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출발한 곳을 기억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건 당신이 향하게 될 곳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1.
장 그르니에의 [섬]을 나는 아주 지루하게 읽었다. 내가 [섬]을 읽은 이유는 까뮈의 호들갑스런 발문 때문이었다.
아마도 나같이 속은 기분 드는 독자들이 몇몇 있으리라. 그렇게 지루하게 읽었지만, 그르니에가 쓴 '그 구절'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물론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그 구절은 어떤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코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그 기억이 찾아오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 그건 유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건가, 나는 떠올린다. 잘은 모른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순간'이다. 그건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의 온 생애를 되돌릴 때 지금의 전혀 다른 '자기'가 되게 만든 그 순간들. 나는, 나에겐 지루했던 [섬] 이야기를 하고 싶은게 아니라, 물론, 블로깅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다.

2.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그저 소통하기를 원해서, 혹은 자신의 발언이 갖는 공적인 무게를 무겁게 하고자, 또는 그저 자신을 되돌아 보기 위해서... 물론 그 모두는 서로 어느 정도는 섞여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다. 아거의 어투를 빌자면, 블로그는 시멘틱 기억과 에피소딕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시멘틱 기억과 에피소딕 기억은 편의적인 분류일 따름이고, 어떤 기억도,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의미있다. 그런데 그걸 획일적으로 어느 한편의 포스트가 존재할 수 있다고 우기는 태도에 대해서는 그 과격함에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아무튼 포스팅은 '관계'의 테두리 안에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다. 블로깅은 '관계' 안에 있다. 블로깅에서 가장 중요한 포스팅 역시 그러하다. 그건 우리가 그 '관계' 속에서 사유할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진실을 반영한다. 그 '관계'라는 괴물, 혹은 축복, 또는 알 수 없는 매트릭스 속에 우리는 있다.

포스팅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의 포스팅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당신의 포스트가 기억해야 하는 사유의 편린은 누구의 것인가?그건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것인가? 

모든 블로깅에는 저 마다의 출발점이 있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출발점에 대해, 혹은 그 경유지에 대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포스팅하는 이유는,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더럽게 우울하고, 지랄맞게 쓸쓸한 세상(혹은 블로고스피어)에서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니까. 그건 당신의 포스팅을 출발시킨 그 '사유의 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링크와 인용은 그걸 가능하게 한다. 링크와 인용은 그 기억을 견고하게 붙잡는다.  그 기억은 관계에 닿아 있으며, 그 관계는 다시 당신과 닿아 있다. 그리고 그건 당신을 순간이나마 기억해주는 당신의 독자에게 이 기억이 여행해야 할 곳을 알려준다.

그건 세상을 조금은 더 따뜻하게, 조금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다.



* 발아점

July 18, 2005
아거, 그때나 지금이나


* 알림. (200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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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Ephed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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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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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izim 2007/08/20 09:31

    [시멘틱 기억과 에피소딕 기억은 편의적인 분류일 따름이고, 어떤 기억도,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의미있다.]
    며칠전 올블 인기글을 보며 답답했던 게 그거였어요. 꼭 공적, 미디어적, 비개인적, 정보성 글만 우월하고 가치있는 게 아닌데... 블로거가 곧 독자이고 블로그 없는 독자까지 포함하면, 각양각색의 블로거만큼이나 각양각색의 독자가 있는 것이니 일상사, 사적 이야기, 사색과 단상, 에피소딕 기억이 자신에게 무가치하다고 남들에게도 무가치한 건 아닌데 말입니다. 단 블로그계가 다양성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만큼은 경계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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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8/21 01:31

      공감합니다.
      거대 이슈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고, 또 의미있는 공적 담론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한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크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들 역시 가치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자는 서로 별개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 )

  2. rince 2007/08/20 09:30

    저 같은 경우 기억할 가치가 있는 포스트의 작성을 거의 해본적은 없지만 ^^;
    일회적이고 소모성이 짙은 포스트여도 웃음을 나눈다는 목적으로 포스팅을 하고 있지요.

    포스트 자체가 기억할 가치라기 보다는, 웃음으로 인해 포스트에 가치가 부여된다고 할까... 또 즐거운 한주의 시작이네요. 이번 주말에는 처가댁에 내려가서 장어를 얻어 먹고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대구라 벌써 기대가 되네요

    고담대구 투어~ ^^;
    무사귀환을 기도해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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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8/21 01:33

      겸손이 과하십니다. : )
      rince님 블로그에는 종종 가는데요.
      늘 재밌게 웃고, 또 감사한 마음입니다.

      대구 잘 다녀오세요~!

  3. 情人 2007/08/20 14:26

    블로그 포스팅의 의미에 관해
    마지막 구절에서 표현하신 거.
    무척 순수하게 정의 내리신 거 같네요.

    왠지..
    그런 '순수'가 우리들의 심연에 분명히 존재하는데
    우리는 왁자지껄한 '현실'에 이끌려
    그 심연을 미처 보지 못하고
    미구를 떠도는 것이 아닐까도 싶네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슴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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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8/21 01:33

      고맙습니다. : )

  4. egoing 2007/08/20 19:36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아거님이란 분도 저는 처음알았내요.
    그런데 이분의 글은 RSS가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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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8/21 01:35

      위 링크된 글은 예전 '무버블타입'에서 쓰셨던 글이구요.
      최근에는 http://gatorlog.com 로 가시면 쉽게 RSS를 통해 구독할 수 있습니다. : )

  5. jef 2007/08/21 12:38

    소통의 욕구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중 하나겠지요? 링크를 거는 것, 트랙백을 보내는 것, 무언가를 끄적대는 것.

    저는 살아있는것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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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7/08/22 22:43

      물론이죠.
      그런데 가끔은 내가 정말 살아있나, 내가 나인가.. 이런 생각도 종종 하게 되지만요. ㅎㅎ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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