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블로거가 10년만에 만난 친구

2011/07/28 10:54
제목 속 '어떤 블로거'인 내가 제목 속 '친구'인 너를 생각하면서 쓰는 짧은 단상. : )

나는 사적인 이야길 블로그에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 친구도 그럴 것 같다. 호구조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니까. 얼마전 지상파 TV 방송과 짧게 인터뷰했다. 그 방송을 그 친구가 우연히 전해 듣고, 내 블로글 통해 연락을 해왔다. 그게 지지난 주 일이다. 그리고 10년만에, 정말 정말 오랜만에, 평생 못 볼 것 같던, 그 친구를 만났다. 한번은 그 친구와 둘이. 그리고 최근에는 그 친구의 가족들(멋진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과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언젠가 썼듯, <나와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오래 전 그 친구에게 선물한 적 있다. 그 친구는 최근 다시 그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나와 너>를 다시 훑어봤다. 어떤 문단이 마음에 들어왔다.

"두 가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성에는 두 개의 극(極)이 있다.

어떠한 사람도 순수한 인격이 아니며, 어떠한 사람도 순순한 개적 존재가 아니다. 완전히 현실적인 사람이란 없으며, 완전히 비현실적인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이중의 '나'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인격적 경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인격이라고 부르고, 개적 존재의 경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개적 존재라고 불러도 좋은 사람이 있다. 인격과 개적 존재 사이에서 진정한 역사는 이루어진다.

사람이, 인류가 개적 존재에 의하여 지배되면 될수록 '나'는 더욱 더 깊이 비현실성에로 타락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사람과 인류 안에 깃들어 있는 인격은 - 다시 불러일으켜질 때까지- 지하의 숨은, 말하자면 무가치한 생존을 이어가는 것이다.

***

사람은 그의 '나'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이중성 안에서 근원어 '나-너'의 '나'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더 인격적이다."(97)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표재명 역, 문예출판사.

부버의 '인격'과 '개적 존재'의 대비는, 내가 이해한 수준으로 인용해 풀면, 인격은 "하나의 공존자"(95)로서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96) 사람이다. 반면 개적 존재는 타인의 눈("그의 '내 것(Mein)'")을 통해 자기를 바라보고(96), "다른 여러 개적 존재에게서 분리시킴으로써"(95) 자신의 특수성을 만들어낸다. 인격은 '나-너'라는 "관계의 세계"(12)에서 자라고, 개적 존재는 '나-그것(그 여자/그 남자)'이라는 "경험으로서의 세계"(12) 속에서 만들어진다. 쉽게 말해 인격은 관계 속에서 자라고, 개적 존재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개적 존재는 타인들 속에 있는, 내가 생각하고, 분석하는 '그것(그들)의 나'에 의해 만들어지는거다.

점점 더 '그것의 세계'은 확장한다. 가장 아름답고, 진실했던 추억들도 결국은 '그것의 세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과는 결코 '관계' 맺지 못하니까. 그 소중했던 추억조차 현실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그것'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쓸쓸해지는데, 결국 그 쓸쓸함은 추억을 불러오고, 현실은 점점 더 무가치해진다. 어릴 적엔 참 뻘짓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뻘짓을 하고 싶어도 '타인의 나'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참 부끄럽고, 볼 것 없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나의 창작, 나의 독창성 따위"(96)를 욕망하는 '개적 존재'가 되어간다.

어떤 철학자는 말한다.
"사물의 본성의 핵심에는 항상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있다. '우주의 모험'은 바로 그런 꿈에서 출발하며,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거두어들인다. 이는 '열정'과 평화'가 통합되는 비결이다. 즉 수난은 '조화들의 조화'에서 그 종국에 이른다는 것이다. '청춘'과 '비극'의 종합을 동반하는 이 '최종적인 사실'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이른바 '평화'의 감각이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는 그 다양한 개체적 계기들에 있어 가능한 완전성들을 지향하도록 설득되기에 이른다."(446)

-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오영환, 한길그레이트북스01, 한길사.
 
한길사라는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그레이트'라는 수사를 붙이며 펴낸 시리즈 첫 번째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뭘 의미하는 건지는 아무리 읽어봐도 모르겠지만, 이 문단 첫 문장은 너무 맘에 든다.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사물의 본성"에 담겨진 핵심이라니. 그건 마치 70년대 포크송의 한 구절 같다. 이런 얘기는 시장에서 나물파는 아줌마나 음악 좋아하는 멋진 카스테레오를 손수 구비한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더 잘 알 것 같은거다. 오래된 친구들, 내 청춘을 다시 여행하게 만들어주는 친구들을 떠올리면 나는 화이트헤드의 그 문장을 생각한다.

블로거라는 존재는, 더욱이 나처럼 요리나 인테리어, 혹은 연예 하다못해(?) IT 기기 이야기도 못하는(농담, 농담유골. ㅎㅎ) 반백수 전업블로거는 마치 청춘의 꿈을 붙잡고 있는 곧 다가올, 아니 이미 결실을 맺은 비극의 실현자 같다. 그런 초라한 블로거에게 선물처럼 다시 온 오래된 친구가 너무 너무 고맙다.

너도 폭우 조심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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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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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비 2011/07/29 08:28

    귀한 만남 축하드려요. :)
    문득, '뜰만한 글'은 못쓰시는(!) 블로거 민노씨가
    책 읽어주는 블로깅을 하시면 정말 근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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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8/01 06:17

      앞으론 뜰만한 글도 한번! ㅎㅎ
      농담이고, 과분한 댓글이시네요.
      아직 제주에 계신가요? 부럽다능...;;

    • 신비 2011/08/01 11:50

      네, 아직 제주에요.
      한동안 더 부럽게 해 드릴것 같은데요. 히히.

    • 민노씨 2011/08/01 20:04

      아... 정말 떠나고 싶다!!!!!!!!!!! ㅜ.ㅜ; (잉잉)

  2. 비밀방문자 2011/07/29 15:40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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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8/01 06:17

      만나서 얘기해주마. ㅎㅎ

  3. 빨간장미 2011/08/16 10:59

    오랜만에 들렀는데 훈훈하면서 뭔가 슬픈느낌이 들어요. 두 번 세번 읽게되요.(제게는 좀 어려운 글이기도 해서;;)
    저는 민노씨를 잘 모르지만, 민노씨는 블로그를 통해 느낀 바로는 매우 가치있는 세계를 개척하는 분 중 하나입니다 :) 개적존재라는 느낌에 슬퍼마시길, 인격적 존재로서만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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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1/08/20 16:13

      요즘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괴로운데, 장미님 댓글이 큰 위로가 되네요...
      고맙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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