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잉 인터뷰 S#8. 허무에 대하여

2012/01/25 19:32

인터뷰이 : 이고잉 (egoing)
인터뷰어 : 민노씨

일시 : 2011년 12월 30일 2시 17분 ~ 11시 15분
장소 : 한남동 복합문화공간, 그리고 밥집과 커피전문점.

1. 인생이란 진지한 표정으로 거론할 수 있는 그런 하찮은 게 아니다

2. 마당

3. 탐앤탐스


1. 이고잉 egoing
2. 블로거 이고잉
3. 생활코딩
4. 인터넷
5. 스트림과 아카이빙
6.
트위터
7. 미학과 공학
8. 허무에 대하여
9. 우린 그냥 좀더 이야기하기로 했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고잉, 어린 시절 



S#8. 허무에 대하여 @탐앤탐스

"우리가 행복을 발견하는 속도는 너무 느리다."


- 허무 ; 사유의 기획자가 사라지다  

"세계만큼이나 나는 나 자신에게 조차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언어적인 관념들은 대체로 명징하게 파악되는 것이지만, 그 언어적인 관념들 조차 어디에서 온 것인지 또 이것들이 어디로 사라지는지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이것들은 대체로 정황적으로 파악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면 우선 허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봤으면 좋겠는데....


점점 어떤 사안을 당위의 관점으로 보기 보다 메커니즘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건 몹시 차가운 시선인데, 이를테면 옛날 같으면 불의라며 칼날을 던졌을 사안들도 상태보다는 맥락을 들여다보면서 덤덤해진다. 지난 몇 년간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컨텍스트'인데, 이 컨텍스트라는 것이 나를 냉혈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묘한 것은 분석이 심화될수록 기획의 입지가 축소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사안을 만났을 때, 그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고, 어떻게 배출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하자면 기획자가 있었는데, 그 사안을 분석하는 분석자의 입지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기획자의 지분이 축소된다고 할까?"


- ‘사유와 행위가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나는 생각과 행동의 일치를 몹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행동할 수 없는 것은 사고하지 않으려고 했고, 여기에는 죄의식이 집요하게 작용했다.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옅어지더니 급기야는 생각과 행동은 일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생각과 행동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행동이 물리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면, 생각은 가상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것들이 똑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동기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억압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걸 인정하게 됐달까? 그렇게 되니까 사유를 제어하는 브레이크 같은게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허무주의로 흐른게 아닐까? 정황적으로 추정해본다."

- 그래서 좀더 자유롭고 평화롭다?

“자유롭다는 느낌에 가깝다. 평화롭지는 않다. 기획자는 평화롭기 위해서 존재하는건데, 기획자의 입지가 축소된다는 건 평화와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 기획자가 사라진 지금이 예전보다는 더 좋은가?
"지금도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욕망에 대한 죄의식은 많이 완화됐다. 이를테면 성적 충동 같은 것을 예전엔 죄악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면 욕망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로 뛰쳐나가려는 욕망에 대한 단속을 유지하는 이상 마음대로 욕망하고 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욕망이란 참 묘한 것이다. 정신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그것을 희망한 적이 없음에도 이 몸뚱이와 함께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종의 명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명령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결정한다. 이 명령만을 위해서 산다면 나는 그 명령권자가 가이드하는데로 사는 것이고, 이 명령을 무시하면서 산다면 ‘도’의 영역이겠지.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나의 삶을 살려고하는 주의다. 물론, 이 또한 결과적으로 그 명령의 결과라면 어쩔수 없는거겠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욕망(가령, ‘변태스럽다’는 표현으로 대변되는)에 대해 여전히 죄의식이나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어떤가?

물 론이다. 당연하다. 내 안의 욕망을 내 밖으로 꺼내놓을 때는 인터페이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인터페이스를 무시하고 그것을 표출했을 때 폭력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내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그 욕망이 아무리 난장판이라도 그것은 존중되야 하는 것이다.


- 직장에 다닐 때의 나, 지금 취미생활하는 나, 많이 달라졌나?

“간단히 대답하긴 어렵다. 얼굴은 좋아졌다더라.”


- 자신의 모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있나?

“없다. 친구에게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아버지에겐 할 수 없는 이야기. 아버지에겐 할 수 있지만 친구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


- 비밀도 모두 털어놓고 싶은 연인…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없나?

“왜 연인끼리는 비밀이 없어야 하나? 그 비밀을 포함한 포괄적인 애정이 사랑이 아닐까?”


- 그 비밀이 사랑이라는 건 어떤 의민가?

“개발자들은 화이트박스, 블랙박스 야기를 한다. 공개된 부분과 공개되지 않은 부분. 화이트 박스는 공개된 부분이고, 블랙박스는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다. 그 양자를 모두 더해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박스를 열어야만 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 니체는 “곱사등이에게 그 혹을 떼내면 영혼을 빼앗는 일”이라고 말했다.  

“비유는 참 마음에 안들지만, 동의한다.”

- 모두를 공유하는, 영혼의 그림자 마저도 사랑하는 그런 건…

“그럴수 없다. 나 조차도 나를 100% 공유하지 못하는데, 타인과 그걸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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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1514)

알브레이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
이고잉에게 <미학>이란 화두를 붙잡게 한 계기가 된 작품 (인터뷰 7. <미학과 공학> 참조)



- 문득, 이고잉이 자주 쓰는 관용적 표현이 궁금하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문득 든 생각인데> 블로그엔 ‘그런 점에서’가 반드시 들어간다.”  


- 인과가 중요한가?

“인과는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이다. 이를테면 블로깅을 할 때 ‘그런 점에서’를 쓸 때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흠 그러고보면, 나는 <그런 점에서>를 쓰기 위해서 블로깅을 하는걸까? (웃음). 또는 <이를테면> (아이폰으로 블로그를 살피며) ‘이를테면’도 많이 쓴다. <예를 들어>라는 말은 안 쓴다.”

- 애인이 생기면 블로그를 보여주고 싶은가?

“싶은 건 아닌데, 보여줄거다.”


- 올해(2011년) 가장 중요한 사건은?

“퇴직과 생활코딩, 효도코딩의 시작”


-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적 이슈 중에선?

“전혀 없는 것 같다. 떠오르는 게 없다.”


- 올해의 10대 뉴스 같은 걸 보면 어떤가? 공감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봐야 알 것 같다.”


- 뉴스를 전혀 안보나?

“작년부터 좀 그랬는데, 올해엔 거의 뉴스를 보지 않는다.”


- ‘풀링’(Pulling)과 ‘푸싱’(Pushing)

“폴링은 정보를 내가 당겨오는 것이고, 푸싱은 누군가 정보를 나에게 밀어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폴링은 인터넷이고, 푸싱은 방송이다. 다시 인터넷 안에서 대표적인 폴링은 검색이고, 푸싱은 뉴스다. 포털은 폴링과 푸싱을 컨버전스한 형태의 서비스이고... 집에는 TV가 없고, 최근엔 포털에 가지를 않기 때문에 푸싱되는 컨텐츠에 노출되지 않고 있다. 요즘 들어 느껴지는 이 아나키즘의 배후가 아닐까 싶다.“


- 각종의 모바일 앱 메시징 서버스의 알림 푸시들도?

“그런 말단적인 푸시들도 다 끊는다. ”


- ‘푸싱은 리얼타임, 풀링은 비동기적’

“푸시는 리얼타임 속성이 강하고, 풀링은 비동기적인 속성이 강한데, 나는 풀링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미디어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이고, 내 삶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도 적절한 것 같다. 이메일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필요할 때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카카오톡 푸시는 상대방이 필요할 때 봐야하니까. 푸쉬와 폴링, 동기와 비동기는 다르지만 미묘하게 연관되어 있다.”


- 자기를 지키는 것,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것이 모든 고려사항에서 가장 우선하나?

“그런 것 같다. (‘그렇다’인가,  ‘그런 것 같다’인가?) 그런 것 같다.”


- 싸우고 싶었던 때는 없었나?

“당연히 많지. 나도 사람인데…. 다만 굳이 싸워서 머하나 싶다. 이겨서 그거 어디에 쓸건데? 이런 생각을 점점 많이 한다. 이기고 싶은 욕망은 점점 다스러지는 것 같은데,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잘 제어가 안된다. 걱정이다.”


- 10년 전 이고잉과 지금 이고잉은 단절인가 연속인가?

"연속이다. 나는 단절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가난한 재능에 단절하기에는 투자한 노력이 아깝고, 사실 단절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본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과거의 총량이다. 그래서 결단하지 않는다. 그냥 흘러왔다. 나 보다 순응적인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 퇴사는 결단이 아닌가?

"음. 이건 좀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결과적으로 말하면, 퇴사하지 않는 것이 퇴사하는 것 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는 (생활코딩과 같은)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내부적으로는 메너리즘이 고조되고 있었다. 내가 매너가 좀 좋다. (웃음) 회사 사람들이 그 말을 하길래 그럼 내 별명을 매너리즘으로 하자고 그랬다. 아마 그 당시에 내 몸에서는 초사이어인처럼 매너리즘이 이글이글했을꺼다. 그 때 모종의 위기감을 느꼈는데, 이러다가 지금까지 쌓아둔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매너리즘을 처세로 버티는 것도 나중에는 버거워지더라. 이런 긴박감속에서 지루하게 퇴직했다. 6개월짜리 퇴사작전이었다. 동료들에게는 미안하고, 또 고맙다.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 성과와 평판 + 선택)

- 우연한 계기들은 없었나?

"있다. 묘한건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나를 변하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 나를 절망하게 하는 것들이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을 새롭게 돌아보도록 해준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나는 소심하고, 좋게 말하면 신중해서, 현재의 감정을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감정이 변했을 때 이전 감정에 대해 평가하거나 행동하는데, 부정적인 감정이 물러간 후에도 결론이 그대로라면 움직일 때가 된거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이 된다. 이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있는거니까... "

- 가장 강하게 나를 느낄 때는?

“추울 때, 성적 충동을 해소하지 못할 때. 몸이 아플 때. 누군가로 인해 내 마음이 힘들 때.”


- 성취를 통해서 자기, 강한 나를 느끼진 않나?

“그럴 땐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없어지는게 행복인가 생각하기도 한다. 나를 느끼게 하는 건 대개는 불행을 통해서다. 어쩌면 나를 느끼는 것 자체가 불행인 것 같다. 사랑은 나를 못느끼게 하기도하고, 느끼게하기도 한다. 위대하면서 빌어먹을 것이다.”


- 행복과 불행은 대칭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대칭이 아닌데, 이게 마치 대칭인 것 처럼 바라보는 것 같다. 행복은 항상 상대적이다. 불행은 상대적일 때 극대화되고, 절대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행복은 항상 더 큰 행복을 요구한다. 하지만, 불행은 아무리 작아도 주목된다. 이건 대단히 불공정한 룰이다. 불행은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데, 행복은 그 배후에 더 작은 행복이나, 불행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항상 감사하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항상 감사할 수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행복이 불행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형벌이다.”


- 행복은 운동에너지, 불행은 위치에너지

“비유하자면 행복은 운동에너지, 불행은 위치에너지다. 행복은 상태의 변화를 통해서  맥락적으로 생겨나지만, 불행은 위치에너지 처럼 그 상태만으로도 생겨난다. 대체로 불행하고 가끔만 행복한 건 그래서 인 것 같다. ”

- 우리가 행복을 발견하는 속도는 너무 느리다

“매트릭스에서 요원이 모피어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완벽한 유토피아를 만들었더니 너희들이 죽었어. 그런데 1997년의 상황을 재현했더니 죽지 않았어. 대단히 중요한 관점인 것 같다.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지 않은가? 그게 현대사회의 불행이 갖는 실체인 것 같다. 문명화는 물리적이고 명백한 불행을 급격하게 제거하지만, 우리가 행복을 발견하는 속도는 너무 더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빠른 속도로 덜 불행해지고 있는데, 너무 느리게 행복해지고 있다. 이건 행복과 불행의 속성상을 따져보면 불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 혼자 있을 때, 함께 있을 때..  

“혼자 있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된 것 같아 외롭고, 함께 있으면 나로부터 소외된 것 같아 외롭다. 외로움은 보존된다. ”

- 외로움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냥 친구라고 생각해두자.”


-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행을 만든다

“염세하지 않고는 행복하기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낙천적인 사람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이러고 보니까 내가 엄청 염세적인 것 같은데.... 난 어떤 점에선 낙천적이고, 어떤 점에선 염세적이다. 그러고보면 조울이 함께 오는 현상은 병리적인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 같다. 또 울증은 있어도 조증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항상 ‘울’ 할수는 있지만, 항상 ‘조’할 수 없는거... 그게 삶인건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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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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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12/01/27 03:52

    * 사소한 추고 (오타 수정)
    행복이 불행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형벌이다.
    -> 행복이 불행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형벌이다.

    perm. |  mod/del. |  reply.
  2. Derick 2012/01/28 19:26

    다양한 주제에 대한 솔직한 인터뷰네요. 어떤 생각으로 기획하신 인터뷰인지 궁금합니다. 그나저나 이고잉님의 사유의 깊이나 독창성이 정말 놀랍네요.. 제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야되겠다는 자극도 받았습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12/02/24 16:50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댓글인데 제가 답글을 깜박했네요.. 죄송..^ ^;;

      1. 기획 의도라는 게 딱히 있진 않아요. ㅎㅎ 다만 블로거는 자기가 관련맺은 세계(자기 자신과 사람 그리고 사회)를 이야기하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고, 그 중에서도 교류하는 블로거들과의 관계와 그 분들의 세계를 궁금해 하는 일은 또 당연한 일이라서, 그 블로거들이 사유하는 풍경의 편린이나마 솔직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입니다.

      2. 이고잉 님은 아주 깊게 사유하시는 분이시죠. : )

  3. scareye 2012/02/23 01:28

    잘 읽었습니다.
    오타 신고합니다.

    "6개월짜라"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12/02/24 16:50

      아이코, 캄솨!
      당장 수정해야겠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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