를 입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권력이 써놓은 각본을 충실히 외우고 있다.
p.s.
엔디님께 감사드립니다. : )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떠오른 글이 있다.
개인적으론 블로깅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포스트 중 하나였는데, 그 글에는 미디어비평가 닐 포스트만이 자신의 책에 썼던 서문을 인용하고 있는 문장이 있다.
"오웰은 외적으로 우리를 압제하는 세력에 의해 우리가 지배당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반면 헉슬리의 혜안은 사람들에게서 개인의 자주성, 성숙함, 그리고 역사성을 뺏는데는 Big Brother같은 사람이 필요없다고 내다 보았다. 바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억누르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에게서 생각할 능력을 빼앗아간 테크놀로지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지 오웰이 두려워 했던 것은 우리에게서 책을 못읽게 막을 압제자였다. 헉슬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Brave New World에서는 책을 금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왜냐면 누구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웰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리에게서 정보를 빼앗아 갈 사람이었지만, 헉슬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줌으로써 우리가 수동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오웰은 진실이 감춰질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가 두려워 했던 것은 우리가 아주 하찮은 문화로 전락해 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 아거, 닐 포스트만의 타계에 부쳐, 포스트만의 'Amusing Ourselves to death 책 서문' 중에서
조지 오웰이 두려워 했던 것은 우리에게서 책을 못읽게 막을 압제자였다. 헉슬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Brave New World에서는 책을 금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왜냐면 누구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웰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리에게서 정보를 빼앗아 갈 사람이었지만, 헉슬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줌으로써 우리가 수동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오웰은 진실이 감춰질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가 두려워 했던 것은 우리가 아주 하찮은 문화로 전락해 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 아거, 닐 포스트만의 타계에 부쳐, 포스트만의 'Amusing Ourselves to death 책 서문' 중에서
테크놀로지는 일견 몰가치적이며, 몰역사적인 것 같아 보인다. 진보는 오직 선이며, 좀더 근사하고, 달콤한 신세계를 향한 거절할 수 없는 유혹들이다. 하지만 가치가 내재되어 있지 않은 몰가치적인 테크놀로지는 없으며, 항상 거기에는 역사적인 함의가 깃들기 마련이다. 문명의 물적, 정신적 조건 속에서 버둥버둥 살아가는 인간들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거다.
그 풍경은 유동적이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테크놀로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렇게 산업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아니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기 위해 운동한다. 우리시대 자본의 최첨단 육체인 테크놀로지, 특히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혁신으로 이끄는 테크놀로지들은 그렇게 쉼없이 이동한다. 그리고 우리를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데려가는거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발전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마치 인간의 유희와 인간을 분리해서, 인간의 철학과 인간을 분리해서, 인간을 인간이라고 믿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인간과 분리해서 인간을 그저 %와 경제도표 속의 숫자들로 만들어버린다. 포털이 지배하는 웹에서는 인간은 '트래픽의 양'으로 계량화되고, IPTV가 지배하는 근미래에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들은 '클릭율'로 계량화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숫자로만, 이윤이 발생하는 어떤 확률적인 통계치의 일부로만 의미가 규정된다.
근미래.
온갖 환락과 쾌락이 넘치는 이미지들의 천국.
그 온갖 이미지들이 눈구멍 속으로 몰려든다.
디스토피아.
인간.
죽음.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시대.
어.떻.게.
시스템을 교란할 것인가.
어.떻.게.
질문하라.
대답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우리는, 아직, 대화의 풍경 속에 있다.
대화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덧.
조지 오웰가 근심한 미래와 올더스 헉슬리가 염려한 미래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징권력에 의해 권력이 '문화적으로 승계'되는 사회에 대한 근심어린 고민과 닿아 있다.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그 모든 성원들, 시민들,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든,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든, '속물적인 욕망'들은, 그 욕망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욕망들은 그 욕망을 채색하고 위장하는 각각의 이미지들을 갖고 있고, 그렇게 외투를 입는다. 조정하는 권력은 여전히 베일 속에 있고, 대신 그 권력을 둘러싼 다채롭고, 반짝이는 외투들를 입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권력이 써놓은 각본을 충실히 외우고 있다.
p.s.
엔디님께 감사드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